벌써 그걸 할 때가 됐나.
비각성자에게 올림픽이 있다면 헌터에겐 랭킹전이 있었다.
랭킹전은 말 그대로 헌터들의 순위를 매기는 경기였다. 토너먼트로 진행되며, 2년에 한 번씩 열렸다.
다만 올림픽과 달리 랭킹전은 국가별로 진행되었다. 세계의 모든 상급 헌터들이 한 나라에 모이는 것은 꽤나 위험 부담이 크기 때문이었다.
이나는 지난 한국 랭킹전을 떠올려 보았다.
‘분명 지난 랭킹전 1위는 도하 씨였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때 시현은 랭킹전에서 쏙 빠졌다는 사실이었다.
던전이 언제 터질지 모를 노릇이니 아무리 큰 행사라도 최소한의 상급 헌터는 남겨 놓아야 했다. 지난 랭킹전 때는 시현이 뒤에 남았었다.
도하는 지난 랭킹전에서 우승을 차지했지만, 시현이 참가했다면 결과가 달랐을 거라는 의견도 많았다. 도하 입장에서는 허무한 우승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그 전 랭킹전에서는 시현이 도하를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때는 도하가 각성한 지 얼마 안 됐던 터라 전투 경험이 부족했다.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결국 두 사람이 제대로 맞붙은 적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어쩌면 그래서 도하가 시현에게 집착하는 걸지도 몰랐다.
‘이번엔 결승에서 만날 수 있으려나.’
이나는 파일의 내용을 보기 좋게 홈페이지로 옮기며 생각했다.
그때 볼트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계약자도 랭킹전에 참여하는 건가?]
‘미쳤냐. 내가 거길 왜 참가해?’
이나는 순간적으로 기겁해서 오자를 냈다. 이나가 그것을 지우고 있자 이번엔 이즈가 아쉬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참여하면 분명 우승일 텐데!]
‘그런 거 필요 없어.’
이나는 지난번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집에서 TV로 랭킹전을 볼 것이었다. 한 손에 맥주를 들고 소파에 편히 앉아서.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즐거웠다.
하지만 히죽히죽 웃던 이나는 곧 떠오른 생각에 입꼬리를 내렸다.
‘그사이 K가 무슨 일을 벌이진 않겠지?’
앤드류가 죽었다. 어쩌면 K의 다른 멤버들이 그와의 연락이 끊긴 걸 이상하게 여기고 그의 행적을 추적할지도 몰랐다.
그럼 그들도 한국에 올…….
‘아냐. 생각하지 말자.’
이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었고, 마침 시현의 주도하에 그런 발판이 만들어졌다.
K에 대한 일은 세 사람이 해결해 줄 터였다. 이나는 그들을 믿었다.
‘그러니 나는 지금 일에 집중하자.’
이나는 마침표를 찍으며 홈페이지에 올릴 글을 완성했다. 그것을 팀장에게 확인받자 바로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이나가 글을 그대로 업로드하는데 마침 자리를 비웠던 홍보 팀 직원이 돌아왔다.
그것도 엄청 무거워 보이는 쇼핑백을 들고.
쿵!
그녀가 그것을 테이블 위에 놓자 육중한 소리가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에 집중되었다.
그녀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홍보 팀 직원들을 불렀다.
“모두 와 보세요! 랭킹전 포스터가 완성됐어요.”
“오. 벌써?”
팀장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로 다가가자 다른 직원들도 슬금슬금 몸을 일으켰다.
이나도 그쪽으로 다가갔다. 깔끔하게 잘 디자인된 포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팀장도 마음에 드는지 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뽑혔네. 이대로 붙이면 되겠어.”
“그쵸?”
“응. 이제 이걸 어디다 붙이냐를 생각하면 될 것 같은데.”
“일단 이곳, 헌터 협회랑 랭킹전이 열릴 경기장 일대에 붙여야죠.”
“지난 랭킹전 때 경기장 근처에 포스터를 너무 적게 붙였던 모양이야. 아쉬웠다는 소리가 많더라고. 그러니 이번엔 그 근처에 좀 많이 붙였으면 좋겠는데…….”
팀장이 주변에 모인 직원들을 눈으로 주욱 훑었다. 그중엔 이나도 있었다.
그는 이나와 그녀의 옆자리에 앉는 대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두 사람, 잠깐 와 봐.”
이나는 대리와 눈을 마주하다가 팀장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팀장이 포스터를 손짓하며 말했다.
“두 사람이 이틀 뒤에 경기장으로 가서 이 포스터 좀 붙이고 와 줘.”
이나는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솔직히 하기 싫었다. 이 더운 날 에어컨이 빵빵한 사무실에서 나가라니.
대리도 마찬가지인지 이쪽은 대놓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강원도 지부 사람들에게 시키면 되지 않나요?”
“강원도 지부에 일손 부족한 거 너도 알잖아. 그러니까 네가 좀 갔다 와.”
“네…….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해.”
팀장은 그런 대리의 표정을 못 본 척 웃으며 대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가는 게 확정되자 이나는 몰래 한숨을 삼켰다.
‘윈티에게 에어컨 좀 부탁해야겠네.’
들킬 수 있으니 대리에게는 바람만 좀 불어다 주라 하고 말이다. 그래 봐야 에어컨보다는 덥겠지만.
대리에게 묵념을 표하며 이나는 이틀 뒤 스케줄을 비웠다.
***
랭킹전 경기장은 강원도 정선에 있었다. 상급 헌터들의 경기인 만큼 혹시 모를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그 탓에 이나는 대리의 차를 타고 이 더운 날 정선까지 이동해야 했다. 마침 해도 아주 쨍쨍했다.
차에서 내린 이나가 해를 올려다보며 눈살을 찡그렸다.
“날씨 엄청 좋네요.”
“좋다 못해 지나치게 뜨겁고 말이죠.”
대리가 휴대용 선풍기를 얼굴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이나는 그 모습을 보며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혼자만 윈티의 축복을 받으려니 미안한걸.
이나는 리카에게 슬쩍 눈짓해 바람을 끌어오도록 했다. 바람이 불자 좀 나은지 대리의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하. 마침 바람이 부네. 살겠다.”
“그러게요.”
“자, 그럼 얼른 끝내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죠.”
이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리가 트렁크에서 포스터를 꺼내는 일을 도왔다.
그걸 들고 경기장 앞으로 가자 대리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럼 이나 씨, 흩어졌다가 여기서 다시 만나죠. 포스터 붙이고 장소 체크해서 나중에 나한테 보고해 줘요.”
“네. 알겠습니다.”
대리가 포스터 더미를 들고 낑낑거리며 걸어갔다. 이나는 땀에 젖은 그의 등을 측은하게 보다가 리카에게 말했다.
“리카, 이것 좀 들어 줘.”
[네엥.]
리카는 바람으로 가볍게 포스터를 들어 올렸다. 덕분에 이나는 빈손으로 편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나는 먼저 경기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경기장 안은 거의 도배하다시피 포스터를 많이 붙여야 했기에 시간이 많이 걸려 나중에 갈 생각이었다.
포스터를 붙일 만한 곳을 찾고 체크하는 것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하지만 혼자서 움직이고 있을 대리를 생각하니 이나는 자신이 더 많이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나는 마침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정령들은 2정령 1조로 움직였다. 한 정령은 테이프를 들고 다른 정령이 포스터를 붙이니 무척이나 효율적이었다.
물론 이나라고 가만히 있진 않았기에 그들은 위층에서부터 움직여 순식간에 포스터를 다 붙이고 1층으로 내려왔다.
“음. 너무 빨리 끝냈나?”
텅 비어 버린 쇼핑백을 보며 이나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정령들이 눈을 빛내며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럼 이나야, 우리 여기 구경하자!]
이나는 슬쩍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아직 대리가 그 많은 포스터를 다 붙였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고민은 짧았다. 이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령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쪽, 이쪽!]
이나는 정령들이 가자는 대로 뒤에서 얌전히 따라갔다. 마치 어린애들을 놀게 해 주는 학부모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정령들이 향한 곳은 경기장의 관객석이었다. 탁 트인 넓은 경기장을 보며 정령들이 감탄을 내뱉었다.
[우와! 엄청 넓어!]
[저기서 경기를 하는 건가 봐!]
[밑에 저건 진짜 잔디인가?]
[…….]
[네움이 아니래! 가짜 잔디인가 봐.]
[신기하구려!]
어린애들처럼 신기해하는 정령들을 보며 이나는 픽 웃었다. 그리고 그녀도 경기장을 주욱 훑어보았다.
그러다 경기장 중앙에 있는 것이 이나의 시야에 걸렸다.
‘저건……?’
어딘가 익숙한 장치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확인하던 이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기억해 냈다.
‘연구소에서 본 그거잖아?’
마침 정령들도 그것을 보았는지 이나에게 말했다.
[이나야, 저거……!]
“어. 봤어.”
헌터 협회 연구소 던전 부서에 있던 기계였다. 던전의 마력이 느껴질 때 반응한다는 그 기계.
그리고 이나 일행이 연구실에 들어가자 반응했던 것이기도 했다.
“나가자.”
[벌써?]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
이나는 몸을 홱 돌렸다. 정령들도 아쉬워하는 얼굴로 그녀를 따랐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된다고, 때마침 예의 그 삐삐 소리가 경기장을 울렸다.
“뭐야? 이거 왜 이래?”
“설마 던전이……?”
이나도 소리 때문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당황한 연구원들이 원인을 파악하려 기계에 달라붙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단 한 명,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나와 눈이 마주친 인물이 있었다.
이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마찬가지로 이나를 알아본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망가자.’
이나는 서둘러 등을 돌렸다. 끈질기게 달라붙던 시선은 이나가 관객석을 나가고 나서야 사라졌다.
밖으로 나온 이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놈의 기계는 왜 내가 다가가기만 하면 울리는 거야?”
[이나가 좋은가 봐!]
“헛소리.”
리카의 부리를 손가락으로 툭 친 이나가 핸드폰을 꺼냈다. 대리에게 연락해 그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연락을 넣기도 전에 뒤에서 그녀를 붙잡는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아.’
이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뒤를 힐끗 보자 절망감이 밀려왔다.
‘망했네.’
생각해 보니 상대는 공간 마법을 사용하는 헌터였다. 이 정도 거리는 쉽게 따라잡을 수 있는 자.
지은이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대뜸 물었다.
“맞죠?”
“무슨 말씀이신지…….”
“목소리 들으니 맞네. 며칠 전에 본부장님과 함께 제 연구실에 찾아왔던 그분, 맞잖아요.”
이건 뭐 빼도 박도 못할 지경이었다.
이나는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 지은이 씨익 웃었다.
“보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