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149)

한주원은 대답 없이 사무엘의 연구실을 훑더니 말을 툭 던졌다.

“여전히 정신없는 공간이군.”

“남이사. 그래서 여긴 어쩐 일이야?”

“그분이 날 여기로 보내셨다. 너의 도움이라도 받으라는 뜻 같은데.”

“하지만 넌 그럴 생각이 없겠지.”

“잘 아는군.”

한주원의 대답에 사무엘이 양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걱정 마. 나도 너와 같이 움직일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그거 다행이군.”

“대신 도움은 좀 받았으면 하는데.”

“어떤?”

사무엘은 근처에 놓여 있던 지도를 촤르륵 펼쳐 보였다.

그것은 한국, 그것도 서울의 지도였다.

“서울에서 인파가 많이 몰리는 곳 좀 짚어 줘.”

***

이나와 시현이 던전에서 나오고 한국은 난리가 났다. 무명 길드장 한주원의 실종, 그리고 하드 모드의 존재 때문이었다.

하드 모드에 대한 정보는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 퍼졌다. 위험하기도 위험했지만, 던전의 새로운 발견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한주원이 이나와 시현을 죽이려 했다는 것은 굳이 알리지 않았다. 증거도 없을뿐더러 K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져 시민들이 불안에 떠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것으로 한주원은 한국에서 쉽게 설치지 못할 터였다. 모습을 드러냈다간 단번에 이목이 쏠릴 테니.

그리고 협회는 공략 명단 조작과 더불어 거짓 진술을 한 진사 길드장에게 형벌을 내렸다.

그 결과.

“다행이에요. 혐의가 풀려서.”

이나가 마침 수용소에서 나오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강일우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자 강일우는 곧장 풀려났다. 다만 요 며칠 마음고생을 심하게 해서인지 얼굴이 초췌했다.

그는 이나와 시현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며 말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유이나 헌터님, 그리고 천조 길드장님.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닌데…….”

이나는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왠지 좀 쑥스러웠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도하의 다음 행동이었다.

“고맙다, 유이나. ……그리고 이시현. 덕분에 한시름 놨어.”

이나와 시현이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도하가, 이나는 그렇다 치고 시현에게도 감사 인사를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이나는 괜히 그를 놀리고 싶어졌다.

“이야. 천하의 청호 길드장께서 천조 길드장에게 고맙다고도 다 하시고.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드디어 철이 든 걸까요.”

“이것들이 진짜!”

시현까지 거들자 결국 도하가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이나는 킥킥 웃으며 그를 진정시켰다. 도하는 한참 씩씩거리다가 숨을 길게 내뱉으며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그가 진정한 것처럼 보이자 이나가 그에게 물었다.

“도하 씨, 저희 루엔 보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난 패스. 이 녀석 때문에 꼬인 일 처리하러 가야 해서.”

도하가 강일우의 어깨 위에 팔을 턱 얹으며 말했다. 그에 강일우가 민망해하며 미소를 지었다.

이나는 아쉽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 시현에게 재차 속삭였다.

“천하의 청호 길드장이 일을 다 하려고 하고. 역시 철이 들었…….”

“야!”

결국 도하가 폭발하자 이나는 시현을 데리고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아쉽네요. 루엔에게 치킨 맛을 알려 줄 겸 다 같이 모여서 식사나 할까 했더니.”

“그래도 김 비서님은 좋아할 겁니다. 백도하가 저렇게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 건 처음이니까요.”

“그것도 그러네요.”

시현과 키득거리며 이나는 미리 포장 주문 해 놓았던 치킨을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서준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병원에 양해를 구한 덕에 병실 안에서 먹을 수 있었다.

마침 루엔의 진단이 끝났는지 병실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이나는 그들에게 간단히 눈인사를 한 뒤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 오셨군요.”

“스승님!”

통역 마도구를 귀에 착용하고 서준과 대화하고 있던 루엔이 그녀를 맞이했다.

이나는 포장해 온 치킨을 들어 보인 뒤 그들에게 물었다.

“루엔, 몸은 좀 어때? 상태가 어떻대요?”

“전 괜찮아요!”

“후유증은 완전히 사라진 모양입니다. 며칠 뒤에 퇴원해도 된다고 하더군요.”

차례로 이어진 대답에 이나는 안도의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소피아의 조종은 풀렸지만 루엔은 그 후유증으로 간헐적인 두통에 시달렸다. 증상이 쭉 이어지는 건가 싶어 걱정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이나는 방긋방긋 웃고 있는 루엔의 앞에 치킨을 내려놓았다. 코끝을 스치는 고소한 냄새에 루엔이 눈을 빛냈다.

“이게 스승님이 말씀하셨던 그 치킨이란 거예요?”

“그래. 맛있어. 먹어 봐. 이건 후라이드, 이건 양념.”

“네. 잘 먹겠습니다!”

루엔이 닭 다리를 집어 들고 한 입 깨물었다. 파삭,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입을 우물우물거리더니 루엔이 그대로 일시 정지 했다.

이나는 그 모습을 발견하고 의아하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루엔?”

“마, 맛있어요! 세상에. 황실에서 먹었던 음식만큼이나 맛있어요!”

루엔은 그 말을 끝으로 허겁지겁 치킨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그의 옆으로 닭 뼈가 차곡차곡 쌓여 갔다.

‘아무리 그래도 황실 음식과 비교하다니.’

지구로 치면 5성급 호텔 음식과 비슷한 격인가.

조금 황당했지만 그래도 맛있게 잘 먹는 모습을 보니 이나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러다 이나는 서준이 젓가락으로 양념치킨 날개를 공략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나가 빤히 쳐다보자 날개를 입에 넣으려던 서준이 물었다.

“왜 그렇게 보시죠?”

“뼈를 잘 발라낼 수 있을까 싶어 지켜보는 중이었어요.”

“대체 제 평소 이미지가 어떻기에…….”

“아니, 뭐…… 치킨이라곤 뜯어 본 적 없을 것 같은 도련님 정도?”

이나의 말을 들은 서준이 난감하다는 듯 웃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는 날개를 한입에 넣고 뼈 두 개를 완벽히 발골해 냈다. 그에 이나는 저도 모르게 오, 하고 탄성을 흘렸다.

“제법인데요?”

“……이런 걸로 인정받아서 기쁘다고 해야 할지.”

서준이 어쩐지 씁쓸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그와 마찬가지로 루엔이 프라이드 닭 날개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러더니 어느 정도 배가 찼는지 뼈를 뱉고는 말했다.

“스승님, 저 이곳을 구경하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그럼. 괜찮지. 특별히 가고 싶은 곳 있어? 이곳의 유명한 관광지라거나, 풍경이 이쁜 곳이라거나.”

“아무 곳이나 상관없어요. 오랜만에 스승님과 나들이 가고 싶어서 꺼낸 말이에요.”

루엔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릴 때와 달라진 것이 전혀 없는 모습에 이나는 괜히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럼 일단…… 백화점부터 가야겠다.”

“백화점이요?”

“응. 옷이나 장신구, 그 외에도 많은 것을 파는 거대한 건물이야. 그곳에서 네가 입을 옷부터 좀 사자.”

루엔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벌써부터 기대된다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다시 치킨을 뜯었다.

이나도 다시 치킨에 집중하려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루엔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루엔, 혹시 이 세계로 넘어오고 이상한 창 같은 거 안 보여?”

“창이요?”

“응. 네모나고 반투명한 창.”

루엔은 잘 모르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그에 이나가 중얼거렸다.

“루엔은 각성을 안 한 건가…….”

“계약한 정령이 사라져서 그럴지도 모릅니다.”

시현이 끼어들어 하는 말에 이나가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루엔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이나와 시현은 아차 싶어서 서둘러 그를 위로해 주었다.

“루엔, 상심이 크겠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그 애들은 분명 웃고 있었어. 자연에서 편안히 쉬고 있을 거야.”

“맞습니다. 그리고 이곳에도 정령의 알이 있습니다. 새로운 정령과 또 계약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뇨.”

루엔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전 새로운 정령과 계약하지 않을 거예요.”

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루엔이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새로운 정령과 계약하면, 자연으로 돌아간 제 정령들에게 너무 미안하잖아요.”

그 말에 병실 안에 슬픈 기운이 감돌았다.

‘그러고 보니 루엔은 정령과 무척 사이가 좋았지.’

정령을 다루는 능력은 이나가 더 뛰어났지만, 정령을 사랑하는 마음은 어쩌면 루엔이 더 높을지도 몰랐다.

같은 정령사로서 그 마음을 이해한 이나가 피식 웃으며 루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네.”

루엔이 다시 평소의 얼굴로 돌아와 헤헤 웃었다.

아무래도 나들이를 가게 되면 맛있는 걸 잔뜩 사 줘야 할 것 같았다.

***

‘맛있는 건 루엔만 사 주려고 했는데.’

이나는 눈을 깜빡이며 제 옆에 선 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시현 씨가 왜 여기 있어요?”

이나의 물음에 시현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루엔 씨가 불렀습니다.”

“루엔이요? 왜요?”

“저도 잘…….”

시현은 말끝을 흐렸다. 사실 그도 루엔이 자신을 왜 불렀는지 몰랐다.

지난번에 병실에서 치킨을 먹은 날, 루엔이 그를 따로 불러 말했다.

“시현 님, 스승님이랑 나들이 갈 때, 시현 님도 오세요.”

“네? 저도 말입니까?”

“네. 꼭 오셔야 해요!”

꼭이라고 당부까지 하니 도저히 안 올 수가 없었다.

때마침 루엔이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요 며칠 계속 입고 있던 환자복은 벗어 던지고 이나가 사이즈를 어림잡아 사온 옷을 입은 채였다.

다행히 사이즈가 맞는지 루엔의 얼굴이 밝았다.

루엔은 이나와 나란히 서 있는 시현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었다.

“시현 님! 오셨군요!”

“오긴 했습니다만……. 이나 씨와 모처럼의 나들이인데 제가 끼어도 되는 겁니까?”

“그럼요! 괜찮고말고요. 자, 어서 가요!”

루엔이 두 사람의 등을 떠밀며 앞으로 걸어갔다.

사실 루엔에게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

‘스승님의 연애를 도울 사람은 나뿐이야.’

오늘 두 사람이 핑크빛 기류를 내뿜게 하리라.

두 사람의 뒤에서 루엔이 히죽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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