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그럼 그날로 준비 부탁합니다. 수고하세요.”
통화를 끊은 서준은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왔다.
얼마 전 정선에서 있었던 랭킹전 사건을 수습하느라 낮밤 할 것 없이 일한 탓이었다.
거기다 이번에 특별히 준비할 것도 있어서 일이 더욱 불어났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것뿐이야.’
헌터가 아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뒤에서 이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을 보조하는 것밖에 없었다.
가끔 그는 자신은 왜 헌터가 아닐까, 왜 일행과 함께 싸우지 못할까 하는 자괴감도 들었지만 요즘은 생각이 바뀌었다.
이 또한 그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
“부탁드릴게요, 본부장님.”
이나가 그를 찾아와 부탁했던 일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서준은 그때를 회상하다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떼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함부로 들어가시면……!”
그때 밖이 소란스럽다 싶더니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망설임 없이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이는 시현이었다.
그 뒤를 서준의 비서가 안절부절못하며 뒤따랐다.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막으려고 했는데…….”
“아닙니다. 놔두고 일하러 가 보세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비서가 이내 본부장실을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 고요한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서준이었다.
“심각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시죠?”
“……이나 씨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시현의 입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침착하려 애쓰지만 전혀 침착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를 빤히 보던 서준은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이나 씨를 왜 저한테 와서 찾으시죠?”
시현이 서준의 책상을 쾅 내려쳤다. 힘 조절에 실패했는지 손자국이 책상에 그대로 남았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위압감마저 흘러나와 서준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시현은 짓씹듯이 말했다.
“전화는 안 받고, 일을 그만두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나 씨가 일을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본부장님께서 모르실 리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정확했다. 서준은 어제 이나를 만난 참이었다.
더 이상 시치미를 뗄 수 없게 되자 서준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이 기운부터 거두어 주시죠. 저는 일반인이라 감당하기 버겁습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서준의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 말에 시현이 자신의 기운을 거두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서준이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혹시 이나 씨가 혼자서 K를 찾으러 간 건가 싶어 이러는 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나 씨가 그런 무모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닌 거 천조 길드장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시현은 침묵함으로써 서준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침착해진 것은 아니었다.
“이나 씨는 평범한 삶을 살고 싶어 했습니다. 협회에서의 일에 만족하기도 했고요. 이렇게 쉽게 일을 관둘 사람이 아닙니다.”
“저도 그 점은 말려 보고자 했지만, 이나 씨의 계획을 들으니 도저히 그럴 수가 없겠더군요.”
“계획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굳이 숨길 일은 아니었기에 서준은 이나의 계획을 시현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의 말이 이어질수록 시현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 갔다.
“……그게 정말입니까? 이나 씨가 그러겠다고 했다고요?”
“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시현은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서준은 그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생각을 끝마친 시현이 입을 열었다.
“……이나 씨를 만나야겠습니다. 지금 어디 있습니까?”
“오늘 아침에 정선에 간다고 들었습니다.”
“정선이라면 설마…….”
서준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현은 얼굴을 구기며 즉시 본부장실을 나갔다.
쾅!
역시 힘 조절을 하지 못해 덜렁거리는 문을 두고.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본부장실을 보며 서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정선에 있을 이나를 향해 텔레파시를 보냈다.
“이나 씨, 나머지는 맡기겠습니다.”
***
“에취!”
이나가 갑자기 재채기를 하자 정령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나야, 추워?]
“아니. 킁. 환절기라 그런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나는 여전히 바리케이드로 둘러싸인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 랭킹전이 있었던 그곳이었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였지만 내부는 여전히 엉망일 게 눈에 훤했다.
이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경기장 위쪽엔 여전히 검은색 게이트가 남아 있었다.
던전 이름이 마치 에러가 난 것처럼 깨진 채 시스템 창에 드러났던, 바로 그 던전.
멀리서도 불길한 색을 띠는 게이트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다 이나는 당당하게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여긴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경기장 앞을 지키고 있던 헌터가 그녀를 막았다.
이나는 말없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것을 보던 헌터의 얼굴에 잠시 놀라움이 스쳤다.
“실례했습니다.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이나는 그가 다시 돌려주는 것들을 건네받고 당당하게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효과 좋네.”
경기장 복도를 걸으며 이나가 중얼거렸다.
이나가 방금 전의 그 헌터에게 보여 준 것은 그녀의 헌터증과 헌터 협회 날인이 찍힌 서류였다. 대충 협회에서 조사를 위해 보냈다는 내용의 서류였다.
물론 헌터증은 위조품이었고, 이번만 쓰고 폐기할 예정이었다. 모두 서준의 작품이었다.
자신의 사진이 박힌 헌터증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이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도 얼마 남지 않았네.’
이나는 씁쓸한 마음을 애써 삼키고 관객석에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번 이나가 서서 결승 경기를 지켜보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경기장은 몬스터의 소행 탓에 이곳저곳이 부서져 있었다. 그곳들을 협회에서 나온 헌터들이 수습하고 있었다.
이나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경기장 중앙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선 지은이 하늘의 게이트를 올려다보며 심각한 얼굴로 장치를 두드리고 있었다.
이나가 다가갔지만 그녀는 일에 몰두해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볼펜으로 머리를 쿡쿡 찌르는 지은에게 이나가 말을 걸었다.
“양지은 헌터.”
“깜짝이야!”
지은은 화들짝 놀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반응에 괜히 미안해져서 이나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지은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나에게 말했다.
“뭐야. 이나 씨였어요?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요?”
“본부장님 덕분에요. 그나저나.”
이나는 옆에 있는 장치를 힐끗 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엔 제가 와도 울리지 않네요.”
“계속 오작동 하게 둘 수는 없으니까요. 손 좀 썼죠. 근데 여긴 어쩐 일이에요?”
지은이 궁금하다는 듯이 묻자 이나가 쓰게 웃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저거 조사하러 왔어요.”
“아, 게이트…….”
지은이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뭔가 잘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이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저 게이트 연구하러 오신 것 같은데, 뭐가 잘 안 풀리나요?”
“네. 안 풀려요. 대체 게이트 색이 왜 저따구인지도 모르겠고, 임시 던전 주제에 안 사라지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지은은 볼펜 끝으로 자신의 턱을 툭툭 두드리며 불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러다 또 몬스터라도 튀어나오면 안 되는데…….”
임시 던전은 공략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 그런데 저 검은 게이트는 그들을 약 올리듯 건재했다.
하늘의 게이트를 올려다보던 이나가 고개를 내려 지은을 빤히 보았다.
원래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다. 던전의 공간은 어디에 기반된 건지, 어떻게 생긴 건지 등.
하지만 며칠 전 랭킹전에서 보스 몬스터가 튀어나왔을 때, 그 질문들은 의미가 없어졌다.
이나는 입을 다물어 침묵을 유지하다 지은을 불렀다.
“양지은 헌터.”
“무슨 일인진 몰라도 나중에 얘기해요. 지금은 좀 바빠서…….”
“제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서 원인을 찾아볼게요.”
“네에?”
눈을 커다랗게 뜨던 지은이 엄하게 외쳤다.
“그건 안 돼요!”
“의외네요. 바로 가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여태 발생한 적 없던 특이점이 있는 게이트예요. 저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들어간다는 거예요? 아무리 저라도 위험한 곳에 사람 한 명만 들여보내는 취미는 없어요. 적어도 탐사대는 꾸려야……!”
“음. 미안한데요, 허락받으려고 한 말이 아니에요. 통보였어요.”
“뭐라고요?”
지은이 눈을 치켜떴다. 그러다 하늘로 둥실 떠오르는 이나를 보며 입을 헤 벌렸다.
이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웃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아니, 잠깐! 이나 씨!”
지은이 당황하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나는 멈추지 않았다.
하늘 높이 올라간 그녀는 망설임 없이 검은 게이트를 통과했다.
던전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은 일반 게이트랑 똑같았다. 눈을 뜬 그녀는 곧바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들어온 곳은 거대한 공동 안이었다. 혹시나 몬스터가 있을까 싶어 주변에 정령들을 풀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아무것도 없다. 그랬으면 좋겠다.
이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입을 열었다.
“보고 있는 거 다 알아.”
이나의 말에 정령들이 의아해하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들에게 하는 말 같지는 않았기에 정령들은 대답 없이 잠자코 있었다.
아무도 반응이 없자 이나가 다시 한번 매섭게 말했다.
“나와, 칼릭스.”
“……하하.”
허공에서 웃음소리와 함께 검은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그것은 곧 사람의 형태를 만들어 냈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자는 칠흑같이 검고 긴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 눈을 덮을 것처럼 길게 내려온 앞머리 사이로 소름 끼치는 붉은 눈동자가 언뜻 보였다.
그는 길게 찢어진 눈을 이나와 맞추고 해사하게 웃었다.
“나인 줄 어떻게 알았어?”
“나를 알고 저쪽 세계에서 이만한 일을 벌일 놈은 너밖에 없으니까.”
“잘 아네.”
칼릭스가 붉은 눈을 곱게 접으며 웃었다.
“보고 싶었어.”
그는 이나에게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그렇게 눈높이를 맞춘 뒤 그가 이나에게 속삭이듯이 말했다.
“셀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