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4화 (104/149)

그들은 이동하는 동안 전세기를 이름 그대로 전세 내 마음껏 즐겼다.

이나는 침대처럼 푹신한 좌석에 널브러져 바텐더가 만들어 준 논알코올 칵테일을 마시며 생각했다.

‘여기에 길들여지면 안 되는데.’

그녀가 원하는 건 평범한 소시민의 삶이었다. S급 헌터가 되어도 그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변하지 않긴 했는데…….

이나는 칵테일을 홀짝 마셨다. 음. 맛있네.

‘돈 많은 소시민의 삶도 괜찮을지도?’

하지만 편안하고 여유로운 시간은 공항에 도착하자 끝이 났다.

이나는 아쉬워하는 얼굴로 일행과 함께 전세기에서 내렸다. 전세기를 보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자 도하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 어차피 돌아갈 때 또 타고 가는데, 뭐.”

그 말에 이나는 잠시 미련을 넣어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드디어 밖으로 나갔는데.

찰칵, 찰칵!

“……뭐야?”

그들을 향해 터지는 플래시 불빛에 이나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기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몰려와 그들을 찍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질문을 던지는 그들을 보며 시현이 곤란하다는 듯 말했다.

“아무래도 연회 소식이 퍼진 모양이군요.”

“하여간에 귀찮은 것들.”

도하도 혀를 쯧 차며 말을 얹었다.

한국에서 출국할 때는 이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리지 않았다. 협회에서 그들의 출국 일정 정보를 철저히 숨겨 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러시아. 게다가 S급 연회가 열리는 곳이었다. S급 헌터들과 데이비드 레먼이 나타날 장소인 만큼 공항에 기자들이 몰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인파를 어떻게 뚫고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얌전히 있던 한주원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저희가 타야 할 차가 보입니다. 바로 이동할까요?”

“하지만 어떻게요?”

이나가 묻자 그가 빙긋 웃었다. 의미심장한 미소에 이나가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이었다.

“어?”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졌다. 그리고 눈을 떠 보니 차 앞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이나가 굳은 상태로 가만히 있자 함께 이동한 도하가 한주원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능력을 쓸 거면 미리 말하란 말이야!”

“죄송합니다.”

한주원이 난감해하는 미소를 지으며 사죄했다. 그제야 이나는 이것이 그의 능력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둠을 다룬다고만 언뜻 들었는데, 이런 식이었구나.’

지금 그들은 발밑의 그림자, 즉 어둠이 드리운 곳을 통해 차 앞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그림자 검사, 한주원. 어둠 마법과 검을 동시에 다루는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었다.

무명(無明)의 길드장인 그에게 더없이 잘 어울리는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이크! 들켰다. 어서 타!”

도하가 이쪽을 발견한 기자들을 보고 얼른 모두에게 차에 타라고 손짓했다. 일행이 빠르게 차에 올라타자 운전기사가 곧바로 출발했다.

한숨 돌리고 나자 차 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동하는 동안 이나와 정령들은 한국과 다른 고전적이고도 아름다운 건물들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나야, 저기 봐!]

“보고 있어.”

[꼭 공주님이 나올 것 같은 성처럼 생겼다. 그치?]

“그러게.”

이나도 드물게 눈을 빛내며 바깥을 구경했다.

조수석에 앉은 시현도, 이나의 옆자리에 앉은 도하도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나의 반대편 끝자리에 앉아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한주원이 옆에 있는 도하에게 속삭였다.

“참 귀엽네요. 그렇죠?”

“……뭐, 조금.”

도하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작게 대답했다. 귓불이 붉어진 모습에 한주원이 쿡쿡 웃음을 흘렸다.

[이나야, 저기!]

그때 이즈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이나를 불렀다.

이나는 앙증맞은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을 쳐다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이곳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웅장한 느낌의 저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창문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설치되어 있는 벽이 햇빛을 정면으로 받아 희게 빛났다. 그 와중에 지붕은 마치 옥을 깎아 이어 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한번 들어가 보고 싶네.’

이나는 돌아가는 길에 관광 삼아 저곳에 잠시 들르자 할까 고민했다.

그런데 그녀의 바람은 의외로 금방 이루어졌다.

“……진짜 여기라고요?”

이나가 S급 연회가 열리는 건물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그녀의 입이 헤 벌어졌다.

차를 타고 오면서 보았던 그 옥빛 지붕의 건물이 바로 S급 연회가 열리는 건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갑부라더니 진짜 엄청나구나.’

이나는 감탄하면서 옆을 힐끗 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같은 반응일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다들 덤덤한 얼굴이었다.

심지어 도하조차도 벌써부터 따분해하는 얼굴로 귀를 후비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뭐야. 나만 놀란 거야?’

왠지 부끄러워져 이나는 얼굴에 열이 몰렸다.

그때 저택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희끗한 회색 머리를 지닌 노년의 남자는 얼굴 가득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낯설지 않은 느낌에 이나는 곧바로 그가 누구인지 떠올렸다.

G&I코퍼레이션의 대표이자 이번 연회의 주최자인 데이비드 레먼이었다.

그는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오더니 이나 일행을 향해 팔을 벌렸다.

“한국의 S급 헌터분들이시군요.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시현이 가장 먼저 나서서 인사를 건넸다.

그는 외국인인 데이비드에게 편하게 한국말을 했다. 양쪽 다 통역 아이템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현과 악수를 나눈 데이비드가 다른 이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미소 짓는 한주원과 뚱한 얼굴의 도하를 넘어 드디어 이나의 차례가 되었다.

“오오. 이분이 바로 한국에서 새로 각성하셨다는 S급 헌터시군요!”

“유이나라고 합니다.”

이나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반짝이는 눈으로 이나를 보던 데이비드의 시선이 이내 그녀 주변의 정령들에게 향했다.

“이 신비한 존재들이 바로 그 정령이라는 분들인가요?”

“맞아요.”

[안녕!]

정령들이 경쾌하게 인사를 하자 데이비드가 껄껄 웃었다.

“유이나 씨도, 정령분들도 모두 환영합니다. 이럴 게 아니라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죠.”

데이비드가 저택 안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그를 뒤따르며 이나가 도하에게 속삭였다.

“생각보다 살가운 분이네요.”

“어. S급 헌터한테는 그래.”

“S급 헌터한테는, 이라뇨?”

“저 노인네, S급 헌터한테 이상한 동경심을 갖고 있거든. 우리한테 나쁜 일은 아니지만, 나는 저 인간 마음에 안 들어.”

“왜요?”

“변태 같은 취향을 지녔거든.”

도하가 작게 건네는 말에 이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방금 듣지 말아야 할 걸 들은 것 같은데.

이나가 해명을 원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도하가 픽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보면 알아.”

‘뭔진 몰라도 왠지 보고 싶지 않은데요.’

이나는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마침 데이비드가 걸음을 멈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나 일행에게 각자 방을 지정해 준 뒤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연회는 저녁 일곱 시에 시작됩니다. 그럼 모두들 저녁에 뵙겠습니다.”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아래층으로 사라졌다. 연회 준비로 바빠 보이는 뒷모습이었다.

이나는 그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 그동안 각자 쉬죠.”

“넌 뭐 할 건데?”

“전 그냥 방에서 쉬려고요. 그럼 다들 조금 있다 봐요.”

이나는 일행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무척이나 넓었다. 정령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녀의 집보다 조금 더 넓은 듯했다.

정령들이 방 안을 누비며 반짝이는 눈으로 이나를 쳐다보았다.

[이나야, 여기……!]

“알아, 우리 집보다 넓은 거.”

이나가 뚱하게 대답하며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자신의 집보다 큰 건 인정하지만 역시 기분은 나빴다.

정령들이 꺅꺅거리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멍하니 누워 있던 이나는 문득 시간을 확인해 보았다.

‘어디 보자. 대충 두 시간 정도 남았네.’

이 정도면 연회복으로 갈아입는 시간을 제외하고도 잠깐 나갔다 와도 될 정도였다.

이나가 혼자 나갈지 일행에게 같이 가자고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문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 ……가 여기……?”

“……니까!”

이나는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정령들도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나야. 밖에 누가 있어.]

“알아.”

이나는 무시할까 하다가 결국 그쪽으로 걸어가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웬 아이들이 문밖에 서 있다 깜짝 놀라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린애들?’

이런 곳에 어린애들이 있는 게 의아했지만 꼭 이상한 것만은 아니었다.

S급 헌터들이 데려왔을 리는 없었다. 초대장에 따르면 이 연회는 오직 S급 헌터들만 참여할 수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것은.

‘레먼 씨의 손주들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이나는 두 아이를 빤히 보았다.

아이들은 남매처럼 보였다. 서로를 닮은 얼굴이 이나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였다.

다만 누가 손위고 누가 손아래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쌍둥이인가 보네.’

이나는 말없이 쌍둥이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쌍둥이의 시선은 그녀에게 닿아 있지 않았다. 정령들을 보는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귀여워.’

아이들은 얼굴처럼 서로 똑 닮은 색의 금발을 지니고 있고, 옷도 세트로 흰색 티와 회색 하의에 같은 색의 회색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무척이나 귀여운 그 모습에 이나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아이들의 키에 맞춰 쭈그리고 앉아 물었다.

“얘네들이 신기해?”

“응!”

“신기해!”

분명 타지의 아이들임에도 말이 통했다. 이 아이들도 데이비드처럼 통역 아이템을 착용한 모양이었다.

과연 데이비드의 손주들이라 생각하며 이나는 정령들을 쌍둥이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정령들이 능력을 쓰자 쌍둥이는 박수를 칠 정도로 좋아했다.

이나도 정령들도 괜히 뿌듯해하고 있는데, 마침 옆방의 문이 열렸다.

“이나 씨? 밖에서 뭐 하…….”

“꺄악!”

시현이 나타나자 아이들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무서워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어쩐지 즐겁게 들렸으니까.

순식간에 사라지는 아이들을 보며 시현이 중얼거렸다.

“왜 여기에 아이들이…….”

“레먼 씨의 손주들인 모양이에요.”

이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소란을 듣고 나왔는지 도하도 두 사람에게 다가와 물었다.

“둘이 여기서 뭐 해?”

“그냥요. 근데 도하 씨, 무기는 왜 꺼내 들고 있어요?”

이나가 도하의 손에 들린 언월도를 보고 물었다. 도하는 별거 아니라는 듯 그것을 빙글 돌리며 말했다.

“아, 이거? 준비 운동 하던 중이었거든.”

“무슨 준비요?”

도하가 살벌하게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대답했다.

“곧 다가올 싸움에 대비하기 위한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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