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을 하겠다며 병원을 나선 이나는 갑자기 막막함에 휩싸였다.
“무작정 나오긴 했는데.”
이나는 불러낸 이즈의 정령 상태 창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정령 상태 창
이름: 이즈
나이: 4개월
속성: 물
감응도: 53/100⌟
“……이 감응도란 건 대체 어떻게 올리는 거야?”
처음 정령 상태 창을 확인했던 날보다 이즈와의 감응도가 조금 늘어 있었다. 하지만 정말 조금이라서 <일체화> 스킬을 사용하기엔 여전히 부족해 보였다.
지금 이나에겐 <일체화> 스킬이 꼭 필요했다. 그리고 그 스킬을 사용하기 위해선 정령들과의 감응도를 올려야 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올리느냐는 것이었다.
이나는 팔짱을 끼고 시스템 창을 보며 끙끙거렸다. 같은 창을 보고 있던 정령들이 저마다 의견을 내비쳤다.
[감응도는 우리가 얼마나 잘 통하는지 보여 주는 거니까 우리와 시간을 많이많이 보내면 올라가지 않을까?]
[그거 좋은 생각이군! 그런 의미에서 계약자, 우리와 놀이동산이라는 곳에 가 보는 것은 어떤가!]
“기각.”
[엑.]
놀이동산이 꽤나 가고 싶었는지 볼트의 꼬리가 축 늘어졌다.
그래도 처음 의견을 꺼냈던 이즈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단순히 같이 있는 것만으로 올라가진 않을 것 같지만.
[던전.]
그때 한쪽에서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던 네움이 짤막하게 말을 내뱉었다.
이나가 쳐다보았지만 네움은 부끄러워하며 모자를 푹 눌러썼다. 여전히 수줍음 많은 정령이었다.
그래도 오래 함께한 덕에 다른 정령들은 네움이 갑자기 던전을 상기시킨 이유를 알아낸 모양이었다.
옆에서 윈티가 박수를 짝 치며 말했다.
[네움의 말대로 던전에 들어가서 싸우면 감응도가 오르지 않을까요……?]
“일리 있네.”
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이나가 의지를 내비치면 정령들은 이나의 의지에 동화되어 능력을 썼다.
그것은 몬스터를 상대할 때 더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좋든 싫든 그 상황에선 서로 공명할 수밖에 없었다.
결정을 마친 이나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부터 특훈이야.”
[특훈?]
정령들이 고개를 갸웃할 때 이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연락처에서 서준의 이름을 찾은 그녀는 곧바로 그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이나 씨?]
“본부장님, S급 던전 공략권, 전부 저한테 넘겨주세요.”
[네?]
당황한 서준의 의문에 이나는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말했잖아요. 훈련한다고. 그럼 부탁할게요.”
[저기, 이나 씨……!]
서준이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이나는 핸드폰을 껐다.
‘알아서 준비해 주겠지.’
***
결론부터 말하면, 서준에게 부탁한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나는 서준이 준비해 준 서류를 훑어보았다. 장마다 공략했다는 뜻의 체크 표시가 쌓여 갔다.
이것으로 이나가 요 사흘 동안 공략한 던전만 무려 다섯 곳이었다. 개중엔 서준에게 부탁했던 S급 던전도 있었고, 그 아래의 상급 던전도 있었다.
마음 같아선 훈련의 효율을 위해 S급 던전을 모두 독식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시간도 부족했지만 그렇게 공략권을 독점했다간 길드들의 원성을 살 테니까.
‘그래도 다행히 효과가 있어.’
이나는 정령들의 상태 창을 보며 생각했다.
요 사흘 동안 감응도는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그 증거로 얼마 전까지 53이던 이즈의 감응도가 지금은 56이었다.
물론 그것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부족해. 더 올려야 해.’
이나는 꽤 초조했다. 언제 칼릭스나 K가 그들을 덮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일체화> 스킬을 쓸 수 있어야 했다.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짧게 휴식을 마친 이나는 곧바로 다음 던전이 있는 곳으로 가려 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그녀를 붙잡았다.
“잠깐 멈춰!”
S급 던전 근처라 그런지 이 부근엔 아무도 없었다. 부를 만한 이가 이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이나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웬 사람 무리가 우르르 달려와 그녀를 에워쌌다. 그 기세가 꽤 위협적이었지만 이나는 침착하게 그들을 살폈다.
하나같이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왜 자신을 붙잡았는지 몰라 이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나와 달리 그들은 그녀에게 꽤 쌓인 것이 많아 보이는 듯한 얼굴이었다.
도통 영문을 모르겠어서 이나가 입을 열려고 하자 그 전에 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유이나 헌터, 맞지?”
“그런데?”
“그런데에? 말이 짧다?”
“먼저 말을 놓길래 그렇게 하자는 줄.”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치켜져 올라갔다. 그러더니 그는 하, 하고 헛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하여간에 S급들이란. 싸가지 없는 건 다 똑같군.”
대놓고 그녀를 포함한 S급 헌터들을 욕하는 말에 이나는 얼굴을 구겼다.
‘욕할 거면 나만 욕하지, 왜 애꿎은 사람들까지 싸잡아 욕해?’
이쯤 되니 가만히 있기도 뭐했다. 이나는 삐딱하게 선 채 그를 향해 말했다.
“능력 없이 남 욕하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것보단 싸가지 없는 S급이 훨씬 나을 것 같은데?”
“뭐야?”
그를 포함한 무리들이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든 말든 이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래서, 용건이 뭔데? 나를 욕하는 할 일 없는 짓거리를 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이게 아까부터……!”
“길드장님, 진정하세요.”
흥분해서 튀어 나가려는 남자를 그의 부하가 진정시켰다. 그 말을 들은 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길드장? 길드에서 단체로 나온 건가?
이나의 의문이 점점 깊어져만 갈 때 때마침 남자가 안정을 찾았다. 그는 이나를 노려보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성찬 길드의 길드장, 최성찬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내 자랑스러운 길드원들이고.”
뭐지. 자의식 과잉인가.
이나는 몰래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을 최성찬이라고 소개한 그는 자신의 길드가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듯 보였다.
‘그래. 본인이 좋으면 됐지.’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며 이나는 그에게 질문했다.
“그래서, 용건은?”
“유이나 헌터, 네가 최근 상급 던전의 공략권을 독차지하고 있다고 들었다.”
“독차지까진 아닌데.”
실제로 이나는 다른 길드의 원성을 살까 봐 일부러 상급 던전 몇 곳은 남겨 두었다. 서준도 그러는 게 좋을 거라고 했고.
그런데 눈앞의 이는 듣기 싫다는 듯 제 할 말만 이어 갔다.
“네가 방금 공략하고 나온 S급 던전, 그곳은 원래 우리가 공략하러 들어갔어야 했다고!”
이나는 살짝 놀라 눈을 여러 번 깜빡이다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쪽 사람들 중에 S급 헌터가 있어?”
“뭐?”
“S급 던전에는 S급 헌터가 함께 들어가야 하는 게 원칙이야. 그쪽도 잘 알고 있을 텐데?”
S급 헌터가 있는 길드라면 최성찬이 길드 이름을 말했을 때 이나가 알아봤을 터였다. 그런데 그녀는 그의 길드 이름을 난생처음 들어 보았다.
갑작스러운 지적에 당황한 듯 최성찬이 우물쭈물하다 버럭 외쳤다.
“S급은 아니지만, 나한테 S급 스킬이 하나 있다고!”
“겨우 하나?”
“…….”
최성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 모습을 이나는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알 만하네. S급 스킬을 하나 가졌을 뿐 S급은 아닌 헌터가 S급 던전에 들어가도록 헌터 협회가 허락했을 리 없었다.
이놈들은 그냥 화풀이할 곳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자기 최면이라도 걸었겠지.
‘내가 들어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헌터 협회가 자기네들을 반려했다고 생각한 건가.’
이나는 조금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네들이 무리한 요구를 했다고는 생각 안 하는 건가?
이나의 눈빛이 변하자 눈앞의 이들이 주춤했다. 다들 어떡하냐는 눈으로 길드장인 최성찬을 쳐다보았다.
졸지에 막다른 길에 몰린 최성찬은 길드원들의 눈빛을 보고는 몸을 움찔했다. 그러더니 눈을 질끈 감고 이나에게 외쳤다.
“나 A급 헌터 최성찬은!”
그가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냈다. 그리고 그 끝을 이나에게로 향하며 말을 이었다.
“S급 헌터 유이나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엥?”
이나는 황당하다는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의 눈빛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으며 그를 말렸다.
“진정하고, 아무리 그래도 결투라니…….”
“지금 내가 무서워 피하는 건가?”
“무슨 그런 헛소리를…….”
이나가 울컥해서 고개를 들었다.
그걸 노렸다는 듯 최성찬이 씨익 웃었다.
“그럼 내 결투 신청을 피할 이유가 없을 텐데?”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 좀 바빠서.”
그녀에겐 공략해야 할 던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최성찬을 상대할 시간 따위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끼어든 목소리가 이나를 방해했다.
“그럼 심판은 제가 하죠.”
이나는 그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낯익은 인물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무명 길드장님? 왜 여기에…….”
무명 길드장이라는 말에 최성찬이 눈을 부릅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한주원은 빙긋 웃더니 이나를 보며 말했다.
“지나가다 재밌는 소리를 들어서요.”
“아, 네…….”
“한번 싸워 주시죠. 저렇게 간절한데.”
이나는 한주원의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이나는 결국 한주원의 생각을 읽는 걸 포기하고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죠.”
이나가 승낙하자 최성찬의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는 싸우기 적당한 곳이 있다며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사이 이나는 한주원을 흘긋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이나를 보며 싱긋 웃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기대되네요.”
“그런가요.”
“네. 이나 씨가 싸우는 모습이 아주 기대됩니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다시 이나에게서 떨어졌다. 이나는 괜히 찝찝해 귓가를 문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