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직전, 시현은 그녀에게 말했다.
“이나 씨를 좋아하니까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그런데 말하는 도중에 갑자기 빛이 터져 나왔고, 두 사람은 깨어났다.
아무리 달달한 고백이라도 이나가 그것을 듣지 못했다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시현은 슬쩍 이나의 눈치를 살폈다. 이나는 갑자기 자신의 눈치를 보는 시현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봐요?”
“저어, 이나 씨, 혹시…….”
시현은 망설이다가 주먹을 꾹 쥐고 용기를 내어 물었다.
“혹시 깨어나기 전,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시현은 이나를 뚫어져라 보았다. 잠시 놀란 눈을 깜빡거리던 이나가 입을 열었다.
“그을……쎄요? 뭐라고 말했던 건 기억이 나는데, 정확히는 못 들었어요.”
“……그렇군요.”
시현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지금이라도 다시 말할까 머뭇거리던 시현은 결국 이나의 휴식을 위해 문 쪽으로 걸어갔다.
“피곤하실 텐데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시현 씨도 푹 쉬세요.”
시현은 살포시 웃고는 방을 나섰다.
그가 멀어지는 소리를 듣고 있던 이나는 마침내 떨리는 한숨을 내뱉었다.
“와. 들키는 줄.”
[뭘?]
정령들이 물었지만 이나는 대답해 주지 못했다. 홧홧한 얼굴을 손등으로 식힐 뿐이었다.
사실 이나는 들었다. 시현의 그 달달한 고백을.
그럼에도 듣지 못했다고 답한 것은 당황한 탓도 있지만, 칼릭스와 K 탓이 컸다.
그녀에게 소중한 존재가 생기는 걸 칼릭스가 두고 보지만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앞으로 그들과 싸워야 하는데, 팀워크를 발휘해야 할 때에 괜히 다른 사람들과 어색해지긴 싫었다.
그러니 그 고백에 답하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난 뒤가 맞았다.
그때가 되면.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겠지.’
이나는 드레스 자락과 함께 주먹을 꾹 쥐었다.
자신의 마음을 전할 타이밍이 지금이 아니라는 점이 그녀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미안해요, 시현 씨.’
이나는 미안해하는 얼굴로 그가 나간 자리를 빤히 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즈가 물었다.
[이나는 시현 씨를 좋아하는 거야?]
“뭐?”
이나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이즈의 말을 들은 다른 정령들이 잔뜩흥분해서 이나에게 달라붙었다.
[오오! 그게 정말인가!]
[그러고 보니 이나의 체온이 올라갔어!]
[좋아하는구나!]
[너무 아름다운 사랑이에요……!]
이나는 잔뜩 붉어진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정령들이 또다시 그녀를 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정령들은 결국 양팔을 들어 올리며 잘못했다고 비는 처지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
S급 연회가 끝나고, 이나 일행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문제는 쌍둥이였다. 한주원이 함께 타는 전세기에 아이들을 함께 태우기는 난감했다.
그때 쌍둥이가 의외의 말을 꺼냈다.
“공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응.”
니나와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원랜 정신계 마법과 융합해서 사용하는 용도지만, 마력만 있다면 여기서 한국까지 단번에 이동할 수 있어.”
“그걸 쓰면 비행기는 안 타도 돼. 문제는 우리 마력으로는 장거리를 이동할 수 없다는 거야. 환상을 보여 줄 때랑은 달라서 멀리 이동할 땐 마력이 많이 필요하거든.”
“마력이야 충분하지만…….”
이나 본인이 엄청난 마력의 소유자니 말이다.
문제는 마법을 사용하려면 쌍둥이에게 채운 구속 아이템을 풀어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나가 고민하고 있는데 도하가 끼어들었다.
“저 꼬맹이들의 뭘 믿고 구속 아이템을 풀어 줘? 난 반대야. K의 본거지로 이동시키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런 짓 안 하거든!”
“맞아! 얌전히 따르겠다고 했잖아!”
울컥한 쌍둥이가 도하에게 외쳤다.
세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는 사이 시현이 이나에게 슬쩍 다가왔다.
“어쩌시겠습니까?”
“으음.”
팔짱을 낀 채 고민하던 이나가 가볍게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쌍둥이들과 따로 이동할게요.”
“야, 유이나! 내 말 못 들었어? 저 녀석들은……!”
“알아요. 전직 K였던 거.”
“지금도 그럴 수 있어! 널 속이는 걸지도 모른다고!”
쌍둥이가 움찔 떨며 몸을 움츠렸다. 이나는 그런 쌍둥이의 머리를 양손으로 각각 쓰다듬으며 말했다.
“안 그러겠다잖아요. 그럼 믿어 봐야죠. 그렇지?”
“……응.”
“안 그럴게.”
쌍둥이가 무언가를 꾹 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하는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결국 이나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결정이 나자 이나는 쌍둥이의 구속 아이템을 풀어 주었다. 마침내 두 손의 자유를 찾게 된 쌍둥이는 한참 동안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이나는 시현과 도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한주원 씨한테는 제가 따로 가는 이유를 잘 둘러대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한국에서 봐요.”
이나는 그 말을 남기고 쌍둥이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쌍둥이의 안색이 희게 질려 있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쌍둥이는 고개를 저었지만 안색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쌍둥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공간 마법을 사용하는 데 필요한 마력을 나눠 주기 위함이었다.
쌍둥이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마력을 가져갔다. 잠시 후 시야가 일렁이는 기분이 들어 이나는 눈을 감았다.
이나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눈앞에 익숙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들은 한국 헌터 협회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난 이나와 쌍둥이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기해하는 것은 쌍둥이도 마찬가지였다.
“여기가 한국이구나.”
“높은 빌딩이 되게 많다.”
이나는 신기해하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쌍둥이를 잠시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 쌍둥이가 그녀를 올려다볼 때쯤 입을 열었다.
“구경은 나중에 실컷 시켜 줄 테니까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여긴 왜?”
“만나야 할 사람이 있거든. 앞으로 너희를 보호해 줄 사람이야.”
보호라는 말에 쌍둥이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서 생경함이 느껴졌다.
K에서는 그들을 보호하긴커녕 이용해 먹기 바빴으니까. 그래서 쌍둥이는 그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이나는 아무렇지 않게 쌍둥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구속 아이템은 채우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쌍둥이가 그녀를 따라 협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곳은 다름 아닌 서준이 있는 본부장실이었다.
본부장실 앞에 도착한 이나는 그냥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 비서와 안면이 있기도 하고, 이나와 서준의 친분은 그녀도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나가 문고리를 잡기도 전에 비서가 이나를 붙잡았다.
“저어…… 지금 본부장님은 바쁘셔서…….”
“많이 바쁘신가요?”
이나의 물음에 비서가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나는 곤란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좁혔다.
때마침 본부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이나와 비서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늘 멀끔하게 하고 다니던 평소와 달리 오늘은 목깃을 풀어 헤치고 있는 서준이 보였다. 그는 하품을 하며 이나에게 손을 살짝 흔들었다.
“오셨습니까? 굉장히 빨리 오셨네요.”
“네. 어쩌다 보니…….”
“근데 그 아이들은 누군가요?”
서준의 시선이 이나의 곁에 있는 쌍둥이에게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쌍둥이는 이나의 뒤에 숨었다.
이나는 난감하다는 듯 웃으며 그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안 그래도 이 아이들 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렇군요. 들어오세요. 방이 조금 엉망이긴 하지만.”
그의 말대로 방 안에는 전보다 많은 서류가 쌓여 있었다. 무슨 일인진 몰라도 서준이 피곤해하는 것이 이해되는 광경이었다.
이나가 쌍둥이와 함께 소파에 앉자 서준이 맞은편에 앉으며 쌍둥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래서, 어쩌다 이런 어린 일행들과 함께 온 겁니까? 다른 분들은요?”
“다른 세 분은 서준 씨의 전세기를 타고 올 거예요. 저는 이 아이들의 능력을 써서 곧장 왔어요.”
“아이들의 능력이라뇨? 설마 이 어린애들이 각성자입니까?”
이나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이 애들은 K의 일원이에요.”
순간 멈칫한 서준이 날카로워진 눈으로 쌍둥이를 훑었다. 그러자 이나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정확히는 K였던 애들이지만요.”
“……대체 저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나는 그에게 러시아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쌍둥이가 그녀에게 정신계 마법을 쓴 것부터 시현과 도하가 그녀를 구해 낸 일, 그리고 쌍둥이의 처분에 대한 계획까지.
묵묵히 듣고 있던 서준이 쌍둥이를 힐끗 보며 말했다.
“그래도 K였던 아이들입니다. 안전하다는 보장은…….”
“저를 다른 K가 있는 곳이 아니라 한국으로 데려와 준 아이들이에요. 물론 그것만으로 믿긴 힘들겠지만요. 그러니 저를 믿어 주세요. 제가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할게요.”
그 말에 놀란 것은 쌍둥이였다. 그들은 진지한 눈빛의 이나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그녀와 시선을 주고받던 서준은 결국 항복 제스처를 취했다.
“이나 씨가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믿어 주셔서 감사해요.”
이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에 서준도 픽 웃음을 흘렸다.
그들은 쌍둥이의 거취에 관해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듯하자 이나가 서준의 책상 쪽을 힐끗 보며 물었다.
“그런데 저희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네. 있었습니다.”
서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는 모습에서 그의 피곤함이 느껴졌다.
“실은 이나 씨와 다른 분들이 모스크바로 떠난 직후, 영국 헌터 협회에서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항의요? 무슨 항의요?”
서준이 갑자기 이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이나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설마 저 때문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