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이 인제에 있다곤 안 했잖아요.”
이나는 혀를 쯧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단번에 거절하는 거였는데.
하지만 이미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기에 그녀의 몸은 강원도 인제에 와 있었다.
그것도 뜻밖의 인물과 함께.
“나는 왜…….”
아까부터 옆에서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이나의 오빠를 구해 주었던 B급 힐러 천해진이었다.
원래는 이나 혼자 오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 서준에게 도하가 부탁한 일을 들킨 것이었다.
“반드시 힐러와 동행하세요. 그러지 않는다면 청호 길드의 공략권을 취소하겠습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서준은 도하와 이나에게 인정을 베풀어 주었다. 조건부 인정이긴 했지만.
이나의 정체를 모르니 청호 길드의 힐러를 데려갈 순 없었다. 그래서 이나는 자신의 정체를 알면서 능력이 뛰어난 힐러를 데려가기로 했다.
그게 바로 해진이었다.
물론 그도 처음엔 안 오려고 발악을 했지만, 결국 오게 되었다.
“이왕 오게 된 거 기분 풀어요.”
“풀리겠어요? 가족을 미끼로 끌려온 거나 마찬가진데!”
“미끼라니. 요즘은 가족에게 수당을 주는 것도 미끼라고 표현하나요?”
이나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해진이 가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절해 이나가 데리고 갈 힐러가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도하는 그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이나와 함께 던전에 들어가 주면 청호 길드에서 해진과 그의 가족들에게 위험 수당을 주겠다는 제안이었다.
예전의 해진이었다면 그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가족인 그의 삼촌과 사촌 동생이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해진의 삼촌은 딸인 이수아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빚을 졌다. 해진은 그걸 메꾸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해진이 직접 주는 돈은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의 삼촌이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해진이 위험 수당이라는 말에 솔깃한 것이었다.
위험 수당이라면 삼촌이 받지 않을까 하고.
물론 안전하게 던전을 나올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함께 들어가는 사람이 이나였으니까.
라플레인의 던전에서 보았던 그녀의 활약을 기억하고 있는 해진은 게이트 앞에 서면서도 전혀 긴장이 되지 않았다.
대신 한숨만 흘러나왔다.
“내 팔자야…….”
“한숨 그만 쉬고, 슬슬 들어가죠.”
이나가 허공의 정령들을 보며 말했다. 정령들은 준비됐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진은 이를 보지 못했다. 정령들이 투명화한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그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정령의 존재를 아는 사람을 최소화하고 싶은 마음에 이나가 선택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결계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푸른빛으로 빛나는 게이트가 그들을 맞이했다.
옆에서 해진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막상 S급 던전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이나는 픽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린 뒤 먼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파앗-
이나가 들어가자 게이트가 빛나며 그녀의 몸을 던전 안으로 이동시켰다. 잠시 후, 늘 그렇듯 뒤바뀐 풍경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산속인가?”
주변에 들어찬 빽빽한 나무와 경사진 비탈길은 산속의 어느 한 곳 같았다.
산지가 많은 강원도의 던전다웠다.
뒤늦게 던전 안으로 들어온 해진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휘유, 하고 휘파람 소리를 냈다.
“엄청 빽빽한데요? 전투를 치르기는 좀 불편하겠어요.”
“그러게요.”
그의 말에 동조하면서 이나의 눈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혹시나 몬스터가 있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고 미리 주변을 탐색한 리카가 말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 이나야.]
‘좋아.’
긴장을 조금 놓은 이나가 마찬가지로 주변을 둘러보던 해진을 돌아보았다.
“제 옆에서 절대 떨어지지 마요. 알았죠?”
“여부가 있겠습니까.”
해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두 사람은 일단 산을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리카의 바람으로 이동하는 덕에 체력 소모 없이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애초에 둘 다 산을 오를 체력이 없기도 하고.
“그나저나 너무 조용한데요.”
해진이 말을 꺼냈다. S급 던전인 만큼 전투가 빵빵 터질 거라 생각했는지 의외라는 말투였다.
이나도 같은 생각이었기에 주변을 더욱 경계했다.
“이렇게까지 조용할 리가 없는데…….”
“청호 길드장에게서 뭔가 들은 거 없어요? 몬스터에 대한 거라든가 공략 방법에 대한 거라든가.”
“음.”
이나는 도하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뭔가 듣긴 한 것 같은데.
“던전의 이름은 ‘타락한 자들의 거처’야. 왜 그런 이름인지는 몬스터를 보면 알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몬스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야. 이 사실을 잘 새겨 두었다가 나중에 꼭 챙겨 와야 해. 알았지? 그럼 부탁한다!”
전부 쓸데없는 것들이었다.
이나의 얼굴이 묘하게 찌푸려졌다. 이나가 도하에게서 들은 게 없다고 판단했는지 해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발로 뛰면서 정보를 얻어야겠네요.”
“역시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제가 할 말이네요.”
두 사람은 투덜거리며 좀 더 깊숙한 산속으로 들어갔다.
뭔가 특이점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이나야, 저기!]
리카가 날개로 무언가를 가리켰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다른 곳과 똑같이 나무가 빽빽할 뿐이었다.
그런데 리카는 뭔가 있다는 듯이 그쪽으로 이나를 이끌었다.
‘뭐가 있어?’
[으음.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바람의 흐름이 뭔가 이상해.]
‘이상하다고?’
[응. 자연스럽지가 않아.]
오묘한 말이었지만 이나는 진지한 표정을 머금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해진이 의아해하는 얼굴로 이나를 뒤따랐다.
“거기 뭐가 있어요?”
“네. 있는 모양이에요.”
이나는 리카의 말을 믿었다. 그래서 그쪽으로 손을 뻗어 보았다.
쐐액-
그때 무언가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 이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화살이 해진의 등을 노리고 빠르게 날아오고 있었다.
“네움!”
이나는 다급히 해진의 뒤에 작은 흙벽을 세웠다. 화살은 흙벽에 가로막혔다.
그런데 화살 주제에 흙벽에 깊이 박혀 촉이 해진 쪽으로 조금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을 본 해진이 기겁했다.
“죽는 줄 알았네…….”
“안심하지 마요.”
이나는 해진을 자신의 뒤에 숨기고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던져 주었다. 라쿠틀라의 던전에서 얻었던 A급 방패, 호수의 장막이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드는 해진에게 이나가 말했다.
“그걸로 몸을 지켜요.”
“뭐요? 아니, 이나 씨가 지켜 줘야……. 헉! A급 방패?”
뒤에서 해진의 경악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한편 이나는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몬스터들을 보고 눈을 치켜떴다.
“……엘프?”
“크르르…….”
그녀가 엘프라는 단어를 꺼내자 몬스터들이 으르렁거렸다. 엘프에 반응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적을 경계하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나가 혼란스러워하는 눈으로 몬스터들을 바라보기만 하자 뒤에서 해진이 물었다.
“엘프? 그게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여요?”
이나는 답해 주기 곤란했다. 전생의 세계에 있던 종족이라고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들을 엘프라고 칭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미의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들과는 다르게 몬스터들이 괴물 같은 형상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몬스터들의 키는 2m를 훌쩍 넘어섰고, 검은 피부는 마치 녹아내린 것처럼 흉측한 모양을 띠었다. 이빨도 짐승의 것처럼 날카로운 게 다시 보니 귀가 뾰족한 것 말고는 공통점이 전혀 없었다.
처음엔 타락한 엘프라고 불리던 다크 엘프인가 싶었지만, 이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크 엘프도 지능이 있어.’
다크 엘프라고 해서 저렇게 말을 하지 못하고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는 것은 아니었다.
‘엘프라고 느꼈던 건 착각인가?’
혼란에 찬 이나가 머뭇거리고만 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무기를 든 채 서 있던 몬스터가 갑자기 손을 물고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저기……!”
해진의 경악 어린 외침에 이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까지 나무가 빽빽했던 공간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무언가에 가려져 있던 공간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드러난 것은 하나의 작은 마을과 그들을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는 몬스터들이었다.
“마법으로 마을을 숨기고 있던 건가.”
“완전히 포위됐는데, 이제 어쩔 거예요?”
해진이 방패를 꾹 쥐며 물었다. 애써 태연하게 묻는 모습이 이나를 믿고는 있지만 그래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위기 상황이 닥치자 이나는 일단 몬스터에 관한 의문은 저 멀리 치워 버렸다. 그리고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어쩌긴 뭘 어째요. 다 쓸어 버려야지.”
“할 수 있겠어요?”
“살려면 해야죠. 거기 얌전히 있어요. 금방 끝내고 올 테니까.”
“힐러인 나를 혼자 두고 가겠다고요? 아니, 저기요!”
뒤에서 해진의 애절한 외침이 들렸지만 이나는 무시했다. 네움을 두고 왔으니 어련히 알아서 잘 지켜 주겠지.
이나가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몬스터들이 경계 어린 울음소리를 냈다. 그들이 그녀를 향해 무기를 겨누었지만 이나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말이 통하는 상대는 없겠지?”
“크아아!”
몬스터들이 그녀를 향해 무기를 휘둘러 왔다. 마법이 깃든 강력한 공격이었다.
이나는 리카의 도움으로 공격을 가뿐하게 피하며 중얼거렸다.
“그럼 일단 쓸어 버릴까.”
***
“이야. 설마 했는데 정말 다 쓸어 버렸네요.”
해진이 감탄 어린 목소리로 몬스터들이 쓰러져 있는 주변을 훑었다. 이나는 몬스터들이 들고 있던 무기를 챙기며 그의 말을 흘려들었다.
‘확실히 질이 좋네.’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 이나는 직감적으로 도하가 챙겨 달라고 했던 물건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바로 이 무기들이었다. 무기들은 하나같이 질이 좋았다. 강한 몬스터의 경우 높게는 A급 장비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보물 창고가 따로 없네.”
마찬가지로 아이템 정보를 통해 무기의 성능을 확인하던 해진이 혀를 내둘렀다. 이나도 그 말에 동의하며 챙긴 무기들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얼추 챙기고 나자 이나가 해진에게 말했다.
“저 잠깐 마을 좀 둘러보고 올게요.”
“네? 숨어 있던 몬스터가 저를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걱정도 팔자셔.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방어 수단을 두고 갈게요.”
“그게 뭔데요? 이봐요. 이나 씨?”
해진이 뒤에서 그녀를 불렀지만 이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급히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이나는 숨어 있던 마을이 드러났을 때부터 신경 쓰고 있던 마을 중심의 높은 건물로 향했다. 곧바로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자 반짝이는 물건이 대 위에 놓여 있었다.
[이나야, 이게 뭐야?]
“…….”
이나는 말없이 빛나는 돌을 집어 들었다. 대에서 들어 올려진 돌이 빛을 잃었다.
머뭇거리던 이나가 입을 열었다.
“아이템 정보.”
띠링!
⌜수호석(A)
내용: 환상 마법이 깃든 돌. 설정한 범위의 공간을 다른 환경의 모습으로 바꿔 줍니다.
조건: 마력 50 이상⌟
“……하!”
이나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쩐지 허탈해 보이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한 표정에 정령들이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이나야?]
[왜 그래?]
이나는 정령들의 물음에 대답해 줄 여유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은 그녀가 아는 물건이었으니까.
“이게 대체 왜 여기…….”
이나는 웃음기를 지우고 복잡한 얼굴로 손에 들린 돌을 바라보았다.
수호석은 엘프들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
즉, 전생의 세계에 있던 물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