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3화 (113/149)

“하아. 불편해.”

이나는 목 끝까지 채운 단추를 풀어 헤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중얼거렸다.

자리가 자리이다 보니 정장을 꺼내 입었더니 아주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그 소리를 들은 서준이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조금만 참아 주세요. 최대한 길어지지 않게 해 보겠습니다.”

“제발 그래 주셨으면 좋겠네요.”

이나가 투덜거리며 문 너머의 카메라들을 흘겨보았다.

모두 이나와 영국의 정령사를 취재하기 위해 온 기자들이었다. 희귀한 두 존재가 만나는 것만큼 큰 이슈거리는 없을 테니까.

기자 회견으로 만남이 끝나면 좋았겠지만, 문제는 상대방 측에 K가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들은 기자 회견이 끝나면 아주 긴 대화를 나누게 될 터였다.

이나의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었다. 그사이 기자 회견 시간이 훌쩍 다가왔다.

서준이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더니 이나에게 말했다.

“이나 씨, 슬슬 올라가시죠.”

“네.”

이나는 한숨을 삼키고 기자 회견장으로 발을 내디뎠다.

기자 회견에서는 한 사람씩 질문을 받은 뒤 나중에 공통으로 질문을 받는 시간을 가질 예정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정령사인 이나가 먼저 기자 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도 한 번 해 봤다고, 많은 카메라가 앞에 있었지만 전처럼 긴장되지는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나는 첫 번째 질문을 받았다.

“유이나 헌터, 이번에 영국에서 새로운 정령사의 존재를 발표했는데요, 혹시 다른 정령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아뇨. 몰랐습니다.”

알았으면 이러고 있겠냐.

그렇게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치고 올라왔지만 이나는 꾹 참고 다음 질문을 받았다.

“새로운 정령사의 등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질문에서 ‘세계 유일의 정령사 타이틀을 내려놓게 되었는데 기분 나쁘지?’라고 비아냥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말 신기한 화법이었다.

다른 기자들도 이나의 표정을 주시했다. 그에 이나는 보란 듯이 활짝 웃어 주었다.

“저 말고 다른 정령사가 등장한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죠. 정령들에게도 마찬가지고요. 동지가 생긴 기분이라서 전 아주 기대하고 있습니다.”

기대하고 있긴 했다. 과연 K에서 뭘 준비했을지.

그 외에도 시시콜콜한 질의응답이 진행되었다. 그사이 문 쪽에서 약간의 소란이 느껴졌다.

‘드디어 온 건가.’

이나는 그쪽을 힐끗 보았다. 그러자 마침 그녀에게 영국의 정령사가 도착했다는 사인이 들어왔다.

기자들도 눈치챘는지 그쪽으로 몇몇 카메라가 돌아가는 게 보였다. 문 쪽을 응시하며 이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 오셨는지 볼까.’

그런데 그녀와 마찬가지로 문을 응시하던 정령들이 당황했다.

[어?]

‘왜 그래?’

[정령의 힘이 느껴져!]

‘뭐?’

이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치켜떴다. 다행히 카메라들은 문 쪽을 주시하고 있어 그녀의 그런 모습을 담지 않았다.

사실 저쪽에서 정령사를 데려왔다고 했을 때 이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K가 준비한 개수작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정말 정령사가 있다고?’

이나는 당황한 마음을 애써 숨긴 채 문 쪽을 응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간의 화제인 영국의 정령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

이나는 소리 없이 경악하며 주먹을 꾹 쥐었다.

상대는 평온한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러고는 이나에게 손을 내밀며 빙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루크 프리먼이라고 합니다.”

“……루크, 라고요.”

“네. 무슨 문제라도?”

눈앞의 사내는 이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반면 이나는 저 얼굴을 알았다.

아무리 어린 시절 티를 벗었다지만 어떻게 몰라볼 수가 있을까.

이나는 분노와 슬픔을 참기 위해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는 전생에 셀리나의 제자였던 루엔이었다.

“스승님!”

어린 루엔이 활짝 웃으며 자신을 향해 뛰어오던 모습이 환생한 지금도 눈에 선했다.

그때는 웃음만큼 눈물도 많아 마냥 어리게만 보이던 아이였는데.

하긴, 칼릭스도 훌쩍 컸으니 루엔이라고 다르리라는 법은 없었다.

이렇게 성인이 된 제자를 보니 이나는 감격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지금 상황에 대한 혼란과 칼릭스를 향한 분노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대체 루엔이 어떻게 여기에…….’

그때 루엔의 너머에 서 있는 핑크색 머리의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를 알아본 이나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그런 이나를 보며 소피아가 미소 지은 채 입 모양으로 말했다.

‘서프라이즈! 놀랐죠?’

이나는 이를 까득 갈았다. 그러자 루엔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나는 다시 루엔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입을 달싹거리던 그녀가 겨우 말을 꺼냈다.

“만나서 반가워요, 루……크.”

“네. 저도요.”

루엔이 빙긋 웃었다. 이나도 마주 웃어 주려 했지만 제대로 미소가 그려졌는지는 알 수 없었다.

***

기자 회견이 끝나고 루엔과 소피아는 곧장 기자 회견장을 빠져나갔다.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서준이 다가왔지만 이나는 그를 그냥 지나치고 두 사람에게 외쳤다.

“기다려!”

루엔과 소피아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이나에게 웃어 주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지금의 루엔은 어딘가 텅 비어 있는 사람처럼 눈빛이 흐렸다.

그것을 본 이나가 소피아를 노려보며 짓씹듯이 물었다.

“대체 루엔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리고 어떻게 여기 있는 거고!”

“이자는 우리의 신께서 당신에게 보내라 하신 선물이에요.”

소피아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러면서 루엔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는 것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나는 칼릭스를 향한 분노를 애써 삼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당장 루엔을 원래대로 돌려놔!”

“그건 곤란해요. 말했잖아요. 나는 당신과 거래를 하고 싶다고.”

소피아의 눈빛이 바뀌었다. 이나를 훑는 눈빛에서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선물을 온전히 받고 싶다면 쌍둥이를 내놓는 편이 좋을 거예요.”

“……대체 이렇게 해서 너희가 얻는 게 뭐야?”

“글쎄요. 저의 경우는 인생의 즐거움이랄까?”

소피아가 호호 웃으며 답했다. 몸을 돌려 이나를 등진 그녀는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조만간 거래 날짜와 장소가 적힌 초대장을 댁으로 보낼게요.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요. 그럼 또 봐요.”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모습에 이나는 분노를 꾹 눌렀다.

뒤에서 소피아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서준이 때마침 이나에게 다가왔다.

“이나 씨, 영국의 정령사와 아는 사이십니까?”

“네. 제자예요.”

“제자요?”

서준이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쳐다보자 이나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일단 자리를 옮길까요.”

***

이나는 서준에게 전생에 대해 설명하는 김에 도하도 부르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자 도하가 본부장실에 도착했고.

“……시현 씨?”

부르지 않은 시현도 이어서 도착했다.

이나가 어떻게 된 거냐는 듯이 쳐다보자 시현이 멋쩍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기자 회견을 봤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기에 달려와 봤는데…….”

그는 서준과 도하를 번갈아 쳐다보며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다.

“저도 불러 주시지 그랬습니까.”

“아니, 그게…… 시현 씨는 이미 들은 내용이라…….”

이나가 멋쩍어하며 뺨을 긁적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앞으로의 일도 의논하는 편이 좋겠네요.”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인데?”

소파에 앉아 있던 도하가 답답하다는 투로 물었다.

이나는 그의 옆자리에 털썩 앉으며 대답해 주었다.

“제 전생에 관한 이야기예요.”

“……너 혹시 최근에 전생 테스트…… 뭐 그런 거 했어?”

“그런 거 아니에요.”

이나는 한숨을 푹 내쉰 뒤 모스크바에서 시현에게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그들에게도 들려주었다.

도하는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입이 헤 벌어졌고, 서준은 예상외로 침착하게 반응했다.

“……과연. 그렇게 된 거군요.”

“놀라지 않으시네요?”

“놀랐습니다. 다만 앤드류도 다른 세계를 언급했었으니까요. 이나 씨가 다른 세계 사람이었다는 게 납득이 되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의 그 태연했던 모습도 그렇고 말이죠.”

서준의 말에 이나가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반면 도하의 반응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과는 확실히 달랐다.

“다른 세계에서 환생이라니. 그럼 나한테도 전생이란 게 있을 수 있는 건가?”

“뭐…… 그럴 수 있죠.”

“궁금한데. 전생 테스트라도 해 봐야 하나?”

도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조금 전 그녀를 짜게 식은 눈으로 보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나는 그를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도 환생이란 걸 했을 수 있네?’

생각해 보지 못했던 관점이었다. 이나는 눈앞의 세 사람을 주욱 훑어보았다.

‘꼭 나만 저쪽 세계에서 넘어왔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

어쩌면 이 중에도 저쪽 세계에서 넘어온 영혼이 있을지도.

이나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서준이 본래 주제에 대해 말을 꺼냈다.

“그럼 아까 영국의 정령사를 제자라고 답한 것은…….”

“네. 루크, 아니, 루엔은 제 제자였어요. ……아무래도 칼릭스 그놈이 저를 엿 먹이려고 이쪽 세계로 보낸 모양이에요.”

이나가 이를 까득 갈았다. 그녀의 분노가 느껴져 서준은 침음을 삼켰다.

지금까지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현이 질문을 던졌다.

“그럼 그 루엔이란 분은 지금 조종당하고 있는 겁니까?”

“제가 본 바에 의하면 그래요.”

“곤란하게 됐군요.”

시현이 미간을 좁혔다. 억지로 빼 오기엔 K에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의 생각을 읽은 이나가 시현과 도하를 번갈아 보며 부탁했다.

“혹시라도 루엔이 두 사람을 공격해도, 그 아이에게 상처를 입히지 말아 주세요. 부탁할게요.”

“기절은 괜찮지?”

“제압 정도라면…… 네.”

도하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왠지 불안한 기분이 들어 이나는 떨떠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알겠습니다. 제자분께 상처를 입힐 일은 없을 테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고마워요.”

시현의 말에 이나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준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루엔 씨와 그 소피아라는 여자에겐 감시 겸 경호원을 더 붙이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부탁할게요.”

대화는 거기서 마무리되었다. 이나는 불안감을 삼키고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머지않은 날에 이나는 루엔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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