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럭!”
검날이 쑥 빠지자 시현은 입에서 피를 흘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도하가 이성을 잃고 칼릭스에게 달려들었다.
“이 망할 자식이 진짜!”
“어이쿠.”
칼릭스는 뒤로 훌쩍 물러나 언월도를 피했다. 도하는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사이 이나가 시현의 몸을 받아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시현 씨! 조금만 참아요! 곧바로 지혈을……!”
이나가 그의 상처 부위를 얼려 지혈을 시도했다. 하지만 시현의 안색은 계속해서 희게 질려 갔다.
“이, 이나 씨…….”
“말하지 마요! 젠장! 이게 무슨 꼴이야, 진짜!”
이나는 거의 발악하다시피 외쳤다.
시현이 피투성이인 손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
이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을 한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그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나보고는 그렇게 희생하면 남은 사람들 심정이 어떨 것 같냐고 그렇게 화내더니.”
“……그것도 죄송합니다.”
“됐어요. 이제 알 것 같으니까.”
이나는 손등으로 눈을 벅벅 문지르며 말했다.
“내가 죽으면 남게 될 사람들의 심정을 이제 알 것 같아요.”
“…….”
“하지만 그래서 이번만큼은 더더욱 포기할 수 없어요.”
“이나 씨……?”
시현은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이나가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움직이지 마요. 상처 벌어지니까.”
“이나 씨, 뭘 하려는 겁니까?”
“아무래도 우린 비슷한 사람인가 봐요.”
이나는 부러 가볍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멀리서 도하와 싸우고 있는 칼릭스를 보며 말을 이었다.
“소중한 상대방이 희생하지 않길 바라며, 차라리 내가 희생하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
“이나 씨.”
“다들 똑같이 했을 거라는 걸 알고 나니까, 더더욱 이 스킬을 포기할 수 없어졌어요.”
시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나 씨, 그 스킬은 안 됩니다! 윽……!”
급하게 일어나 외치느라 상처 부위가 욱신거렸다. 이나는 그런 그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시현 씨. 그리고 괜찮을 거예요. 적어도 당신은.”
“이나 씨!”
“그럼 바깥에서 봐요.”
그 순간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그를 공중에 떠오르게 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도하와 아란도 마찬가지였다.
시현은 제 몸이 게이트 쪽으로 날아가는 걸 보고 서둘러 외쳤다.
“리카, 안 됩니다! 제발 멈춰 주세요!”
[미안해……!]
리카는 울먹거리며 그들을 기어코 게이트 바깥으로 보내 버렸다.
시현은 다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갑자기 세워진 얼음의 벽 탓에 그 앞에서 벽만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이나 씨! 이나 씨! 윽……!”
몸을 과하게 움직여 상처 부위가 벌어졌다. 결국 시현은 얼음의 벽 앞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도하가 힐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현은 도하의 목소리와 벽 너머의 게이트를 마지막 기억으로 삼고 정신을 잃었다.
***
“그놈을 확실하게 죽였어야 했는데.”
칼릭스가 아쉽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이나는 게이트 바깥에 확실히 벽을 세웠다는 윈티의 보고를 듣고 칼릭스에게 말했다.
“애초에 우리만의 싸움이었어. 그 사람들은 상관도 없었다고!”
그러면서 노려보자 칼릭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그놈들을 아끼는 게 보이니 심술을 부리고 싶어져서. 나한텐 한 번도 그렇게 대해 준 적 없잖아.”
“당연하지. 너니까.”
“그것 참 섭섭하네.”
칼릭스가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잠시, 그가 눈빛을 바꾸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그 스킬을 쓰는 거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칼릭스는 이미 이나가 <일체화> 스킬을 쓸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전부터 궁금했어. 그 스킬을 쓰는 셀리나를 과연 내가 누를 수 있을지.”
상상만 해도 희열을 느끼는 듯 칼릭스가 떨리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손으로 가렸다.
이나는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제 할 말을 내뱉었다.
“너는 지켜야 될 선이라는 걸 지키지 않았어.”
“그야 널 만나야 했으니까.”
“그래. 나 때문이지.”
이나는 칼릭스와 시선을 맞추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러니 내 손으로 널 없앨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이나는 <일체화> 스킬을 발동했다. 늘 그랬듯 익숙한 시스템 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일체화(L)>를 사용할 정령을 선택해 주십시오.
사용 가능 정령: 이즈, 리카, 파인, 볼트, 윈티, 네움⌟
이나는 시스템 창을 보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전부.”
[뭐어?]
깜짝 놀란 정령들이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
[이나야, 안 돼!]
[한 정령과 스킬을 쓰는 것만 해도 몸에 부담이 크잖아! 그런데 우리 모두와 스킬을 쓴다니!]
[자칫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네!]
이나는 머릿속으로 그녀에게 전하는 목소리들을 전부 듣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이나야!]
“그러니 굵고 짧게 가자.”
[그게 무슨 말이야?]
이나는 한 손을 쫙 펼치며 말했다.
“5분. 5분 안에 끝내자.”
“뭐? 5분? 하하하!”
그 말을 들은 칼릭스가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내가 얕보였나 보네. 5분이라니. 너무 짧잖아?”
“아니. 넌 그걸로도 충분해.”
칼릭스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의 마음을 느낀 엘리아스가 이나가 서 있는 땅을 일으켜 공격했다.
이나는 그것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정령들에게 외쳤다.
“어서 스킬을……!”
하지만 정령들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이즈가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입을 열었다.
[나, 난 할래!]
[이즈!]
[그치만 이대로면 끝나지 않을 거야. 칼릭스가 이나를 계속 괴롭힐 거라고! 다들 그건 원하지 않잖아!]
다른 정령들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달싹거리기만 했다. 그 틈에 이즈는 바로 다음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모두 이나의 정령이니 느꼈을 거 아냐. 이나의 각오를.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모두 해 보자!]
그 말에 결국 리카가 넘어갔다.
[나도 할래!]
[저도……!]
윈티까지 가세하자 다른 정령들도 합세할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네.]
[일단 해 봅세!]
[…….]
네움까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이나의 눈앞에 다른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일체화(L)> 스킬을 발동합니다.
대상: 이즈, 리카, 파인, 볼트, 윈티, 네움⌟
그 순간 이나의 몸에서 마나가 훅 빠져나갔다.
“헉……!”
지난번과는 차원이 다른 소모량이었다. 여섯 정령과 한꺼번에 스킬을 사용하느라 그만큼의 마나가 소모되는 듯했다.
이나는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칼릭스가 그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런, 셀리나. 적 앞에서 정신을 팔면 안 되지.”
칼릭스가 비수를 만들어 이나에게 던졌다.
“안 그러면 이렇게 당하게 된다고!”
비수가 이나에게 꽂혔다. 일부러 치명상을 입히지 않게 조절했지만 꽤 큰 상처를 입었을 터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씩 웃던 칼릭스의 입꼬리가 뚝 굳어 버렸다.
이나의 몸에 박힌 줄 알았던 비수가 불에 타 흩어져 버린 것이었다.
“하아. 죽는 줄 알았네.”
“너……?”
칼릭스가 눈동자를 흔들며 이나를 쳐다보았다. 이나는 신비롭게 빛나는 검은 눈을 그와 맞추며 씨익 웃었다.
“왜 그렇게 봐? 이 스킬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너 설마 모든 정령과 그 능력을 쓴 거야?”
“그래.”
“미쳤군. 넌 정말 미쳤어, 셀리나.”
칼릭스가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입가에는 숨기지 못한 희열이 담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여전히 그녀를 신 보듯 하며 갈구하는 눈빛이었다.
그에 이나는 질린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이나야! 이러다 5분 다 가겠어!]
그녀와 하나가 된 이즈가 초조하게 외쳤다. 이나는 물의 채찍을 손에 휘감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어.”
그러고는 칼릭스를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칼릭스는 검으로 제게 날아오는 채찍을 잘라 내려 했다.
하지만 물로 이루어진 채찍은 잘라도 잘라도 계속 늘어났다.
결국 칼릭스는 혀를 쯧 차며 엘리아스의 힘을 빌렸다.
“막아.”
그 한마디에 엘리아스가 바람의 막을 펼쳐 물의 채찍을 주변으로 흩뿌렸다.
겉보기엔 막은 것처럼 보였지만, 흩뿌려진 물은 다시 칼릭스 쪽으로 뭉쳐 그를 포박했다.
“큭……!”
힘으로는 채찍이 끊어지지 않자 결국 그는 제 사악한 마력을 발산했다. 효과가 있는지 채찍이 부식되는 것처럼 점점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딜.”
쾅!
이나는 서둘러 채찍을 움직여 칼릭스를 땅에 처박았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번엔 엘리아스를 노렸다.
칼릭스와 떨어지면 엘리아스는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마나를 수급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래서 이나는 엘리아스의 주변에 얼음 파편을 세웠다. 그리고 그것으로 엘리아스를 공격하는 척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감옥을 만들어 냈다.
“젠장.”
그사이 몸을 일으킨 칼릭스가 입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이나를 노려보았다.
“작작 하라고, 셀리나!”
그 순간 그녀의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가 만들어 낸 용과 싸우던 검은 드래곤이 어느새 바로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그 거대한 아가리를 쩍 벌리며.
“쿠어어어!”
“시끄러.”
이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쪽 손으로 귀를 막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뻗어 좌에서 우로 움직였다.
서걱-
그러자 드래곤의 몸이 반으로 깔끔하게 절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