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현은 눈앞의 광경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쌍둥이를 마주했던 것은 기억이 났다. 그리고 이곳이 이나의 정신세계라는 것도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알고는 있는데.
다그닥, 다그닥-
갑자기 마차가 달려오자 시현은 얼른 몸을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 그를 지나치는 마차의 뒤꽁무니와 주변 광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뭐지, 여긴?”
지구로 따지면 중세 유럽과 비슷한 광경, 하지만 확연히 다른 세계의 모습이었다.
쌍둥이는 분명 이나가 외면하고 있던 것을 그에게도 보여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의 정신세계라도 보여 주는 건가 싶었는데.
‘다른 환상을 보여 주고 있는 건가?’
시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몰라서 인벤토리를 열어 보려 했으나 정신세계에 갇힌 탓인지 열리지 않았다.
‘곤란하군.’
이렇게 되면 자력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시현이 길가에 서서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누군가가 그를 지나쳤다. 시현은 무심코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새하얀 은발이 햇빛에 반짝여 아름다운 결을 자아냈다. 더불어 스치듯 본 남색 눈동자는 밤하늘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잠깐 보았을 뿐인데 어쩐지 시선을 뗄 수 없는 신비로운 분위기의 여인이었다.
시현이 멍한 얼굴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주변 사람들이 그녀를 가리키며 수군거렸다.
“셀리나 님이다!”
“여긴 어쩐 일이시지?”
‘셀리나?’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시현은 그 이름을 어디서 들어 봤나 기억을 회상하다가 얼굴을 굳혔다.
‘랭킹전 때.’
그때 보스 몬스터가 분명 셀리나라는 이름을 부르짖었다.
시현은 망설이다가 그녀를 뒤따라갔다. 이곳을 빠져나갈 열쇠가 그녀에게 있다는 직감이 든 탓이었다.
“저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시현은 그녀를 부르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몸을 돌린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시현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이나 씨?”
“네?”
“아, 아니.”
시현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얼굴도, 키도, 입은 옷도 모든 게 달랐다. 그런데 어쩐지 그녀가 이나와 같은 눈빛을 지녔다는 생각에 시현은 저도 모르게 이나의 이름을 내뱉고 말았다.
시현이 머뭇거리는 사이 셀리나가 그에게 물었다.
“누구신지…….”
“아, 그게…….”
무작정 붙잡았을 뿐 시현은 뭘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혹시 한국이라는 곳을 아십니까, 라고 묻기엔 ‘도를 아십니까’처럼 경멸 어린 시선을 받을 것 같았다.
결국 그는 붙잡은 그녀의 팔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사람을 착각했습니다.”
“그러시군요. 그럼 이만.”
셀리나는 고개를 까딱인 뒤 제 갈 길을 갔다. 시현은 망설이다가 몰래 그녀의 뒤를 쫓았다.
무작정 이곳을 돌아다닐 바엔 미심쩍은 그녀를 쫓아다니는 게 더 이득일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녀가 향한 곳은 빈민가처럼 보이는 작고 오래된 집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셀리나는 그중 한 집을 골라 들어갔다. 시현은 밖에서 창문을 통해 몰래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 노인과 그의 손자처럼 보이는 아이가 바닥에 넙죽 엎드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셀리나 님! 어찌 이런 누추한 곳에……!”
“일어나세요. 이런 대접을 받으려고 찾아온 게 아니에요.”
셀리나도 당황한 얼굴로 노인과 아이를 일으켰다. 그러자 노인이 황송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숙였다.
셀리나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집 한편에 있는 커다란 물 양동이에 물을 채워 넣었다. 마치 마법 같았다.
‘아냐. 저건…….’
시현은 눈을 치켜떴다. 그간 이나의 능력을 보아 온 그는 저것이 마법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저건 정령의 능력이었다.
마침 셀리나가 그들에게 말했다.
“곧 마을의 우물도 고쳐질 거예요. 정령들이 해결해 줬거든요.”
“그런……! 저, 정말 감사합니다, 셀리나 님.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에요. 그런 말 마세요.”
셀리나는 살포시 미소를 짓고는 노인의 뒤에 딱 붙어 있는 아이에게 빵을 주고 그들의 집을 나왔다.
시현은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느껴지는 열기에 건물에서 몸을 뗐다.
“이런…….”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건물이 불타고 있었다. 방금까지 노인과 손자가 있던 그 공간이.
어떻게 된 건지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집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빈민가 사람들과 달리 멋들어진 갑주를 착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에는 횃불이 들려 있었다.
“감히 셀리나 님을 귀찮게 만들다니. 이 더러운 벌레 같은 것들!”
그들은 손에 든 횃불을 이용해 건물들에 불을 질렀다. 순식간에 보금자리를 잃게 된 사람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오는 끔찍한 광경에 시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만!”
그때 셀리나가 갑주를 착용한 이들에게 달려왔다. 그녀의 망연자실한 눈빛이 불타는 빈민가에 닿았다.
그리고 풍경이 바뀌었다.
시현은 이번엔 화려한 건물 복도에 서 있었다. S급 연회가 열린 저택의 복도보다도 훨씬 넓고 웅장한 곳이었다.
시현은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러다 말소리가 들려 급히 모퉁이에 몸을 숨겼다.
고개를 빼꼼 내밀자 셀리나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서 있는 검은 머리의 꼬마도.
“헛소리하지 마, 칼릭스.”
셀리나가 그 말과 함께 몸을 돌렸다. 그녀가 다가오자 시현은 급히 내민 고개를 거두었다.
그때 광기에 찬 어린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후회하게 될 거야, 셀리나!”
“후회?”
“넌 내 소유가 될 수밖에 없을 거야. 넌 나의 신이고, 나를 위해 내려온 빛이니까!”
시현은 이런 미친 소리를 하는 놈이 누구인가 하는 생각에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다행히 셀리나는 그가 있는 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시현은 아이의 외양을 살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 그리고 광기에 찬 눈동자.
시현이 아이를 자세히 보려고 하는 순간 또다시 풍경이 바뀌었다.
그것도 상당히 끔찍한 광경으로.
“흡……!”
시현은 저도 모르게 입을 막고 주춤했다.
주변에 사람들이 죽어 있었다. 쏟아지는 비가 사람들의 피를 주변으로 더욱 퍼지게 만들었다.
단순히 환상이라기엔 너무 잔인할 정도로 생생한 광경이었다.
마치…… 누군가의 기억처럼.
눈앞의 광경에서 시선을 돌리던 시현은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의 앞에, 누군가를 품에 안고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는 셀리나가 있었다.
시현은 머뭇거리다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아요.”
그렇게 답하며 셀리나는 팔에 힘을 주었다. 품에 있는 이를 더욱더 세게 껴안은 그녀가 오열하듯이 말했다.
“하나도 안 괜찮아. 전부 나 때문인데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겠어.”
그녀의 말은 시현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향하고 있었다.
시현은 지금의 이 광경을 눈에 담으려는 듯 다시 정면을 응시하는 셀리나에게 다가가 손으로 그녀의 눈을 가렸다.
“보지 마십시오.”
“봐야 해요. 이건 전부 나 때문에 생긴…….”
“셀리나 탓이 아닙니다.”
시현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리고 이나 씨의 탓도 아닙니다.”
셀리나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시현을 바라보았다.
사실 처음에는 확연히 다른 외양 탓에 몰랐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셀리나의 표정과 버릇, 그리고 말투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이나라는 것을.
시현은 이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특히 그녀의 눈가에서 흐르는 눈물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나 때문이 아니에요? 나만 아니었어도 이 사람들은 이렇게 죽지 않았을 텐데!”
이나가 바닥의 죽은 사람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곳은 이나의 정신세계. 그녀의 무의식까지도 보여 주는 공간이었다.
그 말은 즉, 이나가 지금 하는 말은 모두 그녀가 평소 품고 있던 생각들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시현은 더욱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나 씨 탓이 아닙니다. 정확히는 이나 씨 탓이 아닐 거라고 믿습니다. 이나 씨처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이런 일을 벌일 리 없잖습니까.”
“아뇨. 나 때문이에요. 전 더 이상 이런 광경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이나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칼릭스는 저를 원해요. 칼릭스에게 저를 넘겨주면 이런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시현 씨도, 서준 씨도, 도하 씨도, 모두 무사할 거예요.”
“이나 씨가 없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모두가 무사한 것만으로도 나는…….”
“그걸 우리가, 유이한 씨가 바랄 것 같습니까?”
이나의 몸이 흠칫 떨렸다. 동시에 그녀의 정신세계에 금이 생겼다.
시현은 그 작은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절대 그런 거 바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 죽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든 살아서 이나 씨 앞에 당당하게 나타날 겁니다.”
쩌적-
하늘에 눈에 띌 정도의 금이 생겼다. 하지만 시현은 오직 이나만을 응시했다.
저를 올려다보는 이나를 향해 시현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이나 씨도 사실은 그걸 원하지 않잖습니까. 자신의 삶을 살길 바라잖습니까.”
“…….”
“원하는 삶을 사십시오. 제가 옆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챙-
하늘이 깨졌다. 그리고 그 틈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그들의 주변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이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시현 씨가 왜요……?”
빛이 그들을 집어삼키기 전, 이나가 그에게 물었다.
“그야 저는.”
시현은 대답을 망설이다 빛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이나 씨를…….”
파앗-
뒤늦게 뒷말을 내뱉었지만 빛이 조금 더 빨랐다. 시현은 저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이나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