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아를 찾아 청계천 던전으로 들어가기 전, 이나 일행은 한자리에 모였다.
서준은 갑작스레 자신을 찾아온 이나와 시현, 그리고 도하를 보며 물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어쩐 일인가요?”
“서준 씨, 저희 곧 청계천 던전으로 들어가서 소피아와 담판을 짓고 올 거예요.”
이나의 말에 서준이 놀란 눈을 치켜떴다.
“……일단 자리에 앉아서 얘기하죠.”
그들은 서준이 권한 자리에 마주 보고 앉았다.
그리고 이나는 루엔이 그녀를 찾아온 것, 소피아가 그들을 초대한 것까지 전부 설명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준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함정일 가능성이 크겠군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하지만 이나 씨는 가시겠죠.”
서준이 이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그에 이나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죠. 루엔을 구해 내려면.”
“일단 어떻게 된 상황인지는 잘 알겠습니다. 제가 뭔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네. 있어요.”
이나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날카로워진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쌍둥이를 지켜 주세요.”
“그거야 당연한 일이죠.”
“아뇨. 제가 말한 것은 단순히 경비를 늘리는 일 같은 게 아니에요.”
서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나는 펼친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며 말을 이었다.
“앤드류도 죽고, 헌터 협회 전남 지부의 성수일 헌터도 죽었어요. 그것도 저희가 그 사람들을 통해 정보를 얻으려 할 때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서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나가 말하려는 바를 눈치챈 탓이었다.
이나는 그가 생각하는 것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 K, 혹은 그들의 스파이가 있어요. 그것도 우리와 꽤 가까운 곳에.”
“……그건 좀, 충격적이군요.”
서준이 한숨을 삼키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나는 안 그래도 바쁜 그에게 일거리와 충격을 던져 준 것 같아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할 말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누군진 몰라도 놈은 저희가 청계천 던전에 들어가 신경을 못 쓰는 동안 쌍둥이를 없애려 할 거예요. 그러니 우린 그걸 노리죠.”
“노린다고요?”
“놈이 쌍둥이를 없애려 할 때, 놈을 잡는 거예요.”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스파이가 한 명이 아니라면요?”
“맞습니다. 스파이가 여러 명이라면 다른 스파이가 남아 있는 한 쌍둥이의 목숨이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시현도 서준의 말에 동조하며 말을 덧붙였다.
그들과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기에 이나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말이 맞아요. 그러니 놈을 잡되, 풀어 주는 거예요.”
“……풀어 준다고요?”
“네. 정확히는 최면을 걸어서 말이죠.”
“최면? 무슨 최면?”
도하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끼어들었다.
이나는 그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작전을 설명했다.
“놈을 붙잡아서 쌍둥이의 능력을 이용해 최면을 거는 거예요. 쌍둥이를 죽이고 임무를 완수했다는 최면을. 그리고 도청 장치와 위치 추적기를 몸에 숨겨서 돌려보내는 거죠. 그럼 자연스레 놈들이 있는 곳을 알 수 있지 않겠어요?”
“확실히 그렇게 하면 쌍둥이도 무사하고 놈들도 잡을 수 있겠군요.”
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시현도 마찬가지였다.
결정이 끝나자 계획은 빠르게 세워졌다.
그리고 그날 밤.
푹-
“윽……!”
서준은 이나와 짠 작전대로 쌍둥이의 처소에서 다른 헌터들과 함께 정재원을 붙잡았다.
서준은 얼굴을 아는 이가 이런 일을 행했다는 사실에 배신감과 실망감을 느꼈지만 작전대로 행동했다.
그 결과.
[길드장님, 명하신 대로 행했습니다.]
[수고했다.]
“……무명 길드장?”
한주원이 스파이라는 사실을 청계천 던전에서 돌아온 이나 일행에게 전할 수 있었다.
충격에 휩싸인 분위기 속에서 이나가 조용히 읊조렸다.
“뭔가 수상하다 싶긴 했지만…….”
“젠장! 그 망할 자식, 내가 당장 가서……!”
도하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 하자 시현이 그를 붙잡았다.
“그만둬. 지금 찾아가서 싸워서야 조용히 작전을 수행한 의미가 없어. 그랬다간 오히려 귀찮아지는 건 우리야.”
“그럼 이대로 두고만 보자고?”
도하가 시현을 노려보았다. 분위기가 험악해지려 하자 결국 이나가 나섰다.
“둘 다 그만해요. 도하 씨도 진정하고요.”
“쳇.”
도하가 불만 어린 얼굴로 털썩 자리에 앉았다.
병실이 조용해지자 이나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두 사람 말 모두 동의해요.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서울 한복판에서 싸울 수도 없죠.”
“그럼 어떻게 해야…….”
서준이 난감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에 이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던전으로 끌고 가죠. 그곳에서라면 피해 볼 사람도 없으니 다들 온 힘을 다해 싸울 수 있을 테니까요. 싸울 타이밍을 잡기 전까진 정체를 모르는 척하고요.”
“던전으로 끌고 들어가자마자 싸우는 거야?”
“아마 그렇게 될 거예요. 이제 남은 K는 무명 길드장을 포함해 두 명뿐이니까요. 티는 내지 않아도 분명 초조할걸요? 우리끼리 던전에 들어가면 분명 본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을 거예요.”
“무명 길드장이 던전에 들어가려 할까요?”
서준이 묻자 이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줘야겠죠. 이건 좀 더 생각해 봐야겠지만요.”
이후 일은 각자 생각해 보기로 하고 그들은 휴식을 위해 일단 흩어지기로 했다.
그런데 예상외로 한주원이 먼저 그들을 찾아왔다.
그와 함께 던전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이나는 시현과 눈을 마주쳤다.
아무래도 지금이 적기인 것 같았다.
***
한주원은 멍한 얼굴로 이나를 응시했다.
“그러니까, 다 알고 있었다고?”
“그래.”
본색을 드러낸 한주원이 원래 말투로 돌아오자 이나도 거리낌 없이 말을 놓았다.
그러면서 그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보아하니 최현호도 네 부하인 것 같은데, 맞지? 강일우 헌터를 곤경에 처하게 만들어 도하 씨를 우리와 떨어뜨려 놓으려고 그런 거잖아.”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었을 때, 이나는 곧바로 최현호와 한주원을 연관 지었다.
한주원이 하드 모드를 어떻게 알고 있었냐는 것은 문제 되지 않았다. 한주원이 K라면 뒤에 칼릭스가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미심쩍었던 부분들이 퍼즐처럼 딱딱 들어맞았다.
그리고 그건 정답이었다. 모든 것이 이나와 시현만을 던전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그가 짠 계획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사람도 같은 계획이었다는 것이었다.
“우워어어……!”
그때 용암 거인이 고통에 찬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거의 동시에 무언가가 거인의 배를 뚫고 밖으로 나왔다. 거인에게 집어삼켜졌던 시현이었다.
용암으로 인해 뼈까지 녹아 버렸어야 했을 시현은 한주원의 예상과 달리 멀쩡했다.
그것도 손에 거인의 약점인 붉은 보석을 쥔 채로.
자세히 보니 시현의 옆에 푸른빛으로 빛나는 정령이 있었다. 아무래도 정령이 시현을 도운 모양이었다.
“자, 이제 어떡할래?”
한주원이 고개를 내렸다. 이나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대로 얌전히 감옥 갈래? 아니면, 역시 싸울 건가?”
때마침 다가온 시현이 분위기를 읽고 한주원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었다.
한주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건 예상에 없었는데 말이지.”
“순순히 항복해.”
“그건 좀 곤란해서.”
그 순간 이나는 자신의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시선을 내리자 웬 그림자가 그녀의 몸을 붙잡고 있었다.
시현에게도 썼던 한주원의 능력이었다.
한주원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빨리 싸우게 될 줄은 몰랐지만, 한번 해 보지.”
“기어코 하겠다는 거군.”
이나의 낯이 서늘하게 변했다. 동시에 한주원을 향해 벼락이 쏟아졌다.
콰광!
한주원은 뒤로 가볍게 점프해 벼락을 피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검을 꺼내 날아오는 얼음 송곳을 쳐 냈다.
그러느라 그림자를 유지할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이나와 마찬가지로 그림자에 묶였던 시현이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시현은 얼른 한주원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챙! 채앵-
시현의 새하얀 오러가 덧씌워진 검이 한주원의 검과 맞부딪쳤다. 한주원의 검 위에도 시현의 검기와 비슷한 어둠이 은은하게 깔려 있었다.
흑과 백의 대비. 하지만 그 위력은 시현 쪽이 좀 더 강했다.
쩍-
한주원의 검에 금이 갔다. 역시 어둠을 다루는 마법만으론 검기를 상대하기 벅찬 모양이었다.
한주원은 눈살을 찡그리다가 이어서 날아오는 얼음 송곳을 쳐 냈다. 두 사람을 동시에 상대하기는 조금 힘들었다.
‘이래서 이시현을 먼저 죽이려고 한 건데.’
하지만 늦어 버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시현이 한주원의 배에 발차기를 날렸다. 때마침 이나가 바람으로 화산재를 모아 그에게 날린 상태였다. 시야가 가려져 주춤한 탓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시현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뒤로 날아간 한주원은 안전하게 착지 후 입에 고인 피를 뱉었다.
[도와줄까?]
그때 그의 머릿속에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들렸다.
한주원은 멈칫하며 목소리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다 이나와 시현이 가까이 다가오자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분께서 이만하고 도망이나 가라시는군.”
“칼릭스가?”
그의 말을 알아들은 이나가 미간을 구겼다.
칼릭스가 언급되자 이나는 곧바로 그를 포박하려 했다. 도망치게 두지 않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칼릭스가 좀 더 빨랐다.
한주원의 발밑에 검은 게이트가 생겼다. 그것이 한주원의 몸을 끌어당겼다.
한주원은 게이트 속으로 사라지며 이나와 시현에게 말했다.
“그럼 다음에 보지, 두 사람.”
“그때가 네 제삿날이 될 거야.”
이나가 얼굴을 팍 구기며 말했다. 칼릭스가 나선 이상 그를 데려갈 수 없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었다.
결국 한주원은 게이트 너머로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진 몰라도 아마 그들과 마주칠 수 있는 곳은 아닐 터였다.
게이트가 완전히 사라지자 시현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놓치다니…….”
“그래도 밖에 나가서 이 일을 알리면 적어도 한주원이 활개를 치고 다니진 못할 거예요. 그보다 이제 우리도 하드 모드를 열었던 마정석과 몬스터의 보석을 가지고 나가죠. 그 두 개라면 하드 모드를 증명할 수 있을 거예요.”
이나는 조금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마르코스와 소피아와의 전투 이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치른 전투였다. 지칠 만도 했다.
시현은 이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이나가 의아해하며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업히세요.”
“네?”
“피곤하시지 않습니까.”
“됐어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리고 시현 씨도 피곤할 거 아니에요.”
“저는 원래 몸을 쓰는 사람이라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이나는 갈등하다가 결국 시현의 등에 올라탔다.
그녀를 들어 올린 시현이 눈살을 찡그렸다.
“너무 가볍습니다. 평소에 식사는 제대로 하시는 겁니까?”
“어음…….”
“제대로 안 하시는군요.”
“그치만 먹기 귀찮을 때도 있는 거고…….”
“그래도 끼니는 챙겨 먹어야 합니다.”
“네, 네.”
이나는 대충 대답하며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시현은 순간 움찔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열린 게이트로 걸어갔다.
“……이나 씨.”
“네.”
“모든 일이 끝나면,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시현은 괜히 초조해져서 물었다.
“해도…… 되겠습니까?”
“다행이네요.”
“네?”
“저도 있거든요, 그런 말.”
이나는 시현의 넓은 등에 고개를 파묻었다. 시현의 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끼며 이나는 작게 다음 말을 꺼냈다.
“같이 하면 되겠네요.”
“……그렇군요.”
시현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끊겼다.
게이트 밖으로 나가자 어느새 하늘은 깜깜하게 변해 있었다.
그때 타이밍 좋게도 이나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 위로 서준의 이름이 나타났다.
무슨 일 있나 싶어 이나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 서준이 다급하게 말했다.
[이나 씨, 루엔 씨가 깨어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