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화 (111/149)

“맞습니다.”

“아니, 왜요? 저 영국에 미움받을 짓 한 적 없는데요?”

가 보긴커녕 가 보려는 생각조차 안 해 본 나라에서 왜 나 때문에 항의를?

이나는 황당했다. 하지만 이어진 서준의 말에 그녀 또한 심각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영국 헌터 협회는 저희가 이나 씨를 세계 유일의 정령사라고 소개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더군요. 그 덕분에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으니까요.”

“무슨 그런 걸 갖고……. 제가 세계 유일의 정령사인 건 맞잖아요?”

“그게…… 영국 헌터 협회의 말에 따르면 그쪽에도 정령사가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이나가 깜짝 놀라 눈을 치켜떴다.

놀란 것은 정령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령들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뭐어? 이나 말고 정령사가 또 있다고?]

[그게 정말이야?]

[그럼 우리 말고 다른 정령들도 있는 거야?]

갑자기 쏟아지는 질문 속에서 서준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 말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이나는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지구라고 정령사가 나오지 말란 법은 없었다. 비록 저쪽 세계에서 넘어온 거라곤 하나 이곳에도 정령의 알은 있었으니까.

다만 조금 갑작스러웠기에 이나는 당황스러웠다.

서준은 그런 이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조만간 그쪽의 정령사를 한국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네? 왜요?”

“글쎄요. 말은 친목 도모라곤 하지만…….”

서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날카로운 눈빛을 자아냈다.

“아무래도 기선 제압을 하기 위함이겠죠.”

“하아. 귀찮게시리.”

이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쓰게 웃은 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무튼 쌍둥이 건은 잘 알겠습니다. 두 아이는 당분간 협회에서 맡겠습니다. 이나 씨는 영국의 정령사가 올 때까지 푹 쉬세요.”

“그냥 안 왔으면 좋겠네요.”

이나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쌍둥이가 눈치를 보다 그녀를 따라왔다.

이나는 그런 쌍둥이에게 말했다.

“너희는 여기 있어. 서준 씨가 임시 거처를 정해 줄 거야. 구속 아이템을 다시 찰지도 모르지만, 불편해도 좀 참고.”

“……있잖아.”

니나가 머뭇거리다 그녀에게 물었다.

“왜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야?”

“음.”

이나는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예전에,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난 어릴 때 나를 보호해 줄 어른들이 있었으면 했거든.”

“…….”

“너희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보호자가 있어서 나쁠 건 없잖아?”

이나는 씨익 웃으며 쌍둥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알겠지?”

“……응.”

“알겠어.”

“좋아.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날 불러. 서준 씨도 쌍둥이에게 무슨 일 있음 저한테 말해 주세요.”

이나가 그를 보며 말하자 서준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죠.”

“그럼 부탁할게요.”

이나는 그 말을 남기고 집으로 향했다. 걸리는 것이 많았지만 일단 오늘은 푹 쉬기 위함이었다.

***

시현과 도하는 한주원과 함께 다음 날 새벽이 되어서야 한국에 도착했다.

이나는 공항에 발을 디디는 세 사람의 모습이 담긴 기사 사진을 보며 정령들이 해 준 따뜻한 밥을 먹고 있었다.

“저기 없었던 게 다행이네.”

하마터면 사진을 남길 뻔했다. 물론 이미 기자 회견 때 다양한 사진이 찍히긴 했지만.

이나는 씁쓸한 마음을 따뜻한 밥으로 달랬다. 그러고 있자 정령들이 물어 왔다.

[이나야, 오늘은 뭐 할 거야?]

“뭐 하긴. 모스크바로 가기 전에 그랬듯이 감응도를 올리기 위해 특훈해야지.”

이나가 밥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감응도가 몇이지?’

모스크바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았던 감응도 수치가 57이었다. 그나마도 찔끔찔끔 올려서 겨우 그 수치였다.

앞으로 얼마나 더 던전을 돌아야 <일체화> 스킬을 쓸 수 있을지.

이나는 막막한 기분으로 이즈의 정령 상태 창을 열어 보았다.

띠링!

⌜정령 상태 창

이름: 이즈

나이: 4개월

속성: 물

감응도: 71/100⌟

“……어?”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던 이나가 행동을 멈추고 얼떨떨한 목소리를 냈다.

정령들도 그녀와 같은 창을 보고 감탄을 내뱉었다.

[우와! 감응도가 엄청 올랐어!]

[나는, 나는? 이나야, 내 상태 창도 봐 줘!]

리카의 재촉에 이나는 다른 정령들의 상태 창도 열어 보았다. 이즈보다는 조금 부족했지만 감응도가 확연히 올라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꾸준히 던전을 돌아도 찔끔찔끔 오르던 감응도였다. 그런데 모스크바에 다녀오니 갑자기 훅 올라가 있었다.

‘잠깐.’

설마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일이 도움이 된 건가?

그곳에서 이나는 쌍둥이의 정신계 마법에 당해 전생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정령들에게 처음으로 비밀을 털어놓고 더욱 교감하게 되었다.

혹시 그게 도움이 되었던 거라면?

‘뭐, 이유야 어찌 됐든 나한테야 잘된 일이지.’

이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 정도 수치라면 분명 <일체화> 스킬을 쓸 수 있을 터였다.

이나는 그릇에 남은 밥을 입에 쑤셔 넣고 얼른 식탁을 깨끗이 치웠다. 그리고 소화가 되기도 전에 외출 준비를 했다.

[이나야, 어디 가?]

“어디 가긴. 새로운 스킬을 한번 써 봐야지.”

그 말에 정령들이 눈을 빛냈다. 그러고는 밖으로 나가는 이나를 쪼르르 따라갔다.

‘어디 보자. 이 스킬은 좀 세니까 역시 상급 던전으로 가야겠지?’

서준이 주었던 상급 던전 리스트를 보며 이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맞은편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쳤다.

“유이나 씨?”

“네?”

그때 그 누군가가 이나를 불러 세웠다.

이나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뒤를 홱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고 말았다.

‘연예인?’

연예인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상대방은 무척이나 세련된 모습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그녀의 핑크색 머리였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음에도 그녀의 미모는 가려지지 않았다. 그 사실이 신기해서 이나는 그녀를 계속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나를 보며 빙긋 웃더니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러자 그녀의 회색 눈동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쁘긴 했지만 그녀는 낯선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나는 조금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세요?”

“유이나 씨, 맞죠?”

“그런데요?”

“전 소피아 무어라고 해요. 유이나 씨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왔어요.”

“저를요?”

이나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자신을 찾아올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얼마 전 서준이 했던 말이 떠올라 이나는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혹시 영국에서 오셨나요?”

“네. 맞아요. 이미 소식을 들었나 보네요.”

소피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어쩜 저렇게 웃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우아한 미소였다.

‘꼭 귀족을 보는 것 같네.’

잠시 그녀에게 시선을 빼앗겼지만 이나는 곧 냉철하게 생각을 바꾸었다. 그리고 정령들에게 속으로 물었다.

‘어때? 저 여자, 정말 정령사야?’

이나의 물음에 소피아를 빤히 보고 있던 정령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령의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절대 정령사가 아니야.]

“뭐?”

이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되물었다.

정령사라며? 근데 정령의 힘이 없다고?

수상했다. 이나의 눈빛에 경계심이 드리워지며 그녀가 소피아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소피아가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영국에서 오긴 했지만 정령사는 제가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네. 저는 그 사람과 함께 온 일행이에요.”

“그럼 그 정령사는 어디 있어요?”

이나가 슬쩍 그녀의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하지만 소피아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같이 안 왔어요. 하지만 곧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렇군요. 근데 왜 여기까지 저를 찾아오신 거죠?”

이나가 귀찮아하는 티를 굳이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귀찮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소피아의 다음 말이 이어진 순간, 이나는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거래를 하러 왔어요.”

“거래라뇨?”

“쌍둥이는 지금 어디 있죠?”

그 질문을 들은 즉시 이나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녀의 마음에 동화된 정령들도 사나운 기운을 내뿜었다.

그럼에도 소피아는 꿋꿋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쪽, K예요?”

“대화가 빨라서 좋네. 맞아요. K의 일원이에요. 당신들이 데려간 쌍둥이를 찾으러 왔죠. 우리의 소중한 자산인지라.”

“그 애들을 물건 취급 하지 마.”

이나가 사납게 대꾸하자 소피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나는 그녀에게 경고했다.

“당신네들이 뭘 내놓든 난 당신들이 쌍둥이를 다시 데려가게 두지 않을 거야.”

“그래요? 후회할 텐데.”

소피아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니 괜히 불안한 마음이 되었지만 이나는 꿋꿋했다.

소피아는 그런 이나를 잠시 훑다가 상관없다는 듯이 말했다.

“뭐, 두고 보면 알겠죠.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

“오늘은 이만 가 볼게요. 나중에 또 봐요.”

“어딜 가려고!”

이나는 소피아를 붙잡으려 했다. K란 걸 알았는데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러다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소피아의 화려한 외관과 소란 탓에 이쪽으로 모여든 사람들이 있었다.

이나가 머뭇거리고 있자 소피아가 후후 웃었다.

“여기서 저와 싸우기라도 하시려고요? 후회할 텐데.”

결국 이나는 힘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소피아는 싱긋 웃더니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곧 싸우게 될 거예요. 그럼 기대하고 있을게요.”

소피아가 그녀를 향해 손 뽀뽀를 날리는 시늉을 했다. 그에 이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감시할 정령이라도 붙일까 싶었지만 관두었다. 영국 정령사의 일행으로서 이미 헌터 협회의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을 테니까.

감시는 아마 서준 쪽에서 충분히 해 주고 있을 터였다.

그래도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자신을 신경 쓰지 않고 유유히 사라지는 소피아를 보며 이나는 홀로 중얼거렸다.

“대체 무슨 속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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