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 밖으로 나가자 시현이 말한 대로 그가 끌고 온 차가 서 있었다.
이나는 그쪽으로 터덜터덜 걸어가 차 문을 열었다. 그런데 시현이 문을 붙잡았다.
“돌아가기 전에 대화를 좀 했으면 합니다.”
이나가 시현을 돌아보았다. 눈빛이 탁한 게 꽤나 피곤해 보였다.
시현은 잠시 망설여졌지만 이 일 또한 짚고 넘어가야 했기에 입을 열었다.
“기자 회견을 할 거라고 들었습니다.”
뭔가 반응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나는 태연했다.
그에 시현은 괜히 초조해져서 말을 이었다.
“사실입니까? 정말로 기자 회견에서 정체를 밝히겠다고요?”
“네. 맞아요. 그러려고 본부장님께 부탁했어요.”
이나에게서 긍정이 돌아오자 시현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왜 갑자기…….”
“K는 저를 노리고 있어요.”
이나가 자신의 말을 끊고 냉정하게 말하자 시현은 멈칫했다.
그녀는 눈가를 쓸어내리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번에 확실히 알았어요. K가 노리는 건 저예요. 저 하나 찾겠다고 이런 일을 벌인 거라고요.”
시현은 차마 아닐 거라고,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할 수 없었다.
얼마 전 마르코스가 중얼거리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군. 저 여자가 바로…….”
마르코스는 이나를 보며 분명 그렇게 말했다. 드디어 찾아냈다는 듯이.
시현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들이 왜 이나 씨를 노리는 겁니까?”
이나는 입을 달싹이다 결국 꾹 다물었다.
그녀가 대답하기 힘들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시현도 더 이상 캐물을 수 없었다. 그는 다만 답답함에 주먹을 꾹 쥐고 말할 뿐이었다.
“정확한 내막은 몰라도, 이나 씨 탓이 아닙니다.”
“네. 제 탓이 아니죠. 하지만 저 때문이라는 걸 안 이상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어요.”
이나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더 이상 큰 피해가 없도록, 또 그놈들이 저만 노리고 올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어요. 그 방법이 세상에 저를 드러내는 거예요. 놈들을 밖으로 끌어내려면 제가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으니까.”
시현은 주먹을 꾹 쥐었다. 침묵하던 그가 쥐어짜 내듯이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나 씨는 평범한 삶을 원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이나가 시현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픽 웃음을 흘렸다.
“시현 씨는 참 따뜻한 사람이에요.”
“갑자기 그런 말은 왜…….”
“이 상황에서도 제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려고 하잖아요.”
“그야…….”
저는 이나 씨를 좋아하니까요.
그 말이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시현은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이나는 그의 마음을 모르면서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표정은 곧 씁쓸하게 변했다.
“시현 씨의 말대로 저는 평범한 삶을 원해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면서까지 제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진 않아요.”
시현은 입술을 달싹이다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이렇게 무력감을 느껴 보긴 처음인 것 같습니다.”
“무력하다뇨. 그렇지 않아요.”
“아뇨. 무력합니다. 소중한 이를 제대로 지키지조차 못하잖습니까.”
이나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 물었다.
“제가…… 소중해요?”
“소중합니다. 이나 씨는…….”
시현이 다시 한번 말끝을 흐렸다.
이 상황에서 고백하는 것이 맞는지는 그도 알 수 없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을 처음 해 보니까.
하지만 이나는 지금 정신적으로 힘든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그라는 짐을 얹어 주기는 싫었다.
그래서 시현은 결국 입을 다물었다.
이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다 대뜸 물었다.
“있잖아요, 한 가지만 부탁해도 돼요?”
“무엇입니까?”
“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서 모두가 저를 세계 유일의 정령사로 바라보아도…….”
이나는 머뭇거리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말을 이었다.
“시현 씨는 저를 유이나로 대해 줄 수 있어요?”
뜻밖의 부탁에 시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질문의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세계 유일의 정령사도, 유이나라는 존재도 모두 이나 씨 아닙니까?”
그의 입장에선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허를 찔렸다는 듯 잠시 멍한 표정을 짓는 이나를 보니 시현은 자신이 잘못 말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나가 중얼거린 건 그때였다.
“그렇죠. 둘 다 저죠.”
“네. 둘 다 이나 씨입니다.”
시현이 재차 강조했다. 그러자 이나가 피식 웃었다.
무언가를 털어 버린 듯 조금 후련해진 얼굴이었다.
“알겠어요. 그럼 이제 슬슬 서울로 돌아갈까요?”
“그러죠.”
이나가 보조석에 타자 시현도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차에 시동을 걸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이나 씨, 아까 게이트에 들어간 건 정말 무모…….”
“아, 그놈의 잔소리 진짜!”
이나는 진절머리를 치며 귀를 막았다.
***
서울로 돌아오니 하늘은 깜깜하게 물들어 있었다.
이나는 시현에게 자신의 집이 아닌 헌터 협회 앞에 차를 세워 달라고 부탁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와 더 있고 싶어 하는 시현을 돌려보내고 이나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몇 번 들리더니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오빠, 뭐 하고 있었어?”
이나가 묻자 이한에게서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돌아왔다. 하지만 미처 숨기지 못한 피곤함이 드러났다.
[뭐 하긴. 일하고 있었지.]
“그럼 지금 협회겠네?”
[그렇지. 왜?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그냥 밥이나 같이 먹을까 하고. 나 지금 협회 1층에 있거든.”
사실 밥을 먹기엔 늦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침부터 바삐 움직이느라 이나는 지금까지 한 끼도 먹지 못했다.
이를 모르는 이한이 그녀에게 물었다.
[아직 밥 안 먹었어?]
“응. 일이 좀 있어서.”
[설마 아르바이트생을 이 시간까지 굴린 거야?]
이한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당장이라도 홍보 팀에 찾아갈 기세에 이나가 황급히 말했다.
“그런 거 아니야. 다른 일이 있었어. 안 그래도 그거에 관해서 할 말도 있고.”
이한이 침묵했다. 아무래도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한 모양이었다.
잠시간의 침묵 후 그가 대답했다.
[알겠어. 금방 내려갈게.]
통화를 끊은 후 이한은 정말로 금방 내려왔다.
이나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이한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데 그녀를 보고 밝게 웃던 이한의 얼굴이 어쩐지 미묘해졌다.
이유는 그가 다가오자마자 묻는 말로 알 수 있었다.
“이나야,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응? 내가?”
“응.”
밝아 보이려고 일부러 웃었는데 아무래도 이한의 눈에는 달리 비친 모양이었다.
역시 가족은 속일 수 없다고 생각하며 이나는 쓰게 웃었다.
그것을 본 이한의 얼굴도 어두워졌지만 이나가 먼저 말을 꺼낸 탓에 무슨 일인지 묻지 못했다.
“내가 식당 예약해 놨어. 가서 이야기하자.”
“……그래.”
이나는 이한을 데리고 식당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이한은 이한대로 묻고 싶은 게 많았고, 이나도 그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다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식당에 도착했다. 룸으로 된 공간으로 들어가서 메뉴를 고르자 주문을 받아 적은 직원이 밖으로 나갔다.
마침내 룸 안에는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
“…….”
하지만 어느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한이 이나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려 주었다.
지금이 적절한 때라고 판단한 이나가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있잖아, 오빠.”
“응.”
이한은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얼굴이 곧 일그러질 걸 생각하니 이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래도 말해야 해. 가족이니까.’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이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곧 협회에서 기자 회견이 있을 거야.”
“기자 회견?”
“응. 거기에 내가 나가기로 했어.”
“이나 네가? 왜?”
이나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게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정령들에게 눈짓해 실체화를 하도록 시켰다.
갑자기 허공에 정령들이 나타나자 이한의 눈이 커졌다. 이나는 그런 그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인사해, 오빠. 얘네들은 내 정령들이야.”
“정……령?”
[오빠, 안녕!]
[만나서 반가워요……!]
정령들이 이한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이한은 그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나는 쓰게 웃으며 그에게 설명해 주었다.
“정체불명의 알에서 태어난 아이들이야. 나는 이 아이들의 계약자고. 나 정령사로 각성했어, 오빠.”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이한이 각성이라는 말에 눈을 부릅떴다.
“설마 기자 회견을 하는 이유가…….”
“맞아. 나와 정령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자리야.”
“절대 안 돼!”
이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이나에게 다가와 그녀의 양어깨를 잡고 소리쳤다.
“이나 너, 헌터가 될 생각이야? 던전에 들어가겠다고?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 줄 알아?”
“…….”
“죽음이 언제고 너를 덮칠 수 있는 직업이야! 그만큼 위험하다고! 부모님도 잃은 마당에 너까지 위험한 곳에 들여보내라고? 난 절대 허락 못 해!”
“난 죽지 않아.”
이나가 이한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진정하라는 의미로 붙잡은 것이지만 이한은 오히려 더 흥분한 듯했다.
이나는 쓰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나도 위험한 곳에 굳이 들어갈 생각은 없어. 그럼에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겠다는 건, 그게 모두를 위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야.”
“그 모두에 나는 속해 있지 않아.”
“아니. 오빠도 포함되어 있어.”
이나가 미소를 지우고 진지한 눈빛으로 이한을 바라보았다.
“나를 노리는 자들이 있어. 그자들은 나 때문에 오빠의 목숨을 가지고 위협할지도 몰라.”
이한이 눈을 치켜떴다.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손도 함께 움찔 떨렸다.
이나는 그의 손을 꼭 잡고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오빠를 지키고 싶어. 그러기 위해선 이 과정이 꼭 필요해.”
“이나야.”
“절대 죽지 않을게. 그러니 나에게 오빠를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줘.”
이한의 눈가가 붉어졌다.
이나에 대한 걱정, 자신의 무력함을 향한 분노, 많은 감정이 올라와 그는 금방이라도 울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하필 너야.”
이나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하지만 이한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미처 그것을 보지 못했다.
잠시 후 마음을 다스린 이한이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전히 눈물을 떨굴 듯한 얼굴이었지만 눈빛만은 선명했다.
“절대 다치지 마. 알았지?”
[걱정 마, 오빠! 이나는 우리가 지켜 줄게!]
[계약자를 다치게 하는 놈이 있으면 이 몸이 벼락을 내릴 것이네!]
대답은 정령들에게서 돌아왔다.
이나는 픽 웃었지만 이한은 아직 정령들에게 낯을 가리는 듯 얼떨떨하게 말했다.
“그…… 잘 부탁할게.”
[응!]
[맡겨 주세요……!]
물론 친화력 좋은 정령들은 이한의 주위를 맴돌며 활짝 웃었다.
때마침 식사가 나오자 이한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에 그와 둘이서 식사하며 이나는 이한에게 정령들을 차례로 소개시켜 주었다.
어느새 정령들과 대화도 나누는 이한을 보며 이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소소하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늘 지금과 같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