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파괴한다고?”
칼릭스가 이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이나는 굳이 그 의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어깨 위에 올라온 파인에게 말했다.
“파인, 네 힘이 필요해.”
[몬스터들을 다 태워 버릴 거야?]
“아니. 그보다 더한 힘이 필요해.”
[더한 힘?]
파인이 작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나는 제 아래에 늘어선 몬스터 무리를 가만히 보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몬스터들과 함께 이 던전 전부를 파괴할 거야.”
[던전을?]
“셀리나, 제정신이야?”
“물론.”
여유를 잃은 칼릭스가 초조하게 물어 오자 이나는 보란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자 칼릭스가 하, 하고 헛웃음을 크게 내뱉었다.
“……너는 미쳤어, 셀리나.”
정말로 미친 놈에게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니 이나는 기분이 묘해졌다.
파인은 걱정이 되는지 안절부절못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나야, 이 공간 전부를 파괴하려면 마력도 마력이지만 그만큼 섬세한 컨트롤이 필요해. 힘을 한 번에 모았다가 터뜨려야 할 테니까.]
“알아. 너한테 모두 맡기진 않을 거니까 걱정 마.”
[그럼?]
“<일체화>를 쓸 거야.”
[뭐어?]
이나의 말에 정령들이 깜짝 놀라 외쳤다.
[그건 안 돼!]
[맞아! 그걸 쓰면 이나의 수명이 줄어든다고 했잖아!]
[절대 안 돼! 못 해!]
심지어 다른 정령들에 비해 비교적 어른스러웠던 파인마저도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정령들이 걱정하는 바는 이나도 알았지만,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다른 방법이 있었다면 그 방법을 썼을 거야.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어.”
[우우…….]
“스킬 좀 썼다고 죽을 일은 없으니까 걱정 마. 전생에서 일찍 죽은 건 그만큼 스킬을 남발해서니까. 스킬을 쓰기를 종용하는 인간들이 엄청 많았거든.”
이나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고 씁쓸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칼릭스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놈들은 내가 다 죽였지.”
“그것 참 정말 고맙지가 않네.”
이나는 칼릭스를 한 번 째려봐 준 뒤 파인에게 말했다.
“파인, 지금은 해야 해.”
[으음…….]
파인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판단한 것 같았다.
[알겠어. 할게.]
“좋아.”
이나는 씨익 웃은 뒤 곧바로 스킬을 발동하려 했다. 그런데 그때 리카가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근데 이나야, 저 사람 앞에서 스킬을 써도 돼?]
리카가 가리키는 이는 칼릭스였다.
이나는 그를 흘깃 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괜찮아. 저놈은 내가 죽길 바라지 않으니까. 괜히 방해했다간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데 가만히 있겠지.”
“역시 셀리나. 날 잘 안다니까.”
칼릭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게다가 칼릭스는 아직 힘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 상태에서 이곳에 개입하기까지 했으니 힘의 소모가 꽤나 클 터.
칼릭스가 이나를 건드리지 않는 이유는 이나가 죽을까 봐도 있지만 그녀와 상대하게 되면 되레 자기가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지금은 암묵적으로 서로의 일에 개입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언제까지고 내버려 둘 순 없지만.’
적어도 칼릭스를 상대할 날이 오늘은 아니었다.
이나는 칼릭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정령들을 보며 말했다.
“다들 잘 들어. 파인과 <일체화> 스킬을 쓰게 되면 나는 던전을 폭파시킬 힘을 만드는 데 집중하느라 외부의 공격에 취약해질 거야. 그러니 너희가 몬스터들의 공격을 막아 줘야 해.”
[우리가 이나를 지키는 거야?]
“그래. 너희가 나를 지켜 줘야 해.”
정령들의 눈이 비장하게 빛났다.
지금까지는 이나가 정령들의 보호자처럼 행동해 왔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정령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런 그들이 자신들의 보호자나 다름없는 이나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 정령들에겐 막중한 사명감으로 다가왔다.
[우리한테 맡겨 줘!]
[우리가 꼭 지켜 줄게, 이나야!]
“든든하네.”
이나가 살포시 웃으며 말하자 정령들이 꺄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스킬을 쓸 기반은 마련되었다.
남은 것은.
“파인.”
[응! 준비됐어.]
“좋아.”
이나는 망설일 것 없이 곧바로 스킬을 발동했다.
“<일체화>.”
띠링!
⌜<일체화(L)> 스킬을 발동합니다.
대상: 파인⌟
마나가 쑥 빠져나가자 이나가 잠시 휘청거렸다. 여전히 감당하기 힘든 마나 소모량이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녀가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불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이 드러났다.
“그 능력 쓰는 거 오랜만에 보네.”
칼릭스가 감탄 어린 휘파람 소리와 함께 말했다.
이나는 그를 보며 코웃음을 한 번 쳐 준 뒤 손바닥 위로 동그란 불덩이를 만들어 냈다.
겉보기엔 그저 종이 한 장 태우고 사라질 것만 같은 작은 불이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저 작은 불 안에 얼마나 큰 힘이 담겨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저것은 응축된 힘이었다. 만약 이나가 저것을 몬스터 무리 사이에 던져 버리면 전방 50m는 그대로 날아가 버릴 터였다.
물론 이나는 그 작은 불덩이를 몬스터에게 날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필요한 힘은 이 던전을 전부 날려 버릴 만한 큰 힘이었으니까.
그래서 이나는 힘을 응축하고, 또 응축했다. 그러다 보니 손바닥 위의 불덩이는 점점 커져만 갔다.
“키에에엑!”
위험을 감지했는지 몬스터들이 이나의 주변에 모여 그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나는 그쪽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손바닥 위의 불이 터지지 않게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정령들이 나섰다.
[어딜!]
콰아앙!
볼트가 벼락을 내리자 이나에게 달려들던 새 몬스터가 그대로 추락했다.
다른 곳에선 리카가 바람으로 몬스터의 몸을 베었고, 네움이 땅에 있는 몬스터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나에게 털끝 하나 닿지 않도록.
“굉장한데?”
칼릭스는 그 광경을 보며 순수하게 감탄을 내뱉었다.
하지만 동시에 회의감마저 들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칼릭스의 붉은 눈이 이나를 지그시 담아냈다.
작았던 불은 어느새 이나의 몸만큼이나 커져 있었다. 저것만으로도 마력 소모가 엄청날 텐데 정령들까지 그녀의 마나를 소비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그녀의 마력은 거의 바닥이 나 있을 터였다.
‘뭐, 나에게야 좋은 일이지만.’
마력의 한계를 느낀 이나가 그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으니까.
칼릭스가 히죽 웃었다.
그때 그의 눈에 이나가 무슨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 보였다.
‘뭐라고 하는 거지?’
칼릭스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나의 입 모양을 보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칼릭스는 이나에게서 마력의 기운을 감지해 냈다.
“어?”
칼릭스는 당황해서 중얼거렸다.
“마력이…… 늘어났어?”
***
그녀의 몸보다 큰 불을 만들어 낼 때, 이나는 벽에 부딪쳤다.
‘마력이 모자라.’
이나는 눈살을 찡그렸다.
슬슬 마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불의 형태를 유지하고 늘리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소비하는데 정령들까지 그녀의 마나를 소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꽤 큰 힘이 들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멈출 수도 없었기에 이나는 고민에 빠졌다.
‘어쩔 수 없지.’
이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다 입을 달싹였다.
“스탯 창.”
띠링!
⌜스탯 창
근력: 15
체력: 18
민첩: 16
마력: 102(+30)
※잔여 SP: 54⌟
지금까지 계속 던전을 공략하며 야금야금 SP를 모은 덕에 어느새 SP가 54나 쌓여 있었다.
아무래도 거의 혼자 상급 던전을 공략하러 다닌 것이 SP 습득에 큰 영향을 준 듯했다.
‘원래는 칼릭스를 상대할 때를 대비해 모아 놓은 것이지만.’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었다.
이나는 54나 되는 SP를 모두 마력에 투자했다.
이나의 마력 스탯은 이제 156. 거기다 S급 칭호인 <마나의 지배자>가 주는 마력까지 합치면 186이었다.
이나는 몸 안에 차오르는 마력을 느끼며 깊은 숨을 토해 냈다.
“후우. 이제야 살겠네.”
[이나야, 마력이 늘어났어!]
“그래. 그러니까 이제 다시 집중하자.”
[응!]
이나는 파인과 함께 다시 불의 크기를 키우는 데 집중했다.
마력에 여유가 생겼지만 이나는 속도에 좀 더 신경을 썼다. 괜히 여유를 부렸다간 언제 또 마력이 바닥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더 이상 마력을 늘릴 방도가 없었다.
이나가 집중한 덕에 불의 크기는 더욱 빠르게 불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의 운석과 같은 크기로 커져 버렸다.
이나가 바랐던 대로, 이 던전을 모두 박살 낼 정도의 힘을 담아.
눈이 익어 버릴 것 같은 열기를 담은 그 불의 구를 보며 칼릭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미쳤어. 넌 미쳤어, 셀리나.”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칼릭스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더욱 큰 희열만을 느낄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확신이 들었다.
‘셀리나는 역시 나의 신이야.’
감히 아무도 넘보지 못할, 그만의 신.
그리고 곧 그의 것이 될 신.
칼릭스는 미소를 숨기지 못하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능력을 쓰는 데 집중하느라 그것을 보지 못한 이나는 정령들을 불러 모았다.
“너희들, 이리 와 봐.”
[응, 이나야!]
정령들이 방어를 멈추고 이나의 곁으로 다가왔다.
몬스터들은 거대한 불덩이에 위압감을 느끼고 이미 혼비백산한 채 도망가고 있었다.
그래 봤자 도망갈 곳은 없었지만.
이나는 그 광경을 보며 정령들에게 말했다.
“이제 이곳을 나갈 거야. 방어가 가능한 애들은 나가자마자 게이트 주변을 막아. 혹시라도 불길이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네……! 알겠어요……!]
방어가 가능한 윈티와 네움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지금은 떨어져 있는 이즈도 그녀의 생각을 읽었을 터였다.
이나는 그 외에 혹시나 챙길 것이 있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다가 칼릭스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씨익 웃더니 입을 열었다.
“곧 다시 보게 될 거야, 셀리나.”
이나는 얼굴을 와락 찌푸리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셋 하면 나가자. 하나, 둘…….”
이나는 제가 만든 불의 구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그리고 리카의 힘을 빌림과 동시에 폭발을 막고 있던 힘을 풀며 외쳤다.
“셋!”
쿠우우우!
이나는 폭발의 반동으로 게이트를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그리고 그녀가 아슬아슬하게 게이트를 통과한 순간.
콰아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불이 던전을 폭파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