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7화 (127/149)

이나는 루엔과 시현을 데리고 조금 멀리 나가기로 했다. 지하철을 타고 30분은 가야 하는 잠실로.

평소의 이나였다면 그마저도 멀다고 안 갔을 테지만 오늘은 루엔이 있었다.

이나는 루엔에게 지하철도 알려 주고 이곳의 놀 거리들도 마구 알려 주고 싶었다.

예상대로 루엔은 지하철을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일회용 교통 카드를 발급받을 때는 이건 무슨 마도구냐며 신기해했고, 지하철 내에서는 이렇게 크고 긴 마차는 처음 본다며 신기해했다.

오죽하면 같이 타고 있던 사람들이 루엔을 이상하게 쳐다볼 정도였다.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이나는 제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이겨 냈다.

그리고 30분 후, 그들은 잠실에 도착했다.

“우와……!”

루엔은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서 있는 타워를 보며 입을 헤 벌렸다.

“엄청 높아요! 황궁보다 더…… 아니, 마탑보다도 더 높아요!”

이나도 타워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시현에게 말을 걸었다.

“루엔의 말마따나 진짜 높네요. 그렇죠?”

“그렇군요.”

타워를 올려다보며 대답하는 시현의 얼굴이 어쩐지 진지했다. 그에 이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러다 타워 뚫어지겠어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 별거 아닙니다. 그냥 타워 꼭대기 층까지 오르려면 얼마나 걸릴지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구조할 경우를 생각해서요.”

“아…….”

이나는 삐질 웃으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왜 나들이를 와서 일 생각을 하는 거지.

그사이 타워 구경이 끝났는지 루엔이 돌아왔다. 이나는 두 사람을 데리고 백화점 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남성 의류 코너가 있는 층에 내렸다. 이나는 여기서도 신기해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루엔에게 말했다.

“천천히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옷 있으면 골라 봐.”

“스승님께서 사 주시는 거예요?”

“그럼 누가 사 주겠어.”

루엔은 헤실 웃어 보인 뒤 옷을 보러 앞서 나갔다. 뒤에서 천천히 걸으며 이나도 루엔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찾아보았다.

시현은 이나의 옆에 붙어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느긋한 모습에 문득 지난번 치킨을 먹고 서준과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이 났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뭐가 말입니까?”

뜬금없는 서준의 말에 시현은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서준이 루엔과 대화를 나누는 이나를 보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최근 계속 K와 관련된 사건이 일어나 이나 씨가 제대로 된 휴식을 못 취했으니까요. 이번 기회에 이나 씨도 조금 쉬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나 씨에게도 휴가가 필요할 테니까요.”

그 말에 시현도 동의했다. 안 그래도 마음고생이 심했을 텐데 제자인 루엔과 함께하는 김에 이나가 마음의 안정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이나도 편안한 얼굴이었다.

이대로 집에 돌아갈 때까지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면…….

“어?”

그때 이나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에 시현이 의아해하는 얼굴로 이나를 뒤따랐다.

마네킹 앞에 선 이나가 옷을 빤히 보았다. 루엔에게 어울리는 옷이라도 발견한 건가 싶어 시현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이나가 대뜸 그에게 물었다.

“시현 씨, 이 옷 어때요?”

이나가 가리킨 옷은 야상 패딩 점퍼였다. 네이비색과 검은색 그 중간에 있는.

모자에 달린 밀색의 털이 포인트처럼 보였다.

시현이 보기에 루엔은 성격처럼 밝은색 옷이 어울렸다. 이런 어두운 색도 어울릴까 싶어 시현은 고개를 갸웃했다.

“루엔 씨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누가 루엔 얘기했어요?”

“네?”

“시현 씨말이에요. 시현 씨 마음에 드냐고요.”

시현은 눈을 깜빡이며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켰다.

“저…… 말입니까?”

“네.”

“저는…….”

사실 그는 이런 캐주얼한 스타일보다는 단정한 옷차림을 주로 입었다. 그걸 더 선호한다기보다는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입게 된 것이었다.

시현은 이나가 가리킨 점퍼를 빤히 보다가 결국 솔직히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평소 입던 스타일이 아니라 어울릴지 모르겠군요.”

“그럼 한번 입어 봐요.”

“네?”

시현이 당황하는 사이 이나가 직원을 불러 마네킹이 입은 점퍼를 가리켰다. 직원은 시현을 힐끗 보더니 알아서 그에게 맞는 사이즈의 옷을 가져왔다.

얼떨결에 점퍼를 걸치게 된 시현은 얼떨떨한 얼굴로 점퍼를 만지작거렸다. 그에 이나가 먼저 물었다.

“어때요? 사이즈는 맞아요?”

“네. 딱 맞습니다.”

“음. 역시 잘 어울리네.”

이나가 흡족해하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직원에게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이거 결제해 주세요.”

“이나 씨?”

시현이 깜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이나는 태연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곧 겨울이잖아요. 이런 거 한두 개쯤은 있어도 괜찮아요.”

“제 돈으로 살 수 있습니다!”

“제가 사 주고 싶어서 그래요. 넣어 둬요, 넣어 둬.”

결국 시현은 이나의 카드로 옷이 결제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직원이 내미는 영수증과 쇼핑백을 건네받으며 시현은 멍한 얼굴로 말했다.

“……잘 입겠습니다. 아니, 소중히 입겠습니다.”

“뭘 소중까지야.”

이나가 헛웃음을 흘렸지만 시현은 진심이었다.

그녀가 사 준 옷을 어떻게 소중히 입지 않을 수가 있을까.

시현은 혹시라도 누가 채 갈세라 쇼핑백을 품에 꼭 안았다.

이나는 혹시나 시현이나 루엔에게 어울리는 다른 옷이 있을까 싶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시현 씨는 캐주얼한 옷도 잘 어울리네요. 본판이 돼서 그런가?”

“네?”

“옷거리가 좋으니 사 주는 보람이 있다는 뜻이에요.”

이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그에 시현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니까…… 내 외모가 마음에 든다는 뜻인가?’

시현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평소 외모에 관심이 없었는데 이참에 꾸며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시현이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이 루엔이 그들에게 달려왔다.

“스승님!”

“루엔, 마음에 드는 옷 좀 찾았어?”

“네! 근데 너무 많아서 못 고르겠어요. 스승님이 좀 도와주세요.”

“뭘 고민해? 그냥 다 사면 되지.”

“네?”

이나는 카드를 두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척 들어 올렸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나 헌터 일 하면서 돈 많이 생겼어. 말만 해. 다 사 줄 테니까.”

“스승님…….”

루엔은 그날 이나에게서 후광을 보았다.

***

백화점에서 잔뜩 산 옷은 모두 이나의 인벤토리에 들어갔다. 루엔은 각성하지 않아 인벤토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시현은 어째서인지 이나가 사 준 옷을 계속 들고 다녔다. 이나가 몇 번 인벤토리에 집어넣는 게 편하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시현은 그때마다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옷이 굉장히 마음에 든 것처럼 보여서 이나는 괜히 뿌듯해졌다.

옷도 샀겠다, 이제 남은 것은 루엔의 서울 관광이었다.

“호수가 굉장히 커요!”

그들은 산책 겸 백화점 앞에 있는 호수를 걸었다.

마침 호수의 나무들에 단풍이 들어 있었다. 걸을 때마다 붉은색과 노란색으로 알록달록한 호수의 광경이 눈에 들어와서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이나는 앞서가는 루엔을 보며 시현에게 속삭였다.

“루엔이 엄청 신난 모양이에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데리고 나온 보람이 있네요.”

그러면서 편안하게 웃는 얼굴을 시현은 지그시 눈에 담았다. 그러다 지나가듯이 말했다.

“다행입니다.”

“뭐가요?”

“이나 씨가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나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제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제가 어떻게 웃었는데요?”

“휴가를 나온 것처럼 아주 편안한 얼굴이었습니다.”

“그랬어요? 근데 그게 왜 다행…….”

“최근 이나 씨는 계속 긴장된 상태였으니까요.”

“아.”

이나가 탄성을 흘렸다. 그러고는 씁쓸하게 말했다.

“그랬죠. K 때문에 어쩔 수 없었죠.”

“오늘만이라도 좋으니 루엔 씨와 함께 충분히 쉬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머뭇거리던 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굳은 얼굴을 보고 시현은 괜히 말을 꺼냈나 싶었지만 때마침 루엔이 달려와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있었다.

“스승님!”

“왜?”

“비명 소리가 들려요!”

루엔의 다급한 말에 이나와 시현의 얼굴이 동시에 딱딱해졌다.

“어디서?”

“그게……. 아, 지금!”

루엔이 손가락으로 비명이 들리는 방향을 가리켰다. 그쪽을 본 두 사람은 안도 어린 표정을 지었다.

“비명……이 맞긴 하네요.”

“그렇군요.”

“빨리 안 가 봐도 되는 건가요?”

태연한 두 사람의 모습에 루엔은 발을 동동 굴렀다. 그에 이나가 픽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저건 신나서 지르는 비명이야.”

“신난다고요?”

“놀이동산이라고, 놀이 기구라는 것을 타면서 즐기는 곳이야. 저 비명 소리는 놀이 기구를 탄 사람들이 즐거워서 지르는 비명이고.”

“아…….”

그제야 루엔은 깨달은 얼굴로 탄성을 흘렸다.

그러다 이어진 이나의 말에 그의 눈이 반짝 빛났다.

“소풍이나 데이트로 많이들 가는 모양이더라고. 나는 별로 가 본 적 없지만.”

“스승님!”

“응?”

이나가 고개를 돌리자 반짝반짝 빛나는 루엔의 녹색 눈과 마주쳤다.

“저희도 가 봐요!”

“어……. 놀이동산에?”

“네!”

갑작스러운 제안에 이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내심 이해는 되었다. 저쪽 세계엔 놀이동산이랄 게 없었으니 신기할 만하겠지.

이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엔은 방긋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앙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데이트로 많이들 간다면, 그만큼 아름답고 로맨틱한 곳이겠지?’

그곳에서라면 이나와 시현이 서로에게 한 발짝 더 가까워질지도 몰랐다.

루엔이 히죽 웃었다. 그 마음을 모르는 이나와 시현은 그런 루엔을 보며 그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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