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나미가 한바탕하고 지나간 자리엔 그 무엇도 온전히 남아 있지 않았다.
소피아의 티 테이블과 키메라들은 이미 저만치 쓸려 간 뒤였고, 숲의 나무들은 물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전부 꺾여 버렸다.
해변에 남아 있는 거라곤 이나가 보호한 일행들과 루엔뿐이었다.
“……자연재해가 따로 없군요.”
시현이 넋이 나간 얼굴로 망가진 숲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재난 영화 속에서나 보던 광경과 비슷했다.
도하는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아…….”
그때 이나가 한숨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깜짝 놀란 시현이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마력을 너무 많이 소모해서 그래요. 괜찮아요.”
이나의 눈 색은 어느새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와 하나가 되었던 이즈도 원래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이즈, 괜찮아요……?]
[으, 응! 괜찮아.]
[스킬은 어땠어? 응? 응?]
[그, 그게…….]
다른 정령들의 질문 공세에 이즈가 어쩐지 허둥지둥하며 대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흥분이 가득했다.
이나는 피식 웃다가 시현의 부축을 받으며 바닥에 털썩 앉았다. 이나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아 가는 듯하자 시현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이나 씨, 대체 그 스킬은…… 뭡니까?”
“<일체화>. 제가 가진 유일한 L급 스킬이에요.”
시현의 얼굴에 놀라움이 퍼져 나갔다. 같이 듣고 있던 도하가 흥분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일체화>? 그게 어떤 스킬인데?”
“이름 그대로예요. 저와 정령이 하나가 되어 능력을 쓰는 거죠. 그렇게 되면 능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거든요.”
“뭐야. 그런 엄청난 스킬을 왜 지금까지 쓰지 않은 건데?”
“제 수명을 잡아먹거든요.”
이나의 덤덤한 말에 시현과 도하가 뚝 굳어 버렸다. 이나는 딱딱해진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정령과 하나가 된다는 건 제 몸을 일시적으로 자연의 일부로 재구성한다는 뜻이에요. 그만큼 마력 소모도 장난 아니고요. 그런 스킬이 몸에 좋을 리 없잖아요.”
“……쓰지 마.”
“네?”
도하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이나가 고개를 들고 되묻자 도하가 잔뜩 화난 얼굴로 외쳤다.
“쓰지 말라고, 그 스킬!”
“백도하의 말대로입니다. 그 스킬은 정말 위험한 순간이 아닌 한 절대 쓰지 마세요!”
시현도 잔뜩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들이 이렇게 흥분한 모습은 처음 보아서 이나는 얼떨떨해졌다.
그러다 그 반응들이 자신을 걱정하기에 내보이는 반응이란 걸 깨닫고 픽 웃어 버렸다.
“걱정 마세요. 저도 이 스킬을 남발할 생각은 없으니까.”
이나가 그리 답하자 두 사람 모두 안도 어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크윽…….”
그때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나가 고개를 홱 돌리자 대검을 지팡이처럼 쥐고 간신히 서 있는 마르코스가 보였다.
그의 왼팔은 찢겨 나간 것 같은 흔적만 남았을 뿐 보이지 않았다. 머리에서는 피가 물과 섞여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엉망인 몰골에도 그는 흉흉한 눈빛으로 이나를 정확히 노려보았다.
“망할! 죽일 거야. 죽일 거라고……!”
도하가 언월도를 고쳐 쥐고 그를 겨누었다. 도하와 마르코스 모두 지쳐 있었지만 승부의 방향이 도하에게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소피아는 어디 있지?’
루엔이 아직 원래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소피아를 죽이거나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매개체를 없애야 했다.
이나의 마음을 듣기라도 한 것인지 때마침 소피아도 비척거리며 나타났다.
그녀야말로 무사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나타난 걸 보니 키메라의 보호라도 받은 게 아닐까 짐작되었다.
그래도 몸이 완전히 성한 것은 아니었다. 나무에 찔리기라도 했는지 소피아는 피가 새어 나오는 옆구리를 손으로 누르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마르코스와 소피아 모두 이기는 것이 가능했다.
시현과 도하가 눈으로 신호를 주고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하는 마르코스를, 시현은 소피아를 상대하기 위해 무기를 치켜들었다.
“비켜!”
마르코스가 악에 받친 소리를 내며 도하에게 대검을 휘둘렀다. 도하는 가뿐히 그의 검을 받아 내며 말했다.
“우리 대장님께는 못 가.”
‘내가 언제 대장님이 됐지.’
이나는 헛웃음을 터뜨렸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무튼 도하 씨 쪽은 이대로 괜찮을 것 같고.’
문제는 소피아였다. 그녀가 루엔을 조종하고 있으니까.
이나는 소피아와 맞붙기 위해 달려간 시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시현이 소피아 대신 다른 무언가와 싸우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키메라였다.
그런데 그 키메라에게서는 다른 키메라들과 달리 어쩐지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지?’
어딘가 익숙한 기운에 이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소피아가 이를 까득 갈며 중얼거렸다.
“내가 이 방법까진 안 쓰려고 했는데…….”
“무슨 말이지?”
시현이 물었지만 소피아는 대답 없이 키메라를 움직였다. 키메라가 입을 쩍 벌려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크와아앙!”
그 순간 시현이 뒤로 날아갔다. 그가 날아가는 방향에 모래가 일어나 만들어 낸 가시 벽이 있었다.
‘이나 씨……?’
이나의 능력과 닮았지만 아니었다. 이나가 이런 짓을 할 리 없었다.
‘그럼 설마……?’
시현의 눈길이 다시 키메라에게 닿는 순간, 누군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나이스 캐치.”
“……이나 씨.”
리카의 능력을 이용해 공중에서 시현을 낚아챈 이나가 진땀을 흘렸다.
그녀는 시현을 다시 땅에 내려놓았다. 모래사장을 밟은 시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나에게 말했다.
“이나 씨, 저 키메라가…….”
“알아요. 봤어요.”
이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정확히 키메라와 소피아를 향했다.
이나는 앞으로 몇 발짝 나서며 소피아에게 물었다.
“그거 뭐야?”
소피아는 대답 없이 그저 미소만 지었다. 아까처럼 여유로운 미소는 아니었지만 이나를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그에 이나가 눈살을 찌푸리는데, 뒤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아……아아……!”
“루엔?”
지금껏 아무 반응 없던 루엔이 갑자기 괴로운 듯 머리를 쥐어뜯었다.
당황하며 그쪽을 쳐다보던 이나가 고개를 홱 돌려 소피아를 노려보았다.
“루엔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아무 짓도요.”
소피아가 어깨를 으쓱했다. 물론 이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나가 루엔에게 가 봐야 하나 고민하는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네움?”
정령들 중에서도 가장 말이 없는 정령 네움이 몸을 떨고 있었다.
네움뿐만이 아니었다. 이즈도, 리카도, 다른 정령들 모두 아연한 얼굴로 키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어 이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왜 그래?”
[이나야…….]
가장 먼저 말문을 뗀 것은 이즈였다. 이즈가 키메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령의 힘이 느껴져.]
“……뭐?”
[틀림없어. 저 몬스터, 정령을 삼켰어. 아니, 정령과 하나가 되었어.]
이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것을 본 소피아가 깔깔 웃기 시작했다.
“설마 이제야 눈치챈 거예요? 정령사라면서 알아채는 게 정말 느리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별거 아니에요. 제 특성이 키메라 제작자라고 했죠? 그래서 키메라와 융합시킬 무언가를 찾다가 정령을 발견했을 뿐이에요.”
소피아는 당시의 일을 떠올리며 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엔 정령의 알을 가지고 시도하려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방법이 없나 고민하던 차에 우리의 신께서 당신의 제자를 보내셨죠. 마침 또 정령사이지 뭐예요?”
“…….”
“그래서 정령을 슬쩍해서 다른 정령의 알과 함께 키메라와 융합시켰어요. 그랬더니 당신 앞에 있는 이 키메라가 만들어졌죠. 확실히 결과물이 다르죠?”
이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분노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나야.]
이즈가 이나의 손을 잡았다. 그녀를 올려다보는 이즈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저 안의 친구들이 괴로워하고 있어.]
“…….”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이나는 주먹을 풀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눈을 감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눈을 떴다.
그녀는 이즈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뭐라도 해 보자. 친구들이 괴로워하지 않도록.”
[……응!]
이즈가 눈물을 닦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이나는 시현을 돌아보았다.
“시현 씨, 저 키메라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어요?”
“뭘 하시려는 겁니까?”
시현의 물음에 이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뭐라도 해 보려고요.”
시현은 이나의 속내를 읽으려는 듯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엄호하겠습니다.”
“고마워요.”
짧게 인사한 뒤 이나는 키메라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키메라는 그녀를 공격하려 했지만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무언가를 느끼고 재빨리 뒤로 피했다.
키메라가 서 있던 자리가 검기로 인해 깊이 패어 있었다.
“여기다!”
시현이 재차 검기를 두른 검을 키메라에게 휘둘렀다.
키메라는 이리저리 피하다 시현과 가까워진 틈을 타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아까처럼 바람으로 그를 날려 버렸다.
“크와아앙!”
“크윽……!”
시현은 피할 틈도 없이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시선은 정확히 키메라의 위를 향하고 있었다.
“이나 씨, 지금입니다!”
“알아요!”
키메라가 위를 올려다보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잡았다!”
이나가 키메라의 위에 올라타 갈기를 붙잡았다. 그러자 키메라가 몸부림을 치며 이나를 떼어 내려 했다.
이나는 그 와중에도 절대 갈기를 놓치지 않고 버텼다. 그리고 자신의 남은 마력을 가늠해 보았다.
‘조금 위험하긴 하지만.’
눈을 질끈 감은 이나가 외쳤다.
“<일체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