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3화 (123/149)

“아무래도 저것인 것 같죠?”

한주원이 웃는 얼굴로 이나에게 물었다. 이나는 찝찝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표가 정해지자 시현이 검기를 두른 검을 꺼내며 앞으로 나섰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저도…….”

이나도 그를 따라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려고 했다. 그런데 한주원이 그녀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저 정도는 천조 길드장의 힘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건 알지만, 다가올 하드 모드를 위해서라도 힘을 비축해 놓는 편이 좋잖아요.”

이나의 반박에 한주원은 조금 황당하다는 투로 말했다.

“가만 보니 이나 씨도 자기 사람을 과보호하려는 경향이 있군요.”

“무슨 말이에요?”

“천조 길드장은 보호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천조 길드장에게 저 몬스터는 준비 운동 수준일걸요?”

쾅!

때마침 굉음이 필드를 울리자 이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검기가 어린 시현의 검이 보스 몬스터의 바위 집을 강타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검기가 몬스터의 크기만큼이나 거대했다.

이나는 옆에서 한주원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예전보다 더 강해진 것 같군요.”

“……그러게요.”

이나도 그 말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시현도 그동안 많은 전투 경험을 치렀다. 게다가 K라는 막강한 적과 싸우기도 했다.

아마 그 경험들이 알게 모르게 시현의 몸에 스며들었을 것이고, 그동안 모은 SP도 있으니 이나처럼 그걸로 더 강해졌을 터였다.

시현의 거대 검기를 제대로 맞은 바위 집이 갈라지며 검기가 몬스터의 몸을 반으로 갈랐다. 아무리 A급 몬스터라지만 S급 헌터 앞에서는 허무한 결말을 맞지 않을 수 없었다.

쿵-

반으로 갈라진 바위 집과 몬스터의 시체가 땅에 쓰러졌다. 시현도 사뿐하게 착지하고는 바위 집에 붙어 있던 마정석을 떼어 냈다.

“가져왔습니다.”

숨 한번 흐트러지지 않고 달려온 그를 이나가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나 씨?”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나는 고개를 저으며 마정석을 건네받았다.

옆에 있던 한주원이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이나 씨가 천조 길드장에게 반한 모양인데요?”

“……네?”

그 말에 시현의 얼굴이 벌게졌다. 가만히 있다 같이 공격당한 이나도 뺨을 붉히며 소리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조용히 해요!”

시현은 멈칫하며 이나를 돌아보았다.

이나라면 ‘그런 거 아니거든요?’라며 태연하게 부정할 거라 생각한 탓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반응이 격하고, 부정도 하지 않았다.

마치 한주원의 말에 찔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시현은 그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가능하면 이나와 단둘이 있을 때 묻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더 중요한 것이 남아 있었다.

이나도 한숨과 함께 평소의 텐션으로 돌아오고는 한주원이 발견한 홈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홈의 모양과 마정석의 모양을 비교해 보니 역시나 크기도 모양도 똑같았다.

이제 남은 것은 한주원의 앞에서 하드 모드를 증명하고 공략하는 일뿐이었다.

“둘 다 준비됐죠?”

이나가 뒤를 힐끗 보며 물었다. 시현도 한주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덜컥-

이나는 홈 위에 마정석을 올렸다.

그러자 이변이 일어났다.

쿠구구구-

땅이 진동하며 그들이 있던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땅 밑에 무언가가 있다고 네움에게서 들어 그것까지는 예상 범위 안이었다.

갈라진 땅 틈에서 무언가가 올라왔다. 그것은 마치 어느 의식에서 볼 법한 제단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제단 가운데에는 거대한 항아리가 있었다.

[이나야!]

때마침 화산 근처를 탐색하러 갔던 리카가 돌아왔다. 어쩐지 다급하게 날아온 듯한 모습에 이나가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 그게…… 화산이 이상해!]

“이상하다고?”

[응! 막 공기가 뜨거워지고,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리카의 말을 듣던 이나의 얼굴이 굳었다.

‘설마 하긴 했지만.’

고개를 돌리자 시현도 표정이 심각하게 변해 있었다.

오직 한주원만이 침착하게 손가락으로 제단 위를 가리켰다.

“두 분 다 저걸 보시죠.”

한주원이 가리킨 방향을 보자 제단 위 항아리에서 무언가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붉게 빛나며 흐르는 그것은 용암이었다.

항아리에서 흘러넘쳐 제단을 적시던 용암은 이윽고 하나로 뭉쳐지더니 점점 위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이내 5m를 훌쩍 넘는 거인의 형태가 만들어졌고, 주변 바위들이 피부처럼 그 위를 감쌌다.

“우워어어!”

불길한 울음소리와 함께 이나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A급 던전 ‘화산의 주인’의 하드 모드가 시작되었습니다.⌟

“……정말 하드 모드란 게 존재했군요.”

이나가 한 말이었기에 믿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직접 경험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시현은 긴장 어린 얼굴로 용암으로 이루어진 거인을 노려보았다. A급 던전의 하드 모드이니 저 몬스터의 등급은 최소 S급일 터.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이나도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수사관님 앞에서 증명도 해 보였겠다, 바로 해치우자고요.”

“좋습니다.”

이나의 말에 동조한 시현이 검에 검기를 씌우고 달려 나갔다. 망설임 없는 뒷모습에서 이나가 뒤에서 서포트를 해 줄 거라는 믿음이 느껴졌다.

그의 예상대로 이나는 이즈의 능력을 이용해 비를 내렸다. 용암으로 이루어진 거인이니 이 비에 순식간에 굳어 버릴 거라 생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거인의 피부에 조각조각 붙어 있는 돌들이 스르륵 움직이더니 용암이 보이던 틈새를 전부 막아 버렸다. 그 탓에 비가 그 안으로 스며들지 못했다.

“괜히 하드 모드 몬스터가 아니네.”

눈살을 찌푸린 이나가 비를 멈추었다. 그러자 기세등등해진 거인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시현에게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쾅!

시현의 검과 거인의 주먹이 맞부딪쳤다. 거인의 힘이 만만치 않은지 몸을 지탱하던 시현의 왼쪽 발이 뒤로 살짝 밀려났다.

“그래도 마르코스에 비하면…….”

그렇게 중얼거리던 시현이 거인의 주먹을 받아 낸 상태로 오러를 일으켰다.

오러가 부피를 키울수록 그것에 닿은 거인의 주먹이 파슷 깎여 나갔다.

결국 거인이 주먹을 거두자 시현이 검기를 씌운 상태로 검을 휘둘렀다.

콰과각!

거인의 가슴팍이 깎여 나갔다. 그리고 시현은 그 틈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붉게 빛나는 주먹만 한 보석이 거인의 가슴팍에 박혀 있었다.

“저게 약점인가.”

시현의 눈빛이 잘 벼려진 검처럼 빛났다. 그는 곧바로 그 보석을 향해 검을 찔러 넣으려 했다.

“윽……!”

그 순간 거인의 몸에서 용암이 튀어져 나왔다.

때마침 리카가 바람을 일으켜 시현은 재빨리 뒤로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옷이 상하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시현이 용암에 닿아 활활 타오르는 겉옷을 집어 던지자 뒤에서 이나가 물었다.

“시현 씨, 괜찮아요?”

“화상을 조금 입은 것 같지만 괜찮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방어하는 걸 보니 저 보석이 약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방심하지 마요. 저놈의 몸을 이루고 있는 건 돌이 아니라 용암이니까요.”

시현은 이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재차 그를 향해 달려오는 거인을 상대했다.

그래도 아까 그 공격으로 거인의 약점은 알아낸 차였다. 이나와 시현은 함께 그 약점을 공략해 나갔다.

그것을 느꼈는지 거인의 움직임이 소극적으로 변했다. 공격보다는 방어 위주로.

그런 적을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시현은 거침없이 공격을 가하며 다시 한번 거인의 가슴팍을 도려냈다. 그리고 약점인 붉은 보석이 다시 보인 순간, 그는 이번엔 오러를 날려 보석을 부수려 했다.

“끝났네.”

그 모습을 보던 이나가 중얼거렸다. 이제 시현의 오러 한 방이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그런데.

“……!”

“시현 씨?”

시현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 틈을 몬스터가 놓칠 리 없었다. 거인은 거대한 입을 벌려 그대로 시현을 집어삼키려 했다.

이나는 그 모습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시현 씨!”

***

한주원은 이나와 시현이 거인과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전투의 방향은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손쉽게 하드 모드를 공략할 수 있을 터.

그리고 밖으로 나가 진사 길드장의 거짓 진술과 하드 모드의 존재에 대해 알리면 강일우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원하는 엔딩이 아니지.’

한주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그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주원은 시현이 몬스터를 무너뜨리기 전, 슬쩍 손을 썼다.

“……!”

시현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주원이 시현의 그림자를 움직여 그의 몸을 붙잡았으니까.

그림자는 속성으로 따지면 어둠에 속했다. 어둠을 다룰 수 있는 스킬을 가진 그에게 있어 그림자로 몸을 묶는 건 아주 손쉬운 구속 방법이었다.

“시현 씨!”

몬스터가 입을 벌려 시현을 집어삼켰다. 그러자 옆에 있던 그의 목표, 이나가 경악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것으로 이 던전에 남은 것은 그와 그녀뿐이었다.

시현이 있었다면 이 대 일로 조금 귀찮았겠지만, 그녀 혼자라면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한주원은 그녀에게 다가서며 한 손에 어둠을 감쌌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이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나 씨, 천조 길드장은 괜찮을 겁니다.”

그는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며 어둠으로 감싼 손을 그녀에게로 뻗었다.

방심하고 있는 이때 이대로 기습하면…….

“네. 괜찮을 거예요.”

한주원은 그대로 멈칫했다.

태연한 목소리. 그의 예상에 없던 반응이었다.

그때 이나가 제 어깨 위에 올라온 한주원의 손을 붙잡았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강한 힘을 주며.

“이제 본색을 드러낼 마음이 생겼나 보죠?”

이나가 고개를 돌려 한주원과 눈을 맞추었다. 그의 눈동자에 이나의 웃는 얼굴이 비쳤다.

다 알고 있는 듯한, 그를 꿰뚫어 보는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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