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4화 (114/149)

“흐아아암…….”

[이나야, 입에 벌레 들어가겠어!]

“시끄러워.”

이즈의 타박에 일갈하며 이나는 양치질을 이어 나갔다.

최근 신경이 루엔과 소피아에게 쏠려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졸려 죽을 것 같았다.

그때 화장실 선반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이 지잉 울렸다. 확인해 보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이나는 스팸인가 싶어 전화를 그냥 끊어 버렸다. 그런데 같은 번호로 다시 전화가 오자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유이나 씨 핸드폰 맞나요?]

이나는 입에 물고 있던 칫솔을 툭 떨어뜨렸다. 당황한 그녀가 통화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루엔…… 아니, 루, 루크 씨?”

[아, 맞나 보네요.]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최서준 본부장님께 물어봤어요.]

루엔의 대답에 이나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아무래도 루엔이 그녀의 제자라는 점을 생각해서 서준이 번호를 알려 준 듯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나는 루엔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나저나 유이나 씨, 오늘 시간 괜찮으세요?]

“시간이야 되지만…… 무슨 일인가요?”

[서울을 좀 구경하고 싶은데 유이나 씨가 가이드를 해 주셨으면 해서요.]

이나는 황당함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걸 왜 저한테……?”

[같은 정령사끼리 친목을 도모하면 좋잖아요?]

루엔의 해맑은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이나는 순간 멍해졌지만 이것도 소피아의 음모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분노가 올라왔다.

이나에게서 아무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루엔이 물었다.

[혹시 곤란하신가요?]

“……아뇨. 그럴게요.”

이나는 결국 한숨을 삼키고 승낙했다. 다른 사람을 붙일 바에는 자신이 루엔의 곁에 있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루엔이 좋아하더니 대뜸 말했다.

[그럼 준비 다 되시면 내려오세요.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게 무슨 말……. 아니, 설마 집 앞이에요?”

[네.]

급하게 전화를 끊은 이나는 빠른 속도로 양치질을 끝내고 나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정돈했다.

그러고 밖으로 나가자 정말로 루엔이 집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이나를 발견하고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유이나 씨.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너 때문에 잘 못 지냈다.’

그렇게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나는 애써 다른 말을 내뱉었다.

“네, 뭐. 근데 저희 집 주소는 어떻게 안 거예요? 그리고 미리 말해 주셨다면 대기하고 있었을 텐데.”

“어라. 이미 들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죠.”

“뭘요?”

“소피아 님이 말씀하셨잖아요. 거래 날짜와 장소가 적힌 초대장을 댁으로 보낸다고.”

이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반면 루엔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 초대장이 바로 저예요. 유이나 씨 집 주소도 소피아 님이 알려 주셨고요. 제가 오늘 유이나 씨를 거래 장소로 인도할 예정이거든요.”

“……제가 당신을 이대로 데려가면요?”

“이미 짐작하고 계실 텐데요. 저를 조종하고 있는 이 연결을 풀 매개체가 소피아 님에게 있다는 걸.”

이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든 말든 루엔은 제 할 말만 이어 나갔다.

“굳이 저를 보내신 건 제자와 시간을 보내면서 마음의 결정을 하라는 소피아 님의 배려예요.”

“배려……라고.”

“네. 마음까지 참 아름다운 분이시죠?”

소피아가 시킨 것인지 루엔의 입에서 헛소리가 줄줄 나왔다.

이나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려 비소를 띠었다. 루엔이 아닌 소피아가 앞에 있었다면 당장 그녀의 멱살을 잡았을 것이었다.

그런 이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루엔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갈까요?”

“어디를요?”

“서울 구경 시켜 주기로 하셨잖아요. 거래 장소로 가기 전에 유이나 씨와 즐거운 시간 보내고 오라고 소피아 님이 그러셨단 말이에요.”

이나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하지만 루엔이 등을 떠미는 통에 발을 뗄 수밖에 없었다.

***

이나는 루엔을 남산 타워로 데려갔다. 조금 거리가 있긴 했지만 그녀의 집에서 그나마 가까운 관광지가 그곳밖에 생각나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리고 시현과 도하를 부를 시간을 벌기 위한 이유도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으니까.

다행히 루엔은 이나가 두 사람을 부른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저 남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며 감탄할 뿐이었다.

“우와! 서울 풍경이 한눈에 보여요! 탁 트이고 좋네요.”

루엔은 눈을 빛내며 케이블카 창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 눈빛을 보니 마치 진짜 루엔을 보는 것 같아서 이나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진짜 루엔이었어도 같은 반응이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이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이게 소피아가 바라는 건가.’

루엔을 이용해 거래를 성사시키려고.

거기까지 생각한 이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루엔에게 말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것보다 걸어서 올라가는 게 더 운치 있었을 텐데요. 정령의 능력을 이용하면 굳이 힘들이지 않고 올라갈 수 있잖아요.”

“에이. 그 맛하고 이 맛은 또 다르죠.”

하긴, 그것도 그랬다. 이나 본인도 정령들의 능력이 편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21세기의 기술을 놓을 수는 없었다.

혼자 납득하던 이나는 문득 의문이 들어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루크 씨, 정령은 어딨어요?”

지난번 기자 회견에선 루엔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눈이 멀어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루엔의 곁에 정령이 없다는 사실을.

지금 와 물어보는 게 웃길 법한데도 루엔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아, 정령이요? 소피아 님께 맡겼어요.”

“……맡겼다고요?”

“네.”

이나는 왠지 불안한 기분이 들어 미간을 좁혔다.

정령들은 웬만하면 계약자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나의 정령들만 봐도 그녀의 곁에 내내 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소피아에게 있다는 것은…….

‘루엔의 정령도 조종당하고 있는 건가……?’

안 좋은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다.

그사이 케이블카는 남산 타워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이나와 루엔은 케이블카에서 내려 광장이 있는 위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나는 반가운 두 얼굴을 맞이할 수 있었다.

“시현 씨, 도하 씨!”

심각하게 얼굴을 맞대고 있던 시현과 도하가 그녀의 부름에 고개를 홱 돌렸다. 이나를 본 두 사람의 눈빛에 안도감이 퍼졌다.

“이나 씨.”

“무슨 일 없었지?”

“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루엔이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천조 길드장님과 청호 길드장님 맞으시죠? 전 영국에서 온 루크 프리먼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시현이 그가 건네는 손을 맞잡으며 인사를 돌려주었다.

하지만 도하는 떨떠름해하는 낯으로 이나에게 속삭였다.

“생각했던 것보다 멀쩡한데? 진짜 조종당하고 있는 거 맞아?”

“네. 본인 입으로 조종당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끄응. 골치 아프네.”

도하는 곧 자신에게도 악수를 건네는 루엔의 손을 붙잡았다.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루엔은 산 밑에서보다 더 커다랗게 보이는 남산 타워를 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오오! 이게 바로 유이나 씨가 말한 남산 타워군요! 안에 들어가 볼 수도 있나요?”

“네. 전망대에 올라가 보시겠어요?”

“그럼 좋죠!”

이나는 루엔을 데리고 남산 타워 전망대로 올라갔다. 시현과 도하가 그 뒤를 따랐다.

전망대에서도 루엔은 연신 감탄했다. 역시 위쪽 공기가 좋다느니 어쩌고 하면서.

이나는 착잡한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지만 시현과 도하는 달랐다. 두 사람은 언제 루엔의 태도가 바뀔지 몰라 내내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을 힐끗 본 루엔이 이나에게 말했다.

“저 두 사람을 데려왔다는 건, 소피아 님의 거래에 응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겠죠?”

드디어 본모습을 드러내는 건가.

이나는 조금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흠.”

고개를 갸웃한 루엔이 손바닥을 펼쳐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렸다.

“괜찮으시겠어요? 제자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요.”

“쌍둥이는 데려갈 수 없어요. 물론 제 제자도 포기할 수 없고요.”

“욕심쟁이시네.”

루엔이 빙긋 웃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이나에게 건넸다. 그것을 받아 든 이나가 그를 쳐다보았다.

“이건……?”

“소피아 님의 초대장이에요. 거래할 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어요.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 남은 시간 동안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루엔은 활짝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제자를 온전히 되찾고 싶다면 말이죠.”

이나의 얼굴이 굳었다. 다시 한번 그녀를 향해 웃어 보인 루엔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찢더니 그대로 워프해 사라져 버렸다.

깜짝 놀라 다가온 도하와 시현이 그녀에게 물었다.

“뭐야! 어디로 간 거야?”

“이나 씨, 괜찮으십니까?”

이나는 두 사람의 질문에 대답해 줄 정신도 없이 초대장을 펼쳐 보았다. 그곳엔 루엔의 말대로 거래 장소와 시간이 적혀 있었다.

“저녁 여덟 시, 청계천 던전…….”

“가실 겁니까?”

시현이 그녀에게 물었다.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묻어 나왔다.

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초대장을 그대로 찢어 버렸다. 일종의 화풀이였다.

“가야죠. 루엔을 구해 내려면.”

“그 쌍둥이는 어떡할 거야?”

“데려가지 않을 거예요. 던전에는 우리 셋만 가죠.”

이나의 말에 시현과 도하가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시현이 경계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분명 뭔가가 있습니다. 혼자서 저희 셋을 상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렇죠. 그러니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야죠.”

이나의 눈빛이 비장하게 바뀌었다. 어떻게든 루엔과 쌍둥이 모두 구해 내고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리고 일곱 시간 뒤.

세 사람은 거래가 이루어질 청계천 던전으로 향했다.

***

같은 시각, 종로의 한 처소.

한 사람의 그림자가 깜깜한 집 안을 조심스레 누볐다.

바깥에는 처소 안에 있는 이들을 감시하고 보호하기 위해 헌터들이 서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침입을 알지 못했다.

그때 그가 멈칫했다. 조심스레 연 문 안에서 새근새근 숨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군.”

작게 중얼거린 그가 천천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는 두 아이가 누워 있었다. 얼굴이 똑 닮은 두 아이는 쌍둥이, 니나와 유리였다.

그 순간 방의 창문을 통해 달빛이 흘러들어 와 남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무감정한 얼굴로 쌍둥이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는, 이나 일행이 앤드류를 잡아내는 데 협조했던 정신계 마법사 정재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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