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109/149)

“야, 이시현! 정신 들어?”

시현이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것은 도하의 얼굴이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이 붙어 있는 도하의 모습에 시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깨어나면 가장 먼저 이나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뭐야. 왜 그런 썩은 얼굴이야?”

“……무사하니 좀 떨어져라.”

결국 시현이 손으로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도하는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밀려났다.

골이 띵한 기분에 시현은 한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아무래도 정신계 마법의 부작용인 듯했다.

잠시 그러고 있던 시현은 곧바로 도하에게 물었다.

“이나 씨는?”

“저어기.”

도하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엔 쌍둥이가 손목에 구속 아이템을 찬 채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시현보다 먼저 깨어난 이나가 쌍둥이 앞에 선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현은 그쪽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이나 씨.”

“아.”

이나가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기 전 시현은 내심 긴장했다.

이나가 또 울고 있을까 봐.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그녀는 평소와 같은 눈빛으로 시현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일어났어요?”

“……네.”

시현은 내심 안도하다가 그녀와 쌍둥이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뭐 하고 계셨습니까?”

“그냥 훈계요.”

“훈계?”

고개를 갸웃한 시현이 쌍둥이를 힐끗 쳐다보았다. 어쩐지 아까보다 기운도 없고 뚱한 얼굴들이었다.

이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쌍둥이 중 누나인 니나의 머리를 꾹 눌렀다.

“요 녀석들, 제대로 사과 안 해? 남의 안 좋은 기억을 들추었으면 사과를 해야지.”

“이, 이나 씨, 아무리 어린아이들이라지만 K의 멤버인데 조심하는 것이…….”

“괜찮아요. 도하 씨가 스킬 못 쓰게 구속 아이템을 채워 놨어요.”

이나는 태평하게 말하며 니나의 머리를 헤집듯이 쓰다듬었다. 그러자 니나의 옆에 앉아 있던 유리가 빼액 외쳤다.

“니나에게 손대지 마!”

“그럼 대신 네 머리를 쓰다듬어 줄까?”

“으악!”

이나가 이번엔 그의 머리를 헤집자 유리가 괴성을 질렀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니나가 이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뭘?”

“우리를 죽일 거야?”

덤덤한 그 물음에 유리가 멈칫했다.

이나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너희를 왜 죽여?”

“뭐? 그야 우린…….”

니나가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나열했다.

“우린 K이고, 언니를 우리의 보스께 데려가려 했고, 또…….”

“또?”

“또…… 언니네들은 바타르도 죽였잖아!”

마지막 말에선 두려움이 느껴졌다.

이나는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니나를 내려다보다가 무심하게 물었다.

“그래서, 너희도 죽고 싶어?”

“그럴 리가 없잖아!”

“응. 나도 너희를 죽일 생각 없어.”

쌍둥이가 커다란 눈을 더욱 커다랗게 뜨고 이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쌍둥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너흰 어려. 멋모르고 잘못된 일을 할 수도 있는 나이야. 그런 너희를 K라는 이유로 죽일 리가 없잖아.”

“…….”

“그리고 어린애들의 큰 장점이 뭔지 알아?”

“……뭔데?”

유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나는 이번엔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대답해 주었다.

“충분히 반성하고 속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거지.”

“……!”

“난 너희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후회란 거, 꽤 뼈아프거든.”

이나의 얼굴에서 숨길 수 없는 짙은 후회감이 느껴졌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시현은 주먹을 꾹 쥐었다.

쌍둥이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나는 제 할 말은 다 끝났다는 얼굴로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너희를 한국 헌터 협회로 데려가 보호 시설에 맡길 생각이야. 그곳에서라면 너희도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겠지.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거기까지. 선택은 너희 몫이야. 어떻게 할래?”

“…….”

쌍둥이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니나가 입을 열었다.

***

“……괜찮을까요?”

“뭐가요?”

이나가 시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두 사람은 데이비드에게 자리를 비운 거짓 사정을 설명하고 방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도하는 쌍둥이 보호 및 감시를 위해 방에 그들과 함께 있었다.

이나와 둘만 남게 되자 시현은 불안한 마음을 그대로 내비쳤다.

“쌍둥이 말입니다. 이대로 두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죠. 그 두 아이들에게 다른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요. 설령 그럴 마음이 없다 해도 죽일 순 없잖아요. 그래서 감시하는 거고.”

“그렇긴 하지만…….”

“괜찮을 거예요. 아까 보니까 그렇게 나쁜 아이들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이나가 시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빙긋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깨어났을 때, 이나는 쌍둥이에게 훈계를 하던 중이었다고 말했다. 아마 그는 듣지 못한 대화에서 이나는 무언가를 느낀 모양이었다.

그녀의 확신 어린 말이 그의 불안을 싹 날려 주었다. 다만 그에겐 아직 풀지 못한 난제가 남아 있었다.

망설이던 시현은 자신의 방으로 가는 이나를 불러 세웠다.

“저어…… 이나 씨.”

“네?”

“이나 씨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나는 진지한 얼굴의 시현을 가만히 응시하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쩐지 씁쓸한 기운이 감도는 웃음소리였다.

“그러네요. 시현 씨는 제 기억을 봤죠.”

“기억……?”

“네. 그건 모두 제 기억이에요.”

시현의 눈이 점차 커졌다.

이나는 자신의 방 문을 열고 시현에게 손짓했다.

“잠깐 들어올래요? 할 얘기가 많을 거예요.”

시현은 머뭇거리다 그녀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나는 문을 닫고 침대 모퉁이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시현에게도 옆에 앉으라고 권했지만 그는 기어코 의자를 끌어와 그 위에 앉았다.

정령들도 들어야 할 이야기였기에 이나는 모두를 불러 모았다. 정령들이 이나의 주위에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대화할 분위기가 조성되자 이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일단 시현 씨가 본 건 제 전생의 기억들이에요.”

“전생……이요?”

예상치 못한 말에 시현의 눈이 커졌다. 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저를 올려다보는 정령들과 눈을 마주했다.

“저는 전생에 다른 세계에 있었어요. 그곳에도 정령이 있었는데, 그때는 이 녀석들과 다른 정령들과 활동했었죠.”

[우리 말고도 다른 정령이 있었어?]

“어. 여기보다 훨씬 많고 다양했지.”

정령들은 마치 동화책을 읽는 어린아이 같은 눈을 하며 이나의 말을 경청했다.

과거의 정령들을 떠올린 이나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녀는 어깨에 앉은 파인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환생한 지금도 정령사의 능력을 쓸 수 있는 이유는 아마 그것 때문일 가능성이 가장 클 거예요.”

“그렇군요.”

“네. 아, 그리고 저 거기서 나름 뛰어난 정령사였어요. 너무 뛰어나서 문제였지만요.”

이나가 씁쓸하게 웃었다.

“사람들은 저를 거의 신격화했어요. 생각해 보면 그럴 만도 했죠. 가뭄인 지역엔 비를 내리고, 추운 지방엔 불을 피우고……. 뭐야. 나 진짜 뛰어났잖아?”

이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시현은 그녀의 기억을 엿보았고, 기억했다.

단지 그녀가 도왔다는 이유로 불타던 빈민가를.

그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이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시현 씨가 본 대로, 그게 마냥 좋은 건 아니었어요. 뛰어난 능력으로 인해 오히려 저는 혼자가 되었죠.”

“…….”

“제 전생은 그게 다예요. 뛰어난 능력을 지녀 혼자 살다 혼자 죽은, 그런 보잘것없는 인생.”

이나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듯한 눈빛이 시현의 마음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저도 모르게 말하고 말았다.

“보잘것없지 않습니다.”

“맞아요. 지금은 좀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시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시현을 보며 씨익 웃었다.

“덕분에 전생에서 못 한 걸 해 보고, 시현 씨나 다른 사람들, 그리고 정령들을 만났잖아요.”

시현이 눈을 깜빡였다. 이나는 그에게 다가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요. 울지도 말고.”

시현은 깜짝 놀라 눈을 벅벅 문질렀다. 소매에 물기가 묻어 있었다.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와 시현이 얼굴을 붉히자 이나가 킥킥 웃었다.

“아무튼 전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요. 시현 씨 덕분에 확신도 섰고.”

“확신……?”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저를 희생할 게 아니라, 칼릭스를 없애야 한다는 확신이요.”

이나는 시현에게 칼릭스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어 주었다. 그럴수록 시현의 얼굴은 굳어만 갔다.

이나는 딱딱해진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칼릭스가 저를 찾기 위해 이 세계를 침범했어요. 그 탓에 제 전생의 세계와 이 세계가 연결되어 던전이 생겼고요.”

“정말 끈질긴 스토커로군요.”

“맞아요. 그러니 칼릭스를 없애야 모든 게 끝나요.”

시현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나가 굳은 표정을 풀고 시현의 어깨를 짝 때리며 호쾌하게 물었다.

“이제 궁금한 거 다 풀렸어요? 눈물도 싹 날아갔죠?”

시현의 얼굴이 재차 벌게졌다. 하지만 궁금한 건 아직 남아 있었다.

“이나 씨가 말한 그 후회는 무엇입니까?”

“후회?”

“쌍둥이에게 했던 말 말입니다.”

“아아. 그거요?”

시현은 제 딴엔 이나의 남아 있는 슬픔을 풀어 주고자 꺼낸 물음이었다. 하지만 이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전생에 나름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한 명 있었거든요. 썸을 타 보기도 하고. 그 사람에게 고백이나 해 볼걸, 하는 후회였어요.”

“……네?”

“뭐, 지금은 그저 전생의 스쳐 지나간 일들 중 하나일 뿐이지만요.”

이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말했지만 시현은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문득 라쿠틀라의 던전으로 바캉스를 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이나가 언급했던 이와 같은 사람일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새로운 삶을 살면서도 생각나는 사람이라니.

‘……조금 질투가 나는군.’

그때 그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잠깐.’

시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 고백은 어떻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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