촤악-
“그어어…….”
시현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자 몬스터가 둔중하게 무너져 내렸다.
쿵-
그의 앞에 쓰러진 몬스터를 보며 시현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들이 기다렸던 지원군이 도착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이나가 아직 던전에서 나오지 않았다.
“젠장.”
시현은 입에 달라붙지도 않는 욕을 끄집어냈다.
저 검은 게이트 안에 있을 이나가 걱정되어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시현은 그러지 못했다. 아직 이곳은 그를 필요로 하니까.
도하는 몬스터의 저주가 아직 풀리지 않은 상태고, 지원군이랍시고 온 헌터들은 몬스터 한 마리도 겨우 상대하기 바빴다.
지금 이곳에서 믿을 만한 사람은 시현 그 하나뿐이었다.
“야, 이시현.”
그때 한 손으로 몬스터를 상대하던 도하가 그에게 다가왔다. 시현은 고개를 돌려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마치 왜, 라고 묻는 듯한 그 시선에 도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의외의 말을 꺼냈다.
“가 봐.”
“뭐?”
“유이나가 걱정돼서 미칠 것 같잖아. 그러니까 가 보라고. 여긴 내가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시현은 눈을 치켜떴다. 그가 원하던 말이건만 선뜻 그러겠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것을 느낀 도하가 몬스터들과 싸우고 있는 다른 헌터들을 힐끗 보며 말했다.
“물론 네가 있어야 좀 수월해지는 건 사실인데, 그렇다고 없어서 문제가 생길 정도는 아니거든? 유이나가 막고 있는지 더 이상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나오지도 않고.”
“…….”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가라.”
도하의 거듭된 권유에 결국 시현은 결단을 내렸다.
“……고맙다.”
“고마우면 나중에 나랑 대련 한번 해 주든가.”
도하가 마침 다가오는 몬스터를 상대할 준비를 하며 말했다.
그 틈에 시현은 게이트로 걸어갔다. 하지만 뒤가 신경 쓰여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다 결국 마음을 다잡은 시현이 게이트로 달려갔을 때였다.
쿠구구구-
“뭐야?”
“이 상황에 지진?”
땅이 진동하자 당황한 헌터들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시현도 달리던 것을 멈추고 게이트 앞에서 상황을 파악했다.
그 순간 게이트가 번쩍 빛났다. 몬스터가 튀어나오려는 건가 싶어 시현은 검을 치켜들었다.
그런데 안에서 나온 것은 몬스터가 아니었다.
빠르게 밖으로 나오는 이나를 보고 시현이 눈을 크게 떴다.
“이…….”
“젠장! 왜 여기 있어요!”
시현과 시선이 마주치자 이나가 눈을 치켜뜨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 순간 게이트에서 엄청난 바람이 불어왔다. 그 탓에 두 사람은 물론 근처에 있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땅을 뒹굴었다.
“모두 막아!”
이나가 시현과 땅을 뒹굴며 정령들에게 외쳤다. 그녀의 명령을 들은 정령들이 게이트 주변에 벽을 세워 폭발의 반동을 막았다.
하지만 폭발의 위엄이 엄청났기에 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허물어졌다.
그에 정령들이 다시 한번 벽을 세우려는 찰나였다.
[어?]
정령들이 멍한 목소리를 냈다. 벽을 뚫을 정도로 기세가 엄청났던 기운이 잠잠해졌기 때문이었다.
정령들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마침 누군가가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후우. 십년감수했네.”
[어? 양지은 헌터다!]
정령들이 반갑게 외치자 던전 연구 겸 지원군으로 온 지은이 빙긋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정령님들.”
[방금 그거 양지은 헌터가 한 거야?]
“네. 제 공간 마법으로 게이트에서 나오는 것들을 모두 하늘로 올려 보냈죠.”
[와아! 대단해!]
“정령님들만 할까요.”
지은과 정령들은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는 동안 다른 헌터의 상처를 치료하고 있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나였다면 그렇게 시시닥거리는 대신 다른 사람들 일 좀 거들어 줬을 텐데.”
“하! 뭐래. 나 아니었으면 다 같이 위험했을 텐데도 그런 말이 나와요, 천해진 헌터?”
지은이 눈썹 끝을 위로 올리며 뾰족하게 말하자 함께 지원을 온 해진이 어깨를 으쓱했다.
“위험한 건 지금도 마찬가지거든요? 아직 몬스터 남아 있는 거 안 보여요?”
“저도 긴장 놓은 거 아니거든요? 나 참. 어쩌다 저 인간과 함께 오게 된 건지…….”
“내가 할 말이네요.”
파직-
서로를 째려보는 두 사람의 눈에서 전기가 튀는 듯했다. 그에 괜히 주변 사람들만 눈치가 보였다.
“미쳤어요?”
그때 커다란 외침이 들리자 지은과 해진이 고개를 홱 돌렸다.
이나가 제 밑에 깔린 시현의 멱살을 쥐고 탈탈 흔들고 있었다.
“내가 무사히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거기가 어디라고 들어와요, 들어오길!”
“이나 씨.”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내가 조금이라도 더 늦게 돌아왔으면 큰일이 벌어졌을 거라고요!”
“이나 씨, 잠깐…….”
“뭐요!”
어디 변명해 보라는 듯이 이나가 소리를 쳤다.
그런데 시현은 변명도, 늦게 돌아온 이나에게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나의 뒤통수에 손을 얹고 제 품으로 끌어당길 뿐이었다.
“무슨……!”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당황한 이나가 급히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시현이 귓가에 그렇게 속삭인 탓에 그러지 못했다.
이나는 멈칫하며 말을 잇지 못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다녀왔어요.”
“네.”
시현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런 천조 길드장의 얼굴은 처음 보았기에 주변 헌터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툭-
그때 시현의 등을 감싸고 있던 이나의 손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시현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그녀를 불렀다.
“이나 씨?”
“…….”
이나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시현은 가슴이 싸해지는 것을 느끼며 급히 이나를 제 품에서 떨어뜨렸다. 그러자 붉어진 얼굴로 색색거리는 이나가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이 열기.
시현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외쳤다.
“힐러! 힐러를 불러와 주십시오!”
“그렇게 크게 외치지 않아도 왔어요.”
때마침 해진이 다가와 이나의 상태를 살폈다.
시현은 긴장 어린 눈으로 해진이 입을 열길 기다렸다.
이나의 이마에 손바닥을 대 보았다가 이어 손을 잡고 무언가를 진찰하던 해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몸의 피로 때문에 열이 좀 나는 것뿐이에요. 휴식만 충분히 취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렇군요.”
시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정령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파인이 유난히 안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이나가 내 열을 감당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시현이 의아해하는 얼굴로 파인에게 물었다. 그러자 파인이 눈에 띄게 몸을 떨었다.
[어? 어……. 그게…….]
“파인.”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시현이 대답을 재촉했다. 결국 파인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실은…… 던전 안에서 나와 이나가 <일체화> 스킬을 사용했거든…….]
“……그 스킬을 또 말입니까?”
[응……. 난 불의 정령이잖아. 아무래도 나와 <일체화> 스킬을 사용한 탓에 내 열기가 이나에게 영향을 준 모양이야.]
시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에 파인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해진이 끼어 든 것은 그때였다.
“일단 자리를 옮기죠. 환자를 이대로 둘 거예요?”
“……알겠습니다.”
시현이 이나를 번쩍 안아 들고 해진과 함께 자리를 옮겼다.
남은 사람들은 살벌한 기운을 내뿜는 시현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숙덕거렸다.
“천조 길드장님 말이야, 아무래도 그런 거 같지?”
“응. 맞는 것 같은데.”
한 헌터가 혀를 쯧쯧 차며 중얼거렸다.
“천조 길드장도 사랑 앞에선 장사 없네.”
***
한주원은 사무엘의 연구실에 앉아 TV를 틀었다.
마침 한국의 소식이 미국 뉴스를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한국에 등장한 테러리스트. 폭발이 일어난 잠실과 강남. 그리고 S급 던전의 하드 모드와 던전 브레이크.
많은 소식들이 한꺼번에 전해졌다. 한주원은 그 사이에서 테러리스트 사무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결국 죽었나.”
한주원이 무감정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서 한때 동료였던 이를 향한 추모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TV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엘의 연구실을 돌아다니며 그는 무언가를 눈으로 찾았다.
‘분명 이쯤 어딘가에…….’
그때 그의 눈에 무언가가 비쳤다. 한주원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들어 올렸다.
칼릭스의 조언에 따라 사무엘이 만든, 던전을 만들어 내는 마도구.
이제는 이것 하나밖에 남지 않았지만 이걸로 충분했다.
한주원은 밖으로 나가며 사무엘의 연구실을 폭파시켰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폭발에 몰려오는 사람들 틈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가 향한 곳은 근처에 있는 한 던전이었다.
한주원은 결계를 통과해 망설임 없이 게이트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번쩍-
빛과 함께 한주원은 던전 안으로 이동했다.
던전에 들어오자마자 그가 한 일은 공략이 아니었다.
“보고 계신 거 다 압니다.”
한주원은 허공을 지그시 보며 말했다.
“나와 주십시오, 칼릭스 님.”
그 말과 동시에 허공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사람의 몸을 만들어 냈다.
이내 연기가 사라지고 칼릭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나한테 힘이라도 빌려 달라고 하려고?”
모습을 드러낸 칼릭스가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이나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겐 기본적으로 까칠한 그였지만 한주원에겐 달랐다.
한주원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티 내지 않고 한쪽 무릎을 꿇어 그에게 경외를 표현할 뿐이었다.
“감히 당신의 힘을 탐낼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럼?”
“저는 그저 칼릭스 님과 함께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 말에 칼릭스의 미소가 짙어졌다.
“나와 함께하고 싶다고?”
“네. 당신을 돕고 싶습니다.”
“어떻게?”
“칼릭스 님께선 이 세계에 개입을 못 하시죠.”
갑자기 튀어나오는 현 상황에 대한 설명에도 칼릭스는 말이 없었다. 대신 그가 계속 말해 보라는 듯 턱짓하자 한주원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 몸을 두고 있다면 어떨까요.”
“흐음?”
“제 몸을 드리겠습니다. 저를 칼릭스 님의 일부로 삼아 주십시오. 그리고 이 세계에 개입할 명분을 만드시는 겁니다.”
한주원은 고개를 들고 칼릭스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려고 저를 남겨 두신 것 아닌가요?”
뜻밖의 말에 칼릭스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그는 입술 사이로 풋,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하! 이거야, 원. 들켜 버렸네.”
갑자기 터진 웃음소리에도 한주원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게 무릎을 꿇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마음에 든다는 듯 칼릭스가 그를 유심히 보았다.
“맞아. 난 그걸 위해 너를 그때 구출시킨 거야. 그런데 괜찮겠어? 내가 네 몸을 차지하면 한주원이라는 존재는 나와 융합되는 건데.”
“상관없습니다.”
한주원이 이곳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미소를 그렸다.
“저도 그걸 바라니까요.”
칼릭스는 이나를 자신의 신처럼 생각했다. 왜 하필 이나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주원은 그런 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야 칼릭스가 그의 신이었으니까. 감히 세계가 막아 놓은 벽을 뚫고 이 세계를 침범할 정도의 힘을 지닌.
한주원은 칼릭스의 힘을 숭배했다. 그의 일부가 되어 그 힘과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한주원이 원하는 것이었다.
그 마음을 알고 있기에 칼릭스는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좋아. 마음에 들어.”
칼릭스는 한주원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부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한주원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후, 연기가 모두 몸에 스며들자 눈을 감고 있던 한주원이 눈을 떴다.
피처럼 붉은 눈. 칼릭스의 눈이었다.
“괜찮은 몸인데? 마음에 들어.”
칼릭스는 새로 얻은 몸을 이용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씨익 웃었다.
“자, 그럼 셀리나를 만나러 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