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2화 (102/149)

“……이게 다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이라고?”

“당연하죠! 요새 뭐 하고 돌아다니시는진 몰라도 그동안 일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고요.”

김 비서가 도하의 앞에 있는 서류들을 하나하나 그의 앞에 들이밀며 설명해 주었다.

“이건 길드 건물 관리비 관련, 이건 최근에 저희 길드에서 파손한 건물 배상 관련, 그리고 이건 용인 S급 던전…….”

“으아아악! 그만해, 그만!”

도하는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며 진절머리를 냈다. 물론 김 비서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별수 없이 퀭해진 얼굴로 서류를 훑으며 도하가 중얼거렸다.

“이시현은 어떻게 이런 일을 매일 하는 거야?”

“그게 지금 길드장이라는 분께서 하실 말씀입니까?”

김 비서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도하를 쳐다보았다. 곧 있으면 진절머리는 김 비서가 낼 것 같았기에 도하는 결국 묵묵히 일을 수행해 나갔다.

똑, 똑.

그때 누군가가 그들이 있는 방에 노크를 했다.

도하가 반색하며 들어오라고 말하자 곧 청호 길드 사무직 직원이 들어왔다.

설마 일이 더 늘어나는 건가 싶어 도하가 불안해할 때 그녀가 반가운 말을 내뱉었다.

“길드장님, 유이나 헌터께서 오셨습니다.”

“유이나가? 들어오라고 해!”

옆에서 김 비서가 째려보았지만 도하는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아, 왜? 요즘 전 세계적으로 떠들썩한 그 유이나 헌터께서 오셨는데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유이나 헌터가 와도 일은 하셔야 합니다.”

“그럼, 그럼. 물론이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도하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이나가 들어오면 온갖 핑계를 대고 나갈 생각이었다.

이러한 도하의 속내는 꿈에도 모른 채 이나가 길드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아란이 꼬리를 흔들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크릉!”

“잘 지냈어?”

이나가 아란의 턱 밑을 긁어 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아란은 기분 좋은 얼굴로 고롱거렸다.

그것이 조금 부럽다고 생각하며 이번엔 도하가 이나를 반겼다.

“왔어? 어쩐 일이야? 네가 여길 다 오고. 역시 내가 보고 싶었나?”

도하의 장난기 어린 물음에 이나가 피식 웃었다. 그가 앉아 있는 책상 쪽으로 걸어가며 장난으로 화답해 주는 것은 덤이었다.

“네. 도하 씨도 보고 싶고, 물어볼 것도 있어서요. 근데…….”

이나는 도하의 옆에 가득 쌓여 있는 서류들을 힐끗 보며 물었다.

“일이 바쁘면 다음에 찾아올까요?”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도하가 앉은 채로 기겁하다시피 펄쩍 뛰며 외쳤다.

“아냐, 아냐! 바쁘긴 무슨! 너 상대할 시간 충분해! 우리 나가서 얘기할까?”

이나는 그 말을 믿지 않고 대신 김 비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는 전보다 더 초췌해진 얼굴로 그녀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제발 길드장님을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

그 시선의 의미를 읽은 이나가 멋쩍게 웃으며 도하에게 말했다.

“아뇨. 여기서 얘기해도 충분해요.”

“그, 그래?”

도하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이나 덕에 놀 시간은 벌어 기분이 좋아졌는지 도하는 냉큼 소파 쪽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아란은 어느새 소파에 앉은 이나의 허벅지 위에 고개를 올린 채 쓰다듬음을 받고 있었다. 그것을 질투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다가 도하가 물었다.

“그래서, 물어볼 게 뭐야?”

“도하 씨, 혹시 이거 알아요?”

이나가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반듯하게 밀봉된 편지 봉투였다.

그것을 본 도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알다마다. 얼마 전에 그에게도 오지 않았던가.

그의 표정을 본 이나가 중얼거렸다.

“아는가 보네요.”

“이게 너한테도 왔어?”

“어제 보니까 우편함에 들어 있더라고요.”

도하가 팔짱을 낀 채 끄응 신음을 흘렸다. 상당히 귀찮아하는 모습에 이나가 말을 이었다.

“무명의 한주원 길드장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이걸 어떤 연회의 초대장이라고 하더라고요.”

“연회……가 맞긴 하지. 정확히는 S급 헌터의 연회야.”

“S급 헌터의 연회요?”

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도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해 주었다.

“오직 S급 헌터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회야. 아, 그렇다고 이상한 건 아니야. 말 그대로 연회거든. S급 헌터끼리 우아한 척 시시콜콜 이야기나 하는.”

“S급 헌터들이 한가한 사람들도 아니고, 그런 데를 참여해요?”

“나처럼 그런 데 흥미 없는 놈들은 안 가지. 그런데 대부분은 가.”

“왜요?”

“S급 장비를 얻을 절호의 기회거든.”

뜻밖의 말에 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확실히 그건 솔깃할 만했다.

하지만 의문점은 남아 있었다.

“무슨 시스템이 여는 연회예요? 참여한다고 S급 장비를 주게.”

“다 주는 거 아니야. 연회에 참여한 사람들 중 딱 한 명에게만 상품으로 주는 거야. 그게 가능한 이유는 주최자가 엄청난 갑부라서 그래.”

“갑부?”

“G&I코퍼레이션, 알지?”

뜬금없이 기업 이름이 나오자 이나가 의아해하는 눈빛을 보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Guild & Item Corporation, 줄여서 G&I코퍼레이션.

던전이 막 생겨났을 당시 창업한 회사로, 지금은 던전 관련 사업을 하는 기업 중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었다.

다양한 길드를 회사 아래 두면서 아이템 사업 쪽으로도 굉장히 큰 기업.

‘설마.’

그곳을 떠올리자 이나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도하는 그게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S급 연회는 거기 대표인 데이비드 레먼이 주최하는 행사야.”

“……이제 보니 엄청 큰 행사였네요.”

“하! 크긴 무슨. 그냥 그 괴짜 영감탱이가 S급들이 아이템 차지하려고 애쓰는 꼴을 보고 싶어서 여는 행사지.”

아무래도 도하는 S급 연회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그 데이비드 레먼이라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 같지만.

이나가 난감하다는 듯 웃으며 초대장을 만지작거리자 도하가 그 모습을 날카롭게 보며 중얼거렸다.

“소식 빠른 영감탱이 같으니. 네가 유명해지니까 바로 초대장 보내오는 것 봐. 유명한 신인 헌터를 구경하고 싶은 거지. 하여간에 마음에 안 들어.”

“하하…….”

“너 설마 갈 건 아니지?”

도하의 물음에 이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답을 기다리던 도하가 눈을 치켜떴다.

“갈 거야? 정말로?”

“하지만 도하 씨, 생각해 봐요.”

이나는 말을 잇기 전 김 비서를 힐끗 보았다.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그가 이나의 눈짓에 잠깐 자리를 비켜 주었다.

마침내 둘만 남게 되자 이나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K가 그 연회에 참여할지도 몰라요.”

도하의 몸이 움찔 떨렸다.

“설마. 그놈들이 그런 개방된 공간에 나타난다고?”

“K의 일원이라고 해서 꼭 몸을 숨기고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요. 어쩌면 유명한 S급 헌터로 위장하면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르죠.”

도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까지는 생각을 해 보지 못한 탓이었다.

이나는 초대장을 빤히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K에 누가 있는지 몰라요. 지나가다 마주쳐도 모른다는 소리죠. 반대로 저쪽은 우리라는 존재를 알 거예요. 제가 기자 회견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으니.”

“그렇……지.”

“어쩌면 연회에서 저를 노리고 접근해 올지도 모를 일이죠. K를 찾을 방법이 없는 우린 그걸 노려야 해요.”

이나의 눈이 비장하게 빛났다.

“놈들이 연회에 참여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저는 참여하고 싶어요.”

도하는 이나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갈 수밖에 없겠네.”

“가기 싫다면 도하 씨는 굳이 가지 않아도…….”

“어떻게 안 가냐. 네가 가겠다는데.”

이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도하도 이나를 마주 본 채로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가서 한번 보자고. 놈들이 정말로 올지 안 올지.”

“그래야죠. 근데 그 전에.”

이나는 도하의 옆으로 가 그를 일으켰다. 도하는 의아해하며 그녀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이나가 도하를 데려간 곳은 그의 책상 앞이었다.

도하가 불안해하는 눈으로 올려다보자 이나가 빙긋 웃었다.

“갈 땐 가더라도 일은 다 끝마치고 가야죠.”

“아니, 이건 좀 나중에 해도…….”

“김 비서님!”

이나는 도하의 말을 무시하고 밖에 있던 김 비서를 불렀다.

그가 들어오자 도하는 사색이 되었지만 이나는 웃는 낯으로 말했다.

“도하 씨가 연회에 가기 전에 일을 다 끝마치지 못하면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못 가게 막아 볼게요.”

“야, 야!”

“그럼 도하 씨, 파이팅이에요.”

이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 제스처를 취한 뒤 유유히 길드장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기 전, 도하의 처절한 절규가 들렸다.

“자, 잠깐! 멈춰 봐! 유이나아악!”

***

연회가 열리는 곳은 모스크바에 있는 거대한 저택이었다. 날짜는 이 주 뒤.

그동안 이나는 착실히 던전을 돌고 명상 시간을 가졌다. 그새 퇴원한 시현에게도 그들의 계획을 알렸다.

시현도 연회에 참가하겠다고 의사를 밝혔다. 졸지에 대한민국 3대 길드장들에 더해 유명 인사 이나까지 한국을 벗어나게 되자 서준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이나는 출발일이 되어서야 서준을 겨우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를 금방 볼 수 있었다.

이나는 그의 차에 멀뚱히 앉아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네, 이나 씨.”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심지어 시현과 도하도 함께였다. 두 사람도 어딜 가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세 사람이 저를 쳐다보자 서준은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세 분이 갈 곳은 연회이지 않습니까.”

“그렇죠.”

“연회에 초대받았으니, 연회 복장을 하고 가야 하지 않겠어요?”

이나는 옆에 앉은 시현과 눈을 마주쳤다. 의아해하는 시선이 맞부딪치자 그녀는 다시 서준에게 물었다.

“설마 옷 사러 가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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