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8화 (118/149)

이젠 이판사판이었다.

이나가 스킬을 발동하자 시스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해당 정령은 계약 정령이 아닙니다.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해당 정령과 계약이 가능합니다. 계약을 요청하시겠습니까?⌟

그래도 다행히 이 키메라를 정령으로 봐 주는구나.

이나는 안도했다.

루엔의 정령이 섞여 있긴 했지만 정령이라고 해서 여러 정령사와 계약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 하지 않는 것뿐.

이나가 고개를 마구 끄덕이자 시스템 창이 다시 떠올랐다.

⌜계약을 요청하셨습니다.⌟

그러자 키메라의 움직임이 뚝 멈추었다. 키메라는 시스템 창을 보는 듯 허공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나는 조금 긴장했다. 계약을 원하는 정령들의 습성을 믿고 무작정 지르긴 했지만 과연 이 키메라가 계약을 받아들일지 걱정이 된 탓이었다.

잠시 후 이나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정령 ‘???’가 계약을 수락했습니다.⌟

그 순간 이나는 자신과 키메라 사이에 연결된 무언가를 느꼈다.

키메라는 이제 그녀의 말을 잘 따랐다. 이나를 안전하게 땅에 내려놓고 그 앞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그러자 소피아가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뭐 하는 거야! 당장 안 일어나? 공격하란 말이야!”

“끄응…….”

키메라가 신음을 흘렸다. 계약자인 이나와 주인인 소피아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괴로운 듯했다.

그리고 이나는 느낄 수 있었다. 이 키메라와 융합된 정령들이 얼마나 괴로워하는지.

지금도 그녀에게 외치고 있으니까.

[괴로워.]

[살려 줘.]

[여기서 나가고 싶어.]

[제발 누가 좀…….]

이나는 제가 다 아픈 얼굴로 키메라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키메라가 이나를 바라보았다.

이나는 괴로워하는 얼굴 위로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많이 힘들었지? 이제 그만 나가자.”

“…….”

키메라는 신음을 멈추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 마음을 다잡았다.

“<일체화>.”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즈나 다른 정령들도 몇 개월간 꾸준히 감응도를 올린 덕에 이제야 <일체화> 스킬을 쓸 수 있었다.

이제 막 계약한 정령이 그녀와의 감응도가 좋을 리 없었다.

이나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여차하면 키메라를 죽임으로써 정령들에게 안식을 주는 방법도 생각했다.

그런데.

⌜<일체화(L)> 스킬을 발동합니다.

대상: ???⌟

놀랍게도 기적이 일어났다.

이나는 내심 놀랐지만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쿨럭!”

“이나 씨!”

뒤에서 시현의 경악한 외침이 들렸다.

이미 앞서 사용한 <일체화> 스킬로 마력이 부족했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스킬을 발동시키니 코어의 과부하로 인해 내상을 입는 것이 당연했다.

이나는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여기서 무너지면 이 정령들을 구제할 수 없으니까.

이나는 오직 그 생각으로 버텼다.

그리고 마침내 이나는 키메라 안의 정령들과 공명할 수 있게 되었다.

“헉…….”

이나는 숨을 훅 들이마셨다. 머릿속으로 정령들의 기억과 감정이 밀려들어 온 탓이었다.

[싫어! 그만둬!]

[아아아악!]

키메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정령들이 느낀 공포, 괴로움, 그리고 절망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이나는 그 기억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난 정령들을 위로해 주기 위해 이 스킬을 사용한 거야.’

이렇게 먹히려고 온 게 아니라.

이제야 정령들과 <일체화> 스킬이 가능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정령들의 마음이 강해 유일한 희망인 그녀와의 감응도가 강제로 끌어올려진 듯했다.

만약에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도와줘야지.’

해야 할 일의 방향이 서자 이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많이…… 힘들었지.”

여전히 머릿속이 혼란했지만 이나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이제 괜찮아.”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전부 괜찮을 거야.”

“이나 씨!”

그때 시현의 목소리가 귀를 강타했다.

이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쓰러져 있는 자신을 받치고 있는 시현이 보였다.

잔뜩 굳은 얼굴의 그는 이나가 눈을 뜨자 눈에 띄게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키메라…… 정령들은…….”

띄엄띄엄 말을 잇던 이나는 다음 순간 허공에 떠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정령들이었다. 그녀의 정령들이 아닌, 키메라와 융합되었던 정령들.

아무래도 그녀의 작전이 성공한 모양이었다.

<일체화>는 정령과 하나가 되는 스킬. 정확히 말하면 정령을 그녀의 몸 안으로 끌어 들여 그녀 본인이 자연 그 자체가 되는 스킬이었다.

그래서 몸에 부담이 크게 오는 것이고.

이나는 상대 정령을 계약자의 몸 안으로 끌어 들이는 이 스킬을 통해 키메라에게서 정령들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하지만 분리된 정령들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졌다. 이나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정령의 죽음. 즉, 소멸이었다.

[고마워.]

그럼에도 정령들은 웃고 있었다. 사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나는 정령들이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나야…….]

[이나 님…….]

그녀의 정령들이 훌쩍거리며 다가왔다. 이나가 소멸된 정령들과 일체화 스킬을 사용하면서 다른 정령들도 그녀와 같은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정령들의 슬픔이 고스란히 그녀의 가슴으로 전해졌다. 결국 이나는 참지 못하고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이나 씨…….”

시현이 뭐라고 위로라도 해 주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흐윽…….”

이나가 그의 품 안으로 스스로 들어온 탓이었다.

시현은 순간 굳어 버렸지만 이내 팔을 움직여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럴수록 이나의 흐느낌은 더욱 격렬해졌다.

하지만 이것이 이나에게 있어 그 어떤 위로보다도 더 위로가 된다는 것을 알기에 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키메라! 감히 내 걸작을 이렇게 망가뜨리다니!”

시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소피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정령과 분리되어 죽어 버린 키메라 앞에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그러다 시현과 눈이 마주치자 소피아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가만두지 않겠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시현은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이나를 계속 붙잡고 있기엔 소피아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고, 그렇다고 소피아를 상대하자니 이나가 걱정이었다.

그때 이나가 눈을 비비며 그의 가슴을 살짝 밀어냈다.

“이제 괜찮아요.”

“이나 씨.”

시현이 걱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이나는 살포시 웃은 뒤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게 다가오는 소피아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키메라보다 네 걱정이나 하시지.”

“뭐?”

소피아가 분노를 못 이기고 이나에게 달려들었다.

금방이라도 이나의 목을 조를 듯해 시현이 경계했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

“컥……!”

이나에게 달려들던 소피아가 갑자기 신음과 함께 제 목을 부여잡았기 때문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시현이 눈을 치켜떴다. 그의 귀로 이나의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정령들의 미움을 받고도 무사할 줄 알았어?”

시현의 눈에 이나의 정령들이 보였다. 정령들은 하나같이 분노한 얼굴로 소피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시현은 깨달았다.

정령은 자연. 그리고 자연을 분노케 한 세상은 멸망의 길을 걸을 뿐이었다.

바로 눈앞의 소피아처럼.

소피아의 윤기 나던 피부에서 수분이 빠져나가 전신이 바짝 말라 갔다. 뿐만 아니라 체온도 점점 떨어져 갔다.

숨을 잃어 꺽꺽거리는 입에서 힘겨운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사, 살려…….”

털썩-

소피아의 바짝 마른 몸이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그리고 땅에 삼켜져 그대로 흩어졌다.

흔적조차 남지 않은 허망한 최후였다.

이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아직 물기가 남아 있는 눈을 벅벅 문질렀다.

“젠장. 저 인간 때문에 괜한 거나 보고 말이야.”

“그렇게 비비다 상처 납니다.”

시현이 이나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러다 이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이나는 얼굴을 화악 붉히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나 씨?”

“……보지 마세요.”

“네?”

“창피하니까 보지 말라고요! 엄청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는데.”

시현은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예쁩니다.”

“……취향 참 이상하시네.”

“취향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그런걸요.”

“하아…….”

이나는 쑥스러운 기분이 가득 담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도 다시 얼굴을 보여 주어 다행이라고 시현은 생각했다.

시현의 웃는 얼굴과 마주한 이나는 여전히 붉은 얼굴로 도하 쪽을 가리켰다.

“저쪽도 마무리된 모양이에요. 이만 갈까요?”

“그러죠.”

***

깊은 새벽, 정재원은 계단을 올라 어느 건물의 옥상으로 향했다.

잠겨 있어야 할 옥상 문이 그의 손에 의해 쉽게 열렸다. 문을 열고 나가자 먼저 도착해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새까만 머리칼이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살랑살랑 나부꼈다. 평화로운 모습과 달리 그의 뒷모습에서는 거대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정재원은 그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길드장님, 명하신 대로 행했습니다.”

“수고했다.”

명령에 따른 보상은 그 한마디로 끝이었다. 하지만 정재원은 그 이상 욕심부리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남자가 고개를 스윽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감정 없는 눈동자가 정재원을 지그시 담아냈다.

“궁금한가?”

“……실언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재원의 사과에 남자가 싱긋 웃었다. 부드러운 인상과 달리 서늘한 미소였다.

그는 다시 서울의 야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이제 나도 슬슬 나서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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