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들다 보니 순식간에 헌터 협회 전남 지부가 있는 광주에 도착했다.
도시 경관과 자연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앤드류가 이곳에서 죽었다고 생각하니 이나는 괜히 기분이 묘해졌다.
“어서 오십시오, 본부장님.”
서준이 예정대로 두 헌터를 대동하고 나타나자 헌터 협회 전남 지부장이 긴장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사안도 사안이지만 서준이 직접 온 탓에 지부장이 등판한 것 같았다.
서준은 그와 악수를 나눈 뒤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물건들은요?”
“수용소에서 전달받아 준비해 둔 상태입니다. 바로 보시겠습니까?”
“네. 그렇게 하죠.”
세 사람은 지부장의 안내에 따라 이동했다. 구석진 곳에 있는 응접실로 들어가자 아무도 없는 방에 물건들만 덜렁 놓여 있었다.
이나는 직감적으로 저것들이 앤드류의 인벤토리에 있던 물건들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확인이 끝나는 대로 말씀드릴 테니 잠시 자리를 비워 주셨으면 합니다.”
서준이 지부장에게 말했다. K에 대한 정보를 듣지 못하게 막으려는 듯했다.
지부장은 머뭇거렸으나 도하의 사나운 시선이 꽂히자 결국 방을 나갔다. 작은 응접실엔 이제 그들만 남게 되었다.
문에 붙어 지부장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서준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어때요? 뭐가 좀 있나요?”
“으음……. 중요한 건 없는 것 같은데…….”
도하가 물건들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말했다. 찌푸린 얼굴에서 그가 얻은 정보가 별로 없음을 알 수 있었다.
서준은 이번엔 이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나 씨는요?”
“저도 딱히 눈에 띄는 물건은 없네요.”
이나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 그녀도 미간을 살짝 좁힌 채였다.
인벤토리에 모든 물건을 보관해서 그런가, 잡다한 물건들이 많았다. 손수건이라거나, 음료수가 든 병이라거나, 책이라거나.
혹시나 숨겨진 기능이 있나 싶어 책을 펼쳐 정령들에게 보여 주기도 해 보고 안경을 직접 쓰고 만지작거리기도 했지만 별다른 점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뭐가 없을 수가 있나?’
하나쯤은 뭔가 수상한 물건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이나의 가정이 사실이라는 것을 뜻했다.
“진짜로 K가 앤드류를 죽인 건가.”
이나의 중얼거림에 서준과 도하의 표정도 무거워졌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요.”
“그럼 앤드류의 소지품에서 K에 대한 정보를 발견할 수 없는 것도 말이 되지. 앤드류를 죽인 놈이 가져갔을 테니.”
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것뿐인 것 같았다.
“아, 뭐야. 그럼 시간 낭비만 한 거잖아.”
도하가 소파 등받이에 털썩 몸을 기대며 투덜거렸다. 이나도 왠지 기운이 빠져서 입을 다물었다.
그때 서준이 박수를 두 번 치며 이목을 집중시켰다. 두 사람이 쳐다보자 그는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직 기운 빠지기는 이릅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았으니까요.”
“뭘요?”
“K는 동료 의식이 없다는 것이죠.”
서준이 이나와 도하를 번갈아 보며 말을 덧붙였다.
“반면에 저희는 동료 의식이 아주 투철하고 말이죠. 질 수가 없는 구조입니다.”
“뭐예요, 그게.”
이나는 피식 웃었다. 서준이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 꺼낸 말이라는 걸 눈치챈 것이었다.
그래도 나름 효과는 있었다. 우중충하던 분위기가 조금 활력을 되찾았다.
“왜? 맞는 말이잖아. 우리 팀워크가 좀 좋아?”
“크릉!”
도하가 서준의 말에 동조하며 히죽 웃었다. 아란도 울음소리를 내며 거들었다.
이나는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크응?”
그때 아란이 귀를 쫑긋 세우고 문 쪽을 쳐다보았다. 마침 서준도 무슨 소리를 듣고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밖이 소란스럽군요.”
“시현 씨라도 온 걸까요?”
이나의 말에 서준이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묘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 도착한 모양이네요.”
“그럼 빨리 올 것이지, 뭐 하고 있…….”
도하가 성큼성큼 나가더니 무언가를 보고 입을 헤 벌렸다. 이나도 궁금해서 그를 뒤따라갔다.
“오…….”
이나는 작게 감탄을 흘렸다. 시선 끝에서 시현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손에 종이와 펜을 들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사인해 달라고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며 시현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언뜻 들으니 그들은 시현의 팬 카페 회원들인 모양이었다. 인기 있는 헌터는 간혹 팬 카페가 생기기도 했다.
천조 길드가 있어 비교적 자주 시현을 볼 수 있는 서울과 달리 지방에서는 그를 볼 수 있는 수단이 TV나 언론 매체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가 모처럼 광주로 내려온 이때를 기회 삼아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가 곤란해하는 게 눈에 보여서 이나는 픽 웃었다.
“꼭 아이돌 팬 사인회를 보는 것 같네요.”
“……재수 없어.”
옆에서 도하가 뾰로통하게 중얼거렸다. 이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분명 도하 씨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을 거예요.”
“너는?”
“네?”
“너는 나와 이시현 중에 누가 더 좋은데?”
도하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서준도 흥미로운지 이쪽을 힐끔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반면 이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다.
‘비슷한 질문을 전에도 들은 것 같은데.’
분명 시현에게서였다. 만약 저와 도하가 랭킹전 결승에 올라간다면 둘 중에 누굴 응원할 거냐는.
다만 이번엔 그때와 질문의 내용도 뉘앙스도 달랐다.
그래서 이나는 고민을 해야 했다.
‘여기서 시현 씨를 선택하거나 누구도 선택하지 않으면 분명 삐치겠지?’
어쩌면 삐치는 걸 넘어 시현과 당장 결판을 내겠다고 달려들 수도 있었다. 그건 곤란했다.
‘어떻게 좀 해 봐요.’
이나가 서준을 힐끗 보았다. 대화에 끼어서 대화의 방향을 틀어 달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서준은 그녀를 빤히 보더니 싱긋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 인간이!’
이나가 그를 노려보자 도하가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는 곧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뭐야. 이런 허여멀건 놈은 선택지에 없다고.”
“허여멀겋다니…….”
서준이 상처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가 그러든 말든 도하는 이나를 빤히 보았다. 어서 대답하라는 의미였다.
결국 이나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누가 더 좋냐가 어딨어요. 저는 둘 다 너무 좋은데요.”
한 명을 선택할 수도, 둘 다 선택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러니 둘 다 선택할밖에.
물론 도하의 얼굴은 떨떠름했다. 하지만 이어진 이나의 말에 그의 표정은 서서히 누그러졌다.
“도하 씨는 강해요. 몸도 마음도. 그리고 언제나 주변에 활기를 북돋아 주죠. 가끔은 그 점이 부러울 때도 있어요. 멋지다고 생각해요.”
“갑자기 웬 칭찬.”
도하가 얼굴을 붉혔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럼 이나 씨, 저는요? 저는 어때요?”
서준이 기대 어린 눈을 빛냈다. 이나는 떨떠름해하면서도 대답해 주었다.
“본부장님은 헌터 협회 본부장으로서 항상 맡은 바를 다하려고 하시죠. 그 이름이 주는 무게가 꽤 무거울 텐데도 언제나 여유롭게 행동하시는 모습이 꽤 인상적이에요. 뒤에서 저희를 도와주는 것도 고맙고요.”
“앞으로도 맡겨만 주세요.”
서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자신의 시선을 무시할 땐 언제고 이제 와 이렇게 눈을 마주쳐 오는 걸 보니 이나는 괜히 심통이 났다. 그래도 이나는 그냥 넘어가 주었다.
“그리고 시현 씨는…….”
이나의 시선이 이쪽을 보고 사람들을 물리는 시현에게 닿았다.
자연스럽게 시현의 장점도 얘기하려다가 옆에 없는데 굳이 말해야 하나 싶어 이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각자의 장점이 이렇게 뚜렷하니까요. 그러니 제가 한 명만 고를 수 없는 거죠.”
“그렇다고 해 두지, 뭐.”
다행히 도하는 그냥 넘어갔다. 넘어가 주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그래도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기에 이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까?”
때마침 시현이 다가왔다. 왠지 훈훈한 분위기에 곧바로 질문부터 날아왔지만 도하가 대화의 싹을 잘랐다.
“우리끼리 아주 유익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 인기쟁이는 빠지셔.”
시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이 곧 이나에게 닿았지만 그녀도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시현도 자신의 장점을 말해 달라고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낯부끄러운 일은 아까 그 한 번으로 족했기에 이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냥 천조 길드장님이 인기가 많으시다는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결국 서준이 나서서 대답해 주자 시현이 떨떠름한 얼굴로 넘어갔다. 반은 거짓인 줄도 모르고.
그때 시현의 눈빛이 이나에게 닿았다. 두 사람은 어색한 기류 속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이 일에 참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나는 멈칫했다. 곧바로 잔소리부터 날아올 거라 생각한 탓이었다.
머뭇거리던 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뭇 진지한 표정을 띠며.
“제가 선택한 일이에요.”
“……그렇군요.”
시현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둘이 묘한 분위기를 풍기자 옆에서 도하가 얼굴을 구겼다.
그러다 이곳에 온 목적을 떠올렸는지 시현이 대뜸 물었다.
“그나저나 물건에서 K에 대한 정보를 발견했습니까?”
“아뇨. 아무것도 없었어요.”
“아무것도요?”
“네. 아무래도 앤드류의 동료가 앤드류를 죽이고 물건들을 가져간 것 같아요.”
이나의 말을 들은 시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럼 어떡해야…….”
“본부장님!”
그때 시현의 뒤편에서 헌터 협회 전남 지부장이 나타났다. 뒤에 웬 사람을 데리고서.
서준은 귀찮은 눈치였지만 웃으면서 그들을 맞이해 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그자의 물건에서 뭔가를 발견하셨습니까?”
“아뇨. 아쉽게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역시!”
지부장은 어쩐지 기뻐 보였다. 그 눈치 없는 반응에 이나와 도하가 눈살을 찌푸렸다.
시현과 서준도 떨떠름한 모양이었지만 애써 표정 관리에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반면 들뜬 얼굴로 웃던 지부장은 옆에 서 있는 사람을 소개시켜 주었다.
“제가 그럴 줄 알고 이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누구시죠?”
“안녕하세요. 헌터 협회 전남 지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수일이라고 합니다.”
서준의 물음에 일행의 눈치를 보고 있던 헌터가 인사했다.
서준은 그의 인사를 받아 주면서도 대체 이 사람을 왜 데려온 건지 묻는 눈으로 지부장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지부장이 갑자기 기세가 등등해졌다.
“성수일 헌터는 저희 지부에서도 아주 뛰어난 헌터입니다. 시신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 능력 덕에 다양한 사건 사고를 처리해 왔죠.”
“시신의 기억을 읽을 수 있다고요?”
서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나를 포함한 다른 일행들도 같은 반응이었다.
이나는 저도 모르게 앞으로 튀어 나가 성수일에게 물었다.
“그럼 혹시 앤드류의 기억도 읽을 수 있는 건가요?”
“제가 출장 때문에 자리를 비웠다가 지금 막 확인하고 온 참입니다. 다만 그 앤드류라는 사람이 죽은 지 2주가 넘었습니다. 제 스킬은 오래된 시신일수록 읽을 수 있는 기억이 적어져서 지금으로선 그자의 기억 일부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나가 다른 일행을 돌아보았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나는 성수일을 다시 돌아보며 비장하게 말했다.
“그거라도 말해 주세요.”
“제가 앤드류의 기억 속에서 본 건, 아니, 들은 건 목소리뿐입니다.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잠시 숨을 들이마신 성수일이 마치 연기하듯이 말을 이어 나갔다.
“찾아. 찾아서 내 앞에 데려와.”
모두가 숨죽인 채 성수일의 말을 머릿속에 담았다. 그는 자신이 앤드류의 기억 속에서 들은 것을 띄엄띄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반드시 찾아야 해. 자연의 사랑을 받는 자. 나의……. 음. 이다음 부분은 잘 못 들었습니다. 아무튼 무언가를 간절히 찾는 듯한 목소리였어요.”
성수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현의 얼굴이 굳었다. 서준과 도하도 마찬가지였다.
‘자연의 사랑을 받는 자’까지 들었을 때 그들은 자연스레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런 수식이 어울리는 자가 그들의 옆에 있었으니까.
“…….”
이나도 착잡한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나의 시선 끝에서는 정령들이 의아해하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나야?]
[왜 그래?]
“하아…….”
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정령은 자연 그 자체. 그리고 그들의 사랑을 받는 이나.
아무리 들어도 그녀를 뜻하는 말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