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이제 셀리나가 아니야. 그건 내가 죽기 전에 저쪽 세계에서 쓰던 이름이니까.”
“셀리나를 셀리나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
칼릭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나는 한숨을 쉬고 싶은 걸 꾹 참고 대답했다.
“난 이제 유이나야. 유가 성이고, 이나가 이름.”
“흠……. 그래도 나한테 넌 셀리나야. 그러니 난 계속 셀리나라고 부를게. 그래도 되지?”
이나는 미간을 팍 찡그렸지만 부정하진 않았다. 이놈이 괜히 또 지구에서 ‘유이나’라는 이름을 퍼뜨리고 다니면 곤란하니까.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건지 칼릭스가 빙긋 웃었다. 이나는 복잡한 눈으로 그를 훑어보다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나저나 저쪽은 대체 몇 년이 지난 거야? 꼬맹이이던 네가 이렇게 크다니.”
“15년. 저쪽은 네가 죽은 지 15년이 됐어.”
“그렇구나. 벌써……. 이곳의 23년이 그쪽에선 15년인가 보네.”
“꼭 그렇지만도 않아. 차원이 뒤틀어지면서 시간의 흐름도 조금 꼬였거든.”
이나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칼릭스는 그저 입꼬리를 올리며 웃을 뿐,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그는 이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물었다.
“날 보니 반갑지?”
“아니. 전혀.”
순식간에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린 이나가 그를 노려보았다.
“네놈이 반가울 리가 없잖아.”
“아직도 그 일 때문에 그래?”
칼릭스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은 나한텐 이제 전생의 일이야. 물론 생각하면 화나긴 하지만…… 내가 짚고 넘어가야 할 건 그게 아니야.”
“그럼?”
“왜, 그리고 어떻게 이쪽 세계에 간섭한 거냐.”
이나는 진지하게 물었지만 칼릭스의 대답은 한없이 가벼웠다.
“그야 너를 찾아야 했으니까.”
“날 왜?”
“난 아직 너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어.”
칼릭스의 붉은색 눈이 잠깐이지만 침잠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다 그는 곧 눈을 날카롭게 치뜨며 말을 이었다.
“너의 죽음을 난 허락할 수 없어.”
“칼릭스.”
“그래서 차원을 건드렸어.”
이나는 눈을 치켜뜨고 그를 응시했다. 칼릭스는 담담하게 그녀가 죽고 나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나는 육신을 빠져나간 너의 영혼이 명계로 향하는 걸 그냥 둘 수 없었어. 그래서 차원을 건드려 너의 영혼을 찾아냈어.”
손끝이 떨려 와 이나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칼릭스는 그것을 보며 이어서 말했다.
“그 과정에서 막혀 있던 이쪽 세계의 벽을 건드리는 바람에 네 영혼이 이쪽으로 넘어왔어. 난 차원을 건드리느라 큰 힘을 소모해서 너의 영혼이 이쪽으로 향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지.”
이나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그럼…… 이쪽 세계에 던전과 몬스터가 나타난 이유가…….”
“맞아. 차원의 벽이 허물어진 탓에 저쪽 세계의 마물들이 넘어온 거야. 던전은 일종의 방 역할을 하지. 저쪽과 이쪽이 연결된 방. 게이트는 방의 문 역할을 해서 그게 열리면 마물이 이쪽 세계로 넘어오는 거야.”
“…….”
“물론 그것도 차원을 넘나드는 일인 만큼 마물의 모습이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지만. 일종의 돌연변이랄까.”
이나의 낯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이나가 전생의 힘과 기억을 가진 채 태어난 이유. 그건 명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환생한 탓이었다.
그리고 칼릭스의 말에 따르면 이나가 태어난 해에 던전이 나타난 것도 모두 그녀의 탓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칼릭스 탓이었다.
이나는 눈을 뜨고 칼릭스를 노려보았다. 그는 그녀를 만난 것이 좋은지 그저 해맑았다.
전생에서도 느꼈지만 저놈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누군가를 죽이겠다며 광기 어린 눈을 빛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연했다.
다시 한번 그것을 느낀 이나가 그에게 물었다.
“최근 한국의 던전 발생률이 높아진 이유도 설마 너 때문이야?”
“맞아. 최근에 너의 기운이 느껴진 곳이 바로 이곳이었거든. 그 전엔 너를 찾아내느라 온 세계를 뒤졌지만 그 기운을 느끼고 나서부턴 이곳만 뒤졌지.”
“던전이 이쪽과 저쪽이 연결된 일종의 방이라고 했지. 그럼 설마 저쪽 세계에도 게이트가 생긴 거야?”
“아니. 저쪽은 평소와 똑같아. 똑같이 마물이 우글우글하지. 지금은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일방통행만 가능할 뿐이야.”
“그럼 저쪽 세계의 사람들이 넘어올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걱정 마. 차원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은 넘지 못하니까. 마물이 특이한 거야. 설령 인간이 넘어온다 쳐도 그 전에 죽어 버릴걸?”
칼릭스는 낄낄 웃었지만 이나는 웃지 못했다.
“너는 넘어왔잖아.”
“아직 나를 인간으로 봐 주는구나.”
칼릭스가 그녀답다고 말하는 눈으로 이나를 바라보다 솔직히 말했다.
“사실 나도 멀쩡한 건 아니야. 이곳이 저쪽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던전이기에 그나마 나타날 수 있었던 거지. 사실 이것도 꽤 힘들어서 지금 무리하고 있어. 오직 너를 만나기 위해.”
“왜 그런 짓들까지 해서 나를…….”
“기억 안 나? 내가 말했잖아. 넌 나의 빛, 나의 신이야. 오직 나만이 가질 수 있는.”
칼릭스가 웃었다. 그의 붉은 눈에 언뜻 광기가 스쳤다.
“어떻게 놓을 수 있겠어, 너를.”
“미친놈…….”
결국 이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전혀 상처받지 않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 말은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제 익숙해. 나도 부정하지 않고. 난 너에게 미쳐 있어.”
“네가 그런 짓을 해 봤자 난 너의 소유가 되지 않을 거야.”
이나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칼릭스는 순간 멈칫했지만 곧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래? 이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그 전에 널 죽일 거야.”
이나의 마음에 동화된 정령들이 당장이라도 능력을 쓸 듯이 기운을 내뿜었다. 이나는 그 속에서 칼릭스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칼릭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만두라는 듯이 말했다.
“지금 네 앞에 서 있는 건 내 가짜 몸이야. 죽여도 소용없어.”
이나는 이를 까득 갈며 힘을 거두었다. 그 순간 칼릭스의 몸이 아래에서부터 검은 연기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무리하고 있다더니 힘이 다한 모양이었다.
칼릭스는 제 몸을 내려다보다가 마지막으로 이나를 보며 말했다.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셀리나. 나와 함께하지 않으면 네 소중한 사람이 다칠 테니까.”
“내 사람은 내가 지켜.”
이나의 마음은 굳건했다. 그런데 칼릭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과연 저쪽 세계에 있는 그 녀석도 지킬 수 있을까?”
“뭐?”
이나가 멈칫했다. 곧 누군가를 떠올린 이나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너 설마 루엔을……!”
“이런. 이만 가 봐야겠네. 만나서 즐거웠어, 셀리나.”
칼릭스의 몸이 완전히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마지막으로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기를.”
이나는 굳은 채 검은 연기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내 연기가 완전히 사라지자 정령들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이나야, 저 사람은 누구야?]
[굉장히 사악한 마력을 지니고 있는 자였네.]
[지금까지 나눈 대화가 다 무슨 뜻이야? 어려워서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그리고 이나를 왜 셀리나라고 부르는 거야?]
쏟아지는 질문 속에서 이나의 몸이 아래로 푹 꺼졌다. 깜짝 놀란 정령들이 다가왔지만 이나는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박박 긁었다.
“진짜 미치겠네.”
***
이나는 던전 안에서 잠시 머리를 식힌 뒤 게이트를 타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여태 계속 존재하고 있던 게이트가 사라졌다.
아무래도 칼릭스가 이나를 만나기 위해 자신의 힘으로 던전을 유지했던 게 맞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던전 이름도 깨진 것처럼 나타난 것이고.
‘진짜 미친놈.’
얼굴을 팍 찌푸린 이나가 경기장으로 내려왔다.
여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지은이 후다닥 그녀에게 달려왔다.
“뭐예요? 어떻게 했길래 게이트가 사라져요? 아니, 그나저나 무사해요?”
“무사한 건 보면 아실 테고. 던전은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
“그러니까 어떻게 한 건데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었기에 이나는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자 지은이 의심스러워하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대답을 듣고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져 이나가 곤란해하고 있는 그때, 모여 있는 사람들 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나 씨!”
이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시현 씨?”
시현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와 이나에게 걸어왔다.
그는 게이트가 있던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뒤 이나를 눈으로 훑고는 물었다.
“설마 게이트 안에 들어갔던 겁니까? 혼자서?”
“네.”
“대체 그곳에 뭐가 있을 줄 알고……!”
시현이 얼굴을 굳히며 잔소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을 가만히 들어 주기엔 이나는 지금 정신적으로 너무 지친 상태였다.
“미안한데, 나중에 들을게요. 지금은 좀 피곤해서…….”
이나가 눈가를 손으로 쓸었다. 그제야 시현이 멈칫하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나는 뭔가 평소와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예전엔 만사 귀찮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처럼 힘들어 보였다.
그리고 위태로워 보였다.
그것을 느낀 시현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밖에 제가 타고 온 차가 있습니다. 집으로 바래다드리겠습니다.”
머뭇거리던 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지은이 이나를 붙잡으려 했으나 시현이 그녀를 쳐다본 탓에 그러지 못했다.
마치 가만히 있으라고 경고하는 것 같아서.
결국 지은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그 자리에 얌전히 서 있었다. 그사이 시현은 이나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