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온 정령사가 K라고요?”
서준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시현과 도하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나는 소피아를 만난 후 급히 일행을 서준의 본부장실로 불러들였다. 오전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예상대로 다들 몰랐는지 놀란 얼굴들이었다.
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정확히는 정령사와 함께 온 여자가 K지만요.”
“그럼 정령사도 K일 가능성이 없진 않군요.”
“그렇죠.”
무거운 침묵이 본부장실 안에 들어찼다. 침묵을 깨고 도하가 말을 꺼냈다.
“그럼 뭐야. 영국 헌터 협회가 K에 가담하고 있다는 거야?”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다곤 못 하지만, 아마 아닐 겁니다. 영국 헌터 협회도 그 정령사의 존재를 눈치챈 지 얼마 안 된 느낌이었거든요.”
“그럼 그 K가 영국 헌터 협회에 접근했을 가능성이 크겠네요.”
이나가 말하자 서준이 동조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끄응, 신음을 흘리던 도하가 팔짱을 낀 채 의문을 던졌다.
“하지만 왜? 그놈들이 영국 헌터 협회에는 왜 접근한 건데?”
“그건 만나서 얘기해 보면 알겠죠.”
눈을 날카롭게 빛낸 이나가 서준을 향해 물었다.
“영국의 정령사가 우리나라에서 기자 회견을 하는 날이 언제예요?”
“이틀 후입니다.”
“저도 참여하는 편이 좋겠죠?”
“아무래도…… 이나 씨를 만나러 오는 거니까요.”
고개를 끄덕인 이나가 그에게 당부했다.
“쌍둥이가 있는 처소에 감시를 늘려 주세요. 소피아는 분명 쌍둥이를 노릴 거예요.”
“알겠습니다.”
“앞으로 바빠지겠군요.”
시현이 낮게 읊조리는 말에 이나가 한숨으로 동조했다.
또 그 많은 카메라 앞에 서야 한다니. 상상만으로도 진절머리가 났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전할 건 모두 전했으니 이제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었다. 서준의 배웅을 받으며 모두 본부장실 밖으로 나갔다.
“유이나.”
그때 도하가 그녀를 부르며 멈춰 섰다.
이나가 고개를 돌리자 그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시 나랑 대련 좀 해 줄 수 있어?”
“네?”
“백도하, 너 또…….”
시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도하를 막아서려 했다. 그러자 도하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라!”
“그럼요?”
“앞으로의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서.”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한 이나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도하가 답답하다는 듯이 설명해 주었다.
“영국의 정령사가 K로 의심되는 상황이잖아. 그럼 우리랑 싸우게 될지도 모르는데 미리 대비해 놓는 편이 좋지 않겠어? 우린 정령을 상대해 보지 않았으니까.”
“음. 하지만 진짜 정령사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인데요.”
“그렇다고 가짜라고 확신할 수도 없는 상황이지.”
이나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잠시 고민하던 이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해요, 대련. 이왕이면 시현 씨도 같이요.”
“저도 말입니까?”
얌전히 듣고 있던 시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나는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시현 씨도 서포트만 받아 봤지, 정령을 상대해 보지 않은 건 마찬가지잖아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 같이 해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시현이 승낙했다.
의견이 정해지자 도하가 씨익 웃으며 앞장섰다.
“좋아. 그럼 가자.”
“대련하기 괜찮은 곳이 있어요?”
“당연히 있지.”
도하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엄지로 자신을 척 가리켰다.
“나만 믿고 따라와.”
***
도하가 두 사람을 데리고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청호 길드였다. 정확히는 뒤에 딸려 있는 건물이었지만.
체육관처럼 생긴 그곳으로 들어가자 이미 많은 헌터들이 안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다.
모두 청호 길드의 헌터들이었다. 청호 길드에는 근접계 헌터들이 많은 탓에 훈련장 안에는 다양한 훈련 도구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중량화 마법이 걸려 있어 더욱 무거운 아령과 주먹이 아닌 무기로 치는 업그레이드된 샌드백까지.
마치 하드 모드 헬스장을 연상케 하는 모습에 보기만 해도 땀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이나가 신기해하며 훈련장 안을 둘러보는 사이 도하를 발견한 길드원들이 그에게 달려왔다.
“어? 길드장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훈련하러 오셨어요?”
“어. 대련 좀 하려고. 연무장 비어 있지?”
“네. 비어 있긴 한데…….”
길드원이 도하의 뒤에 서 있는 이나와 시현을 힐끗 보았다. 특히 시현을 뚫어져라 보던 그가 도하에게 속삭였다.
“설마 천조 길드장과 이참에 결판을 내시려는 거예요? 그럴 거면 다른 곳 가세요! 연무장 또 부수시려고!”
그런데 그게 뒤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도 다 들렸다.
이나가 짜게 식은 눈으로 도하를 쳐다보자 도하가 발끈해서 외쳤다.
“그런 거 아니거든!”
“아니에요?”
“그래! 이번엔 저기, 유이나와 대련할 거라고.”
도하가 뒤를 돌아보며 이나를 가리켰다.
“너희도 알지? 최근에 한국에서 각성한 세계 유일의 정령사.”
“알죠! 당연히 알죠!”
길드원이 눈을 빛내며 이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야. 이렇게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저는 청호 길드 소속 헌터인 강일우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그가 싹싹한 성격을 내비치자 이나도 픽 웃으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런데 이어진 말은 예상외였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우리 길드장님을 아주 휘어잡고 계신다고.”
“……제가요?”
“야. 헛소리하지 말고 저리 가.”
도하가 얼굴을 구기며 그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하지만 그의 입은 그사이에도 쉴 새 없이 떠들었다.
“혹시 저희 길드에 들어오실 생각은 없으세요? 유이나 씨라면 김 비서님이 조건 엄청 좋게 해 주실 텐데. 들어오시는 김에 길드장님의 제2의 비서가 되어 주시는 건…… 으억!”
결국 그는 도하에 의해 내동댕이쳐졌다.
이어 도하가 다른 길드원들을 할 말 있냐는 식으로 쳐다보자 모두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웃은 도하가 이나와 시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연무장은 저쪽이야.”
“……네.”
이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따라 연무장 안으로 들어갔다.
훈련장은 크게 두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한 곳은 조금 전에 본 하드 모드 헬스장, 그리고 나머지 공간은 운동장처럼 흙이 깔린 연무장이었다.
연무장을 주욱 훑어보던 이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하드 모드 헬스장과 연결되어 있는 창에 청호 길드원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나와 눈이 마주친 그들이 히죽 웃었다. 그에 이나도 삐질 웃으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저쪽은 신경 쓰지 마.”
‘굉장히 신경 쓰이는데요.’
이나는 도하의 말에 속으로 대답하며 연무장 중앙으로 향했다.
시현과 도하, 그리고 아란은 한편에 나란히 섰고, 이나는 그 반대편에 홀로 섰다.
“혼자서 두 분을 상대하는 건가?”
예상치 못한 포지션에 청호 길드원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사이 시현과 도하가 각자 무기를 꺼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며 고개를 까딱이자 이나가 말했다.
“그럼 시작할게요.”
선공은 이나가 했다. 가볍게 모래바람을 일으킨 이나가 그것을 두 사람에게 날렸다.
모래바람에 잡아먹히는 것처럼 보이던 시현과 도하는 각자의 방법으로 모래바람을 빠져나왔다.
시현은 검기로 베어 내 틈을 만들었고, 도하는 아란의 푸른 불꽃으로 모래바람을 상쇄시켰다.
가뿐하게 모래바람을 빠져나온 두 사람이 이나를 향해 달려왔다. 특히 도하는 아란의 위에 올라타 속도가 빨라졌다.
정령사는 근접전에 불리했다. 그러니 저 두 사람이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
이나는 흙을 이용해 두 사람의 발목을 붙잡으려 했다. 시현은 붙잡혀 주춤했지만, 도하와 아란은 야생의 감으로 눈치채고 높이 뛰어올랐다.
화륵-
마치 도깨비불처럼 동그랗고 푸른 불꽃이 아란의 주위에 생겨났다. 아란의 능력이었다.
아란은 그것을 그대로 이나를 향해 날렸다. 불꽃에 아란의 마력이 담긴 탓에 이나는 그것을 파인의 능력으로 다룰 수가 없었다.
대신 이나는 이즈의 물을 이용했다. 날아오던 불의 공이 이즈의 물과 닿아 치익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이크.”
수증기가 일어나 시야에 방해되었다. 그것을 리카의 바람으로 날려 보내자 어느새 도하가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도하는 그녀를 향해 언월도를 휘둘렀다. 정말로 죽이려고 하는 공격은 아닐 테지만 꽤 위협적이었다.
퍽!
이나는 급하게 흙벽을 일으켜 도하의 공격을 막았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흙으로 무기를 집어삼켰지만 도하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이나에게 킥을 날렸다.
이나는 공중으로 날아올라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피했다. 그러자 어느새 발을 붙잡고 있던 흙을 파헤치고 다가온 시현이 공중으로 점프해 공격을 시도했다.
“웬만하면 저와 공중전을 시도하진 마요.”
이나가 시현을 향해 말했다.
그 순간 공중에서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쿠르릉-
“……!”
시현은 이나를 공격하려던 것을 멈추고 몸을 움츠렸다. 다가올 공격을 조금이나마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아란이 점프해 시현을 물고 땅에 착지했다. 방금까지 시현이 있던 자리에 번개가 내리쳤다.
이나가 타이밍을 조절하지 않았다면 시현은 통구이가 됐을 터였다. 그것을 알고 있는 시현이 아란에게 말했다.
“……고맙다.”
“크릉!”
아란이 볼일은 끝났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시현이 뻘쭘해하는 얼굴로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 도하가 다가왔다.
“생각보다 까다롭네.”
“그렇군.”
공중에서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고 있던 이나가 슬쩍 끼어들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정령사의 약점이 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네요.”
“정령사 본인, 맞지?”
도하의 물음에 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정령이 능력을 쓸 수 있도록 힘을 주는 매개체나 다름없으니까요.”
“문제는 그 힘이 까다롭다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전 오히려 제가 불리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나가 헛웃음을 터뜨리자 시현과 도하가 의아해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이나가 설명해 주었다.
“검기와 근접전, 이 두 가지는 저에게 치명적이에요. 시현 씨와 도하 씨는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잖아요. 그걸 잘 활용해 봐요.”
그 순간 서로를 보던 시현과 도하가 눈을 빛냈다. 무언의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이 이나를 보며 말했다.
“한 번 더 대련을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시현과 도하가 무기를 고쳐 쥐자 이나도 다시 대련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싸우는 광경을 지켜보던 청호 길드원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S급 헌터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