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협회 전남 지부를 방문하고, 이나를 포함한 네 사람은 일단 서울로 돌아왔다. K에 대해 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수일의 말을 통해 한 가지 가정은 세울 수 있었다.
K가 찾는 것이 이나일지도 모른다는 가정.
하지만 자연의 사랑을 받는다는 말만 가지고 무작정 판단할 수도 없었기에 그들은 그 가정을 일단 가정으로만 남겨 두기로 했다. 자연의 속성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들도 조건에 부합하니까.
게다가 이나의 능력은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K가 찾는 것이 이나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아무튼 그날은 별 소득 없이 흩어져야 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네 사람이 다시 모이는 일은 없었다.
랭킹전 예선이 끝나고 16강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랭킹전에 참여하는 시현과 도하는 곧바로 강원도 정선으로 가야 했고, 서준도 헌터 협회 본부장으로서 바삐 움직였다.
그 탓에 이나는 서울에 혼자 덜렁 남게 되었다.
‘나에겐 오히려 잘된 일이지만.’
덕분에 이나는 그동안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K가 찾는 것, K가 모시는 신의 정체, 그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을.
생각을 곱씹을수록 결론은 한 가지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신이란 놈에 대해 알아보자.’
K라는 존재도, 그들이 자연의 사랑을 받는 자를 찾는 이유도 모두 그 신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 신이란 놈의 정체와 목적만 알 수 있다면 일이 좀 더 수월해질 터였다.
‘게다가 그 사악한 마력은 그냥 넘길 수 없어.’
앤드류가 사용했던 사악한 마력은 그 ‘신’이란 존재가 주었을 확률이 높았다. 앤드류 스스로 얻은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사악한 힘을 지닌 신과 그가 이끄는 조직. 그 힘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나는 이 일을 절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문제는 어떻게 알아보냐는 건데.’
“이나 씨, 뭘 그렇게 심각하게 보고 있어요?”
그때 지나가던 팀원이 모니터를 노려보는 이나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정확히는 일하다 딴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이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충 얼버무렸다.
“그냥 홈페이지에 올릴 내용을 체크하고 있었어요. 혹시 오탈자가 있진 않을까 싶어서요.”
“꼼꼼하네요. 요즘 올릴 글이 좀 많죠?”
“네, 뭐.”
랭킹전이 시작되고부터 이나의 일은 바빠졌다. 언제 어떤 경기가 있고 누가 이기고 졌는지까지 모두 홈페이지나 SNS에 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K에 관한 고민이 더해지면서 이나는 몸도 마음도 여러모로 바쁜 상태였다.
“이나 씨, 잠깐만.”
이나가 다시 일에 집중하려 하는데 때마침 팀장이 그녀를 불렀다.
이나는 의아해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향했다. 팀장은 주변을 스윽 살피더니 이나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작게 말했다.
“오늘까지만 나오고 한 일주일 정도 쉬어요.”
“네?”
“본부장님으로부터 부탁받았어요. 최근에 일이 좀 있어서 이나 씨 심경이 많이 복잡할 테니 휴가 좀 주라고.”
이나의 표정이 멍해지며 머릿속에 싱긋 웃는 서준의 얼굴이 그려졌다.
‘하여간에.’
이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아, 그리고 심부름 좀 부탁해요. 이 서류만 전달해 주면 돼요. 주소는 메시지로 보내 줄 테니까 조금 일찍 퇴근해서 가요.”
“네.”
서류가 든 봉투를 들고 자리로 돌아온 이나는 휴가를 위해 다시 바쁘게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퇴근 한 시간 전이 되었을 때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요.”
홍보 팀 직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이나는 협회 1층으로 내려갔다.
팀장이 미리 보내 놓은 심부름 주소가 적힌 문자를 보고 있는데 마침 맞은편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이나가 고개를 들자 낯익은 얼굴이 그녀를 빤히 보고 있었다.
“어?”
상대방은 그녀를 보고 놀란 체를 하더니 대뜸 물었다.
“맞죠?”
“……무명 길드장님?”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맞닥뜨려 이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면 한주원은 여전히 부드러운 인상으로 반가워하는 미소를 띠었다.
“설마 여기서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협회에서 일하세요?”
“네. 아르바이트긴 하지만요. 그나저나 절 기억하시네요?”
“잊을 수 없는 인상이었거든요.”
이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특별히 예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이한 인상도 아닌데 어느 면에서 잊을 수 없었다는 건지 의아했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설명할 마음은 없는지 한주원은 그저 싱글벙글 웃었다. 어째 전보다 살가워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나가 수상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한주원은 개의치 않아 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것도 인연인데 이름을 여쭈어도 될까요?”
“……유이나예요.”
“유이나. 예쁜 이름이네요.”
“그런가요.”
“네. 사랑을 듬뿍 받을 것 같은 이름입니다.”
어쩐지 뒷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보통 이름만 듣고 저런 말을 하나?’
이나의 마음속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찝찝함이 올라왔다.
정령들이 그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가까이하기 불편한 사람이었다.
‘아. 심부름.’
그러다 팀장이 시킨 심부름이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나가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벗어나려 하는데, 이번엔 다른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유이나!”
한주원 너머에 있는 이가 그녀를 향해 팔을 붕붕 흔들고 있었다. 이나는 그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하 씨?”
“청호 길드장과도 아는 사이십니까?”
놀랍다는 듯 한주원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도하에게 물었다.
“아니, 랭킹전 하고 있을 사람이 여긴 어떻게 왔어요?”
“잠깐 짬 내서 왔지.”
도하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이나가 그를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는 사이 상황을 지켜보던 한주원이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제가 빠져 드려야 할 타이밍인 것 같군요.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네.”
“그럼 두 분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이나 씨는……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군요.”
의외의 말에 이나는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한주원은 미소만 남기고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도하가 이나에게 물었다.
“너 한주원이랑 아는 사이야?”
“잘 몰라요. 전에 어쩌다 한 번 마주친 일밖에 없거든요.”
“그래?”
도하가 어쩐지 불편해하는 시선으로 한주원이 있던 곳을 힐끗 보았다. 이나는 의아한 마음에 질문을 던졌다.
“둘이 사이 안 좋아요?”
“응? 아냐, 그런 거.”
“근데 왜 그런 표정이에요?”
“으음. 저 녀석이 싫은 건 아닌데…….”
도하는 웬일로 말하길 머뭇거렸다.
이나가 빤히 바라보자 그제야 그는 입을 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불편해.”
“불편하다고요?”
“응. 처음 만났을 때부터 어쩐지 불편한 녀석이었어. 좀 꺼림칙한 면도 있고.”
“어떤 면이요?”
“그걸 모르겠으니 내가 답답하지. 분명 성격 좋고 괜찮은 녀석인데 왠지 모르게 불편하단 말이지.”
“뭐예요, 그게.”
이나가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보자 도하가 억울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본인도 변명할 말은 없는지 입을 꾹 다문 채였다.
‘야생의 감 같은 건가?’
이나는 한주원이 탄 엘리베이터 쪽을 힐끔 보았다. 도하까지 이러니 그녀의 찝찝함은 커져만 갔다.
“근데 그건 뭐야?”
도하가 이나의 품에 들린 서류 봉투를 보고 물었다. 이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해 주었다.
“심부름이요. 조금 일찍 퇴근해서 가던 참이에요.”
“그래? 마침 잘됐네. 내가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아냐. 데려다줄게. 부탁할 것도 있고.”
“부탁이요?”
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도하는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할 뿐 부탁의 부 자도 꺼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아란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가자. 오랜만에 같이 바람 좀 쐬자고.”
***
도하와 아란 덕분에 이나는 심부름을 빨리 끝낼 수 있었다.
시간이 남게 되자 이나는 그들과 함께 근처 카페로 갔다. 아란 때문에 시선이 쏠리긴 했지만 이젠 익숙해진 터라 이나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도하는 그녀에게 커피까지 사 주었다. 아무래도 예의 그 부탁 때문인 것 같았다.
그에 이나도 마다하지 않고 커피를 얻어 마셨다. 그러다 컵을 탁 내려놓고 도하에게 물었다.
“그래서 부탁이란 게 뭐예요?”
이나가 질문을 던지자 탄산음료를 마시며 딴청을 피우던 도하가 멈칫했다.
“음. 그게 있지.”
도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려운 부탁인가 싶어 이나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말해 봐요.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들어줄게요.”
“진짜?”
“……귀찮지 않은 거라면.”
도하가 눈을 빛내자 이나가 조건을 한 가지 더 추가했다.
도하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이나가 얼른 말해 보라는 듯 쳐다보자 그가 무겁게 입을 뗐다.
“그게, 우리 길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S급 던전이 있단 말이야.”
서두부터 불안했다.
이나는 얼굴이 일그러지려는 것을 꾹 참으며 대답했다.
“네.”
“그 던전이 리셋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하필 랭킹전을 하고 있는 지금 리셋이 완료되었지 뭐야. 근데 그 던전 공략권을 다른 길드에서도 탐내고 있단 말이지.”
“음. 네.”
“일단 우리 길드가 공략권을 가지고 오긴 했는데, S급 던전이면 내가 가야 하는데 너도 알다시피 지금 내가 랭킹전을 진행 중이잖아.”
“그렇죠.”
“그래서 말인데, 네가 대신 가 주면 안 될까?”
“뭐요?”
얌전히 듣고 있던 이나가 눈을 치켜떴다. 도하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얼른 말을 덧붙였다.
“나,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부탁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그냥 공략권을 넘기면 되잖아요. 아니면 다른 길드와 협력하거나.”
“그럼 공략 보상도 나눠야 되잖아.”
“나누든가요.”
“그러지 말고 부탁 좀 하자. 응?”
도하가 애절하게 말했다. 반면 이나는 뚱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아니면 지금 잠깐 서울 온 김에 얼른 공략하고 다시 가든가요.”
“그건 불가능해.”
“왜요?”
“그 던전의 시간은 여기보다 무척이나 느리게 흐르거든. 공략하고 나오면 아마 며칠이 흘러 있을 거야. 그렇게 되면 난 이시현과 싸우지 못한다고!”
“그게 목적이었구만.”
이나가 혀를 쯧 찼다. 그녀가 부탁을 들어줄 기미가 안 보이자 도하는 결국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했다.
“부탁할게!”
그 수단이란 바로, 그녀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것이었다.
자존심 강한 도하가 그런 모습을 보이자 이나는 물론이고 주변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사람들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몇몇은 뭐라 수군거리기도 했다.
“무슨 일이지?”
“백도하 헌터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
도하 입장에서는 시현과 싸우는 것이 간절해서 한 행동이었지만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달리 보였다.
그것을 느낀 이나가 잠시 굳어 있다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알겠으니까 얼른 일어나요.”
“정말?”
도하가 눈을 반짝 빛내며 고개를 들었다. 이나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싸! 고맙다! 정말 고마워!”
도하가 이나가 앉아 있는 곳으로 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제 딴에는 기뻐서 한 행동이었지만 이나는 놀란 눈을 깜빡였다.
‘……까짓거 해 주지, 뭐.’
금방 침착함을 되찾은 이나는 피식 웃었다. 동시에 머리로는 계산에 들어갔다.
‘다른 길드가 탐낼 정도면 엄청난 보상이 나오나 보지? 일단 들어가 보고 내 몫은 내가 챙겨야지.’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이나는 한국인으로서 이 사실을 뼛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이나가 히죽 웃었지만 도하는 그녀를 껴안고 있어 이를 보지 못했다. 오직 정령들만이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 함께 웃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