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오빠.”
“응.”
“……이제 그만 이 손 좀 놔주면 안 될까?”
이나가 민망하다는 듯 웃으며 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이한의 손도 위로 달려 올라갔다.
이한은 잠시 말이 없다가 우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손을 놓으면 네가 영영 사라질 것 같아서.”
“글쎄, 안 그런다니까. 동생 말도 못 믿어?”
“믿지. 믿는데…… 어쩌다 가끔은 못 믿겠어. 이런 일이 벌어질까 봐.”
그러면서 이한은 그녀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오늘도 봐. 던전 브레이크를 막다가 무리해서 쓰러졌다며. 이런데 내가 어떻게 걱정을 안 해?”
이한이 말한 것처럼 그에게는 ‘이나가 무리해서 쓰러졌다’ 정도로만 말해 둔 상태였다.
칼릭스에 대한 것이나 <일체화> 스킬에 대해서 말하기에는 그가 너무 걱정이 많고 무엇보다 일반인이기 때문이었다.
이나는 괜히 이한에게 마음의 짐을 얹어 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이렇게 그녀를 걱정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신뢰를 잃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지만 말이다.
이나는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어쩌다 이렇게 신뢰를 잃게 된 건지.’
물론 그렇게 말하면 그럴 만했다는 대답이 올 게 뻔했기에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하지만 조금 억울했다.
난 모두를 위해 그런 건데.
모두를 지키고 싶어서, 계속 보고 싶어서 그랬던 것뿐인데.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시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스킬을 써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남은 사람들 심정이 어떨 것 같습니까? 고마울 것 같습니까? 적어도 저는 아닙니다. 저는…… 정말 미쳐 버릴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제발 저희도 이나 씨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나는 시현의 말을 떠올리며 이한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저기, 오빠.”
“응.”
“만약에, 정말 만약에 있잖아. 내가 모두를 위해 나를 희생…….”
“뭐?”
“아니, 만약에라고 말했잖아. 아무튼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떨 것 같아?”
이한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하지만 그 사나운 얼굴은 곧 우울하게 변했다.
“만약 그런 일이 정말로 벌어진다면, 미쳐 버릴 것 같은데.”
“…….”
“너를 그렇게 내몰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세상을 원망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내 자신을 증오하고, 그럴 것 같아.”
“……그렇구나.”
이한의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긴 이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 사람도 같은 마음일까.”
“그 사람?”
“응. 있어, 그런 사람. 나중에 소개시켜 줄게.”
이나가 씨익 웃자 이한은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왠지 그의 사랑스러운 동생이 누군가에게 홀랑 넘어간 것 같은, 그런 불길한 마음이.
이한이 은근슬쩍 이나를 캐내 보려고 하는데 마침 문이 열리며 간호사가 그를 불렀다.
“유이나 환자 보호자분, 잠시만 와 주시겠어요?”
“아, 네.”
이한은 아쉬워하는 얼굴로 그제야 이나의 손을 놓았다. 이나는 마침내 해방된 손을 흔들어 그를 배웅했다.
문이 닫히고 혼자 남게 되자 이나는 그제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들 걱정만 많아선.”
[그치만, 그치만! 이나는 너무 스스로를 생각하지 않는걸!]
[맞아!]
이한을 보냈다 싶었더니 이젠 정령들이 잔소리를 해 댔다.
이나는 결국 귀를 막고 안 들리는 척했다. 그러자 정령들은 이나와의 계약을 이용해 이젠 머릿속으로 잔소리를 떠들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시끌벅적했지만 단 한 목소리만큼은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저 사람이 이번 생의 셀리나 가족?”
이나는 눈을 번쩍 뜬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뻣뻣한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창문 쪽을 확인하자 낯설지 않은 얼굴이 창틀에 앉아 있었다.
그는 이나와 눈이 마주치자 붉은 눈을 곱게 휘었다.
“안녕, 셀리나?”
“……한주원?”
이나는 눈에 보이는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그의 붉은 눈을 보자 그녀는 그의 안에 다른 인물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나는 서늘해진 눈으로 말했다.
“아니. 한주원이 아니구나.”
“맞아. 바로 알아보네?”
칼릭스가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
“이제 이 몸은 내 거야. 새로운 몸의 나를 맞이하는 기분이 어때, 셀리나?”
“거지 같아.”
이나가 솔직한 대답을 내뱉자 칼릭스는 섭섭한 사람처럼 눈썹을 늘어뜨렸다.
이나는 코웃음도 치지 않고 그를 응시하며 제 상태를 살폈다.
그녀의 마력은 어느 정도 돌아오긴 했지만 아직 완전히 회복되진 않은 상태였다.
이 상태로 칼릭스와 싸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마나 포션이라도 있었다면…….’
이나의 초조한 마음을 느끼기라도 한 것인지 칼릭스가 싱긋 웃었다.
“꽤 초조한가 봐?”
“…….”
이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나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자 칼릭스가 걱정 말라는 듯이 말했다.
“걱정 마. 아무 일 없을 거야. 네가 내 말만 잘 따라 준다면.”
“뭐. 또 너랑 하나가 되느니 하는 이상한 소리나 하려고?”
“정답.”
“하나만 묻자. 왜 그렇게 나와 하나가 되려고 하는 거야?”
이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자 칼릭스가 별 이상한 질문을 다 듣는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내 인생의 하나뿐인 빛을 손에 넣고 싶은 건 당연한 심리 아냐?”
“내가 너의 빛이라고…….”
“맞아.”
“하!”
이나는 헛웃음을 터뜨리다가 짓씹듯이 말했다.
“그거 알아? 반대로 너는 내 어둠인 거.”
“어둠이라…….”
“네가 이딴 식으로 날 쫓아다닐 줄 알았으면 그때 널 구하지 않았을 거야.”
그 말에 칼릭스의 웃는 얼굴에 금이 갔다. 마치 제 근본이 깨진 것처럼.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그가 음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관없어. 너는 이미 날 구했으니까.”
내려온 앞머리를 쓸어 넘긴 칼릭스가 다시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그런 의미에서 너에게 선택할 기회를 줄게.”
“선택?”
“한 선택지야 뭐 잘 알고 있을 테고. 나와 하나가 되는 거니까.”
이나가 눈살을 팍 찌푸렸다. 예상했다는 듯 칼릭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다른 선택지는 이곳에서 폭탄을 터뜨리는 것.”
“또 그 망할 폭탄이야?”
“맞아. 내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이곳에 게이트가 열릴 거야.”
칼릭스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사무엘이 제안했던 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긴 일반인들이 아직 대피를 못 했다는 점일까. 그것도 거동이 힘든 일반인들이 말이지.”
“…….”
“어떡할래, 셀리나?”
“하아…….”
이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칼릭스가 말한 것처럼 이곳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열리면 꽤나 골치가 아팠다. 아니, 참사가 일어날 터였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칼릭스와 함께 가는 것이지만…….
“……싫어.”
“뭐?”
“싫다고. 너랑 하나가 되는 거.”
이나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이 한 몸 바쳐야 하는 거라면, 그냥 이곳 사람들을 구하는 데 바칠래.”
칼릭스는 멍한 표정으로 이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이나는 자신이 선택한 것에 후회가 없었다.
그걸 알고 있기에 칼릭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그래? 이것 참. 오기가 생기네.”
칼릭스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바깥에서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콰아아앙!
이나는 칼릭스 너머, 그녀가 있는 건물 앞 산책로 한가운데에 생긴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귓가에 음산한 목소리가 스쳤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봐. 될진 모르겠지만.”
위이이잉-
병원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동시에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다는 다급한 경고가 들려왔다.
이나는 곧바로 게이트부터 막으려 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목을 죄어 오는 손에 숨이 턱 막혔다.
“컥……!”
“이렇게 된 이상, 억지로라도 네가 날 따라오게 만들어야겠어.”
칼릭스가 붉은 눈을 스산하게 빛내며 이나의 목을 죄었다. 그의 손에서 검은 연기가 흘러나와 이나의 몸을 집어삼키려 했다.
[이나에게 손대지 마!]
리카가 바람으로 그의 팔을 베어 내려 했다.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칼릭스가 이나에게서 손을 떼 버렸다.
그의 손에서 벗어난 이나는 기침을 내뱉으며 칼릭스를 노려보았다. 그 눈빛이 마음에 든다는 듯 칼릭스는 씩 웃더니 창문 바깥으로 나갔다.
허공에 뜬 그는 이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제 손바닥 위에 검은 구를 만들어 냈다.
“네가 그렇게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내가 없애 버리면 어떨까?”
“하지 마!”
이나도 창문 바깥으로 뛰어내려 그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칼릭스가 빨랐다.
그는 검은 구를 여러 개로 나눠 도망가는 사람들을 향해 날렸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이나는 윈티의 능력으로 사람들 위로 얼음 막을 만들어 냈다. 덕분에 칼릭스의 공격은 무산됐지만 사람들은 공포심에 발이 얼어붙은 채였다.
“다들 도망가요! 어서!”
“소용없어.”
칼릭스가 양팔을 뻗어 양쪽으로 공격을 날렸다. 그는 아무렇게나 조준해도 사람들을 명중시킬 수 있었지만, 이나는 달랐다. 한쪽은 막았지만 곧바로 다른 쪽까지 신경 쓰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칼릭스의 공격이 그쪽에 있던 건물에 맞아 건물 잔해가 사람들에게 떨어져 내렸다.
“으아아악!”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제 머리 위를 감쌌다. 꼼짝없이 깔리겠구나 싶은 그때였다.
서걱- 쿵!
“……어?”
사람들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제 옆을 쳐다보았다.
그들을 향해 떨어져 내렸던 건물의 잔해가 반으로 나뉘어 그들의 옆에 떨어져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모두 멍하니 서 있는 사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서둘러 대피 부탁드립니다!”
“처, 천조 길드장이다!”
사람들은 눈에 띄게 안도한 얼굴로 다시 대피하기 시작했다. 시현이 그들을 이끌며 이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여긴 맡겨 주십시오.’
이나의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칼릭스가 눈살을 찡그렸다.
“뭐야. 저 녀석도 여기 있었어?”
“아주 든든한 사람이지.”
이나의 말에 칼릭스의 얼굴이 더 구겨졌다. 그는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도하도 나타나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그의 파트너인 아란은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을 상대했다.
“거슬려.”
“네가 거슬리든 말든 알 바 아니고.”
콰아앙!
다른 데 시선이 팔려 칼릭스는 저를 공격해 오는 벼락을 뒤늦게 감지해 냈다.
그는 급히 하늘에 한주원의 능력인 어둠을 펼쳐 벼락을 막아 냈지만 그 반동으로 땅에 처박혔다.
그리고 그 끝엔 그가 만들어 낸 게이트가 있었다.
“이게 목적이었구나.”
얼떨결에 게이트 안으로 들어오게 된 칼릭스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그와 함께 게이트 안으로 들어온 이나는 마침내 칼릭스와 대면했다.
그녀는 칼릭스의 붉은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오늘이야말로 끝을 보자, 칼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