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 이시현 헌터 아니야?”
“천조 길드장? 이나 씨와 아는 사이인가?”
같이 퇴근하던 홍보 팀 직원들이 이나와 시현을 번갈아 보며 수군거렸다.
이런 상황은 이제 익숙했기에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만 안 그래도 생각이 복잡한데 시현이 찾아왔다는 사실이 이나를 조금 난감하게 만들었다.
이나는 한숨을 삼키고 직원들을 돌아보았다.
“먼저들 가세요. 저는 선약이 있어서.”
“그래요.”
“그럼 모레 봐요, 이나 씨.”
직원들은 자리를 비켜 주면서도 연신 뒤를 힐끔거렸다. 그들이 완전히 건물을 빠져나간 뒤에야 이나가 시현에게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던전 공략하느라 바쁠 텐데.”
“안 그래도 지금 막 던전 공략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그런 것치곤 멀끔한데요?”
“씻고 왔습니다. ……더러운 몰골로 이나 씨를 만나긴 싫어서요.”
뜻밖의 말에 이나는 눈을 여러 번 깜빡이다가 목뒤를 문질렀다. 어쩐지 목뒤를 뜨끈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이나는 잠시 어색하게 서 있다가 분위기를 바꿔 볼 겸 장난기를 담아 물었다.
“그래서, 던전 공략을 마치자마자 절 만나러 온 이유는요?”
“조만간 또 바빠질 예정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나 씨 퇴근 시간에 맞춰 오고 싶었습니다. 이나 씨가…….”
시현이 머뭇거리다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요즘 기운이 없다는 말을 들어서 말입니다.”
목뒤를 문지르던 이나의 손이 움찔 떨렸다.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어요?”
“그게…….”
시현이 아까보다 더 난감해하는 얼굴로 작게 대답했다.
“유이한 씨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빠한테서요?”
“네. ……이나 씨에게 무슨 짓을 했냐면서 말입니다.”
이나는 황당한 마음에 입을 벙긋거렸다. 곧 부끄러움이 올라와 그녀는 벌게진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오빠도 참…….”
번호도 모르는 시현에게 연락한 것을 보니 협회 직원인 점을 이용한 듯했다.
그것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서준과 도하에게도 연락을 넣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최근에 이나가 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이한도 알았을 테니까.
한숨을 내쉬던 이나는 시현에게 사과부터 전했다.
“미안해요. 오빠가 귀찮게 했네요.”
“아닙니다. 오히려 다행입니다.”
“네?”
“이나 씨가 기운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잖습니까.”
이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대답 없는 그녀를 가만히 보던 시현이 물었다.
“잠깐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
이나는 시현을 데리고 협회 근처의 인적 드문 카페로 향했다.
그들은 대충 구석에 자리를 잡고 음료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잠시 후 주문한 음료가 나왔다. 이나는 커피를 쭈욱 빨아들였다. 차갑고 씁쓸한 것이 어쩐지 최근 자신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하며.
뜨거운 커피를 홀짝 마시던 시현이 이나를 힐끗 보았다. 그리고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확실히 전보다 기운이 없으시군요.”
“그렇게 보여요?”
“네.”
단호한 대답에 이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시현은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저 때문입니까?”
“네?”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이나가 동그래진 눈으로 시현을 쳐다보았다. 무슨 뜻이냐고 묻는 눈이었지만 그걸 당황한 것으로 착각한 건지 시현의 얼굴에 그늘이 살짝 드리워졌다.
“제가 이 일에 끼지 말라고 해서 그렇게 기운이 없으신 겁니까?”
“아…….”
아니라고 곧바로 대답하려던 이나는 말을 멈췄다. 처음에 시현의 그 말 탓에 답답했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이나가 말을 멈추자 시현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전 그냥 이나 씨가 이나 씨의 삶을 살았으면 해서 한 말이었는데…… 제가 주제넘었나 봅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이나가 한숨과 함께 부정했다.
그럼에도 시현의 안색이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자 이나가 말을 덧붙였다.
“이시현 헌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제 개인 문제예요.”
이나는 일부러 ‘개인 문제’라는 단어에 힘을 가했다. 물어봐도 답해 줄 수 없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자책감에서 조금 벗어났는지 시현이 고개를 들었다. 이나는 입을 연 김에 더 말해 주었다.
“이시현 헌터한테는 오히려 고마워요.”
“……저한테 말입니까?”
“네. 제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려고 했잖아요.”
이건 진심이었다. 시현이 처음 그 말을 꺼냈을 때 이나는 조금 당황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고마운 감정이 앞섰다.
시현이 그녀를 도와주려 한다는 뜻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나저나 신기하네요. 처음엔 우리 둘 다 서로를 경계했던 것 같은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이나가 분위기를 풀어 볼 겸 장난스럽게 말하자 시현도 은은하게 미소를 비쳤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전 사실 이시현 헌터가 그 일에 끼지 말라고 했을 때 이제 절 안 찾아오려나 싶었어요. 이시현 헌터가 헌터인 자신을 제가 부담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할 줄 알았거든요.”
어쩌면 이나가 답답해했던 원인 중 하나가 여기 있을지도 몰랐다. 지금껏 끝내주는 팀워크를 보였던 세 사람과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듣던 시현이 깜짝 놀라며 양손을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 이나 씨가 그 일에 끼지 않아도 이나 씨와 꾸준히 연락했을 겁니다.”
“네?”
“그야…… 가까워지고 싶으니까요. 헌터 대 헌터로서가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서.”
시현이 진지하게 말했다. 이나는 눈을 끔뻑거리다 목을 만지작거렸다.
‘친구가 되고 싶다는 말을 뭐 저렇게 절절하게 하냐.’
꼭 고백하는 사람처럼.
그 탓에 이나의 목이 뜨끈해졌다. 이 상황에서 입을 다물면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질 것 같아서 이나도 말을 보탰다.
“음. 저도 이시현 헌터와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 말에 시현이 웃었다. 들뜬 얼굴로, 부드럽게.
저 얼굴로 저런 미소를 짓는 건 처음 보아서 이나는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이것 참, 눈이 호강해서 감사할 지경이었다.
이나는 괜히 오른 열을 식히기 위해 커피를 쪼옥 마셨다. 이나가 빨대에서 입을 떼는 순간 시현이 갑자기 치고 들어왔다.
“그럼 저도 청호 길드장처럼 불러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시현 헌터’는 너무 딱딱합니다.”
“도하 씨처럼, 이라면…….”
이나는 말끝을 흐리다 불쑥 말했다.
“시현 씨?”
“네, 이나 씨.”
시현이 살포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 미소를 보며 이나는 생각했다.
‘최근에 셋이서 붙어 다니더니 본부장님한테서 성격이 옮았나?’
시현이 왠지 능글맞아진 것 같았다.
이나가 다시 커피를 마시자 시현이 불만 어린 어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불공평했습니다. 백도하는 ‘도하 씨’면서 저는 ‘이시현 헌터’였지 않습니까.”
“음, 그야 이시현 헌터……가 아니라 시현 씨는 뭔가 헌터의 표본 같은 이미지였으니까요. 그렇게 불러야 할 것 같았어요.”
이나가 머쓱해하며 웃었다. 늦게나마 호칭이 바뀌어 만족스러운지 시현도 그냥 웃고 넘어갔다.
그러다 그가 이나를 빤히 보더니 안심한 듯이 말했다.
“그래도 기분이 좀 풀린 모양입니다.”
“아.”
이나는 탄성을 흘리다 입을 다물었다.
정령들도 테이블 위에 앉아 흐뭇해하는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정령들에게도 눈길이 가는 것을 보니 확실히 조금 개운해진 듯싶었다.
“……그러게요.”
“다행입니다. 제가 위로해 주는 데는 재능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말입니다.”
안도한 얼굴로 말하던 시현이 갑자기 머뭇거렸다. 이나가 의아해하며 쳐다보자 시현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이나 씨,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이나 씨 탓은 아닐 겁니다.”
“네?”
“이나 씨가 이렇게까지 고민하는 걸 보면 스스로의 문제 때문이겠죠. 이나 씨는 남의 문제엔 큰 심력을 소모하지 않지만 자신의 문제에 있어선 똑 부러지니 말입니다.”
“…….”
“이나 씨는 이성적인 사람이면서 동시에 다정하기도 합니다. 제가 옆에서 보아 온 바로는 그렇습니다. 저는 이나 씨가 남에게 피해가 가는 일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제 탓이면요?”
이나가 내내 품고 있던 질문을 조금 꺼냈다. 무심한 어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마음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위태로웠다.
그럼에도 시현은 웃으며 말했다.
“이나 씨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괜찮습니다.”
“…….”
“원래 대부분의 일은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니까요. 그게 설령 그 사람과 관계된 일일지라도. 제 경험상으론 보통 죽음이 그랬습니다.”
이나가 컵을 만지작거렸다. 이나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시현은 그래서 그녀가 그 일로 얼마나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말해 주었다.
“그러니 이나 씨 탓이 아닙니다.”
“……하아.”
이나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복잡한 마음을 그 한 번의 한숨으로 내보낸 것인지 고개를 든 이나의 얼굴은 조금 편안해 보였다.
“고마워요. 덕분에 고민이 줄었어요.”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어 기쁩니다.”
시현의 말에 이나가 싱긋 웃었다. 이제야 평소의 그녀로 돌아온 듯했다.
시현은 그 김에 이나에게 슬쩍 물었다.
“이나 씨, 만약 이번 랭킹전 결승에서 저와 백도하가 만난다면, 누굴 응원할 겁니까?”
“벌써 결승에 올라갈 거라고 자신하는 거예요? 저야 뭐 둘 다 응원하죠.”
“한 명만 고른다면요?”
그렇게 묻는 시현의 눈빛은 진지했다. 이나는 잠시 당황하다 중얼거렸다.
“한 명만 고른다면…….”
“…….”
“음. 지고 있는 쪽을 응원할 것 같은데요.”
“……네?”
“이기고 있는데 뭐 하러 응원해요. 지는 쪽이 안타까워서라도 응원하겠죠.”
이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고민에서 벗어나 한층 가벼워진 말투였다.
반면 이번엔 시현이 진지하게 고민을 시작했다.
‘……져 줘야 하나?’
도하가 들었다면 길길이 날뛰었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