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5화 (145/149)

‘젠장.’

시현은 속으로 욕을 흘리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아직 몸 상태가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합세해야 할 도하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다 낫지도 않은 몸으로 시현이 혼자서 엘리아스를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할 수 있을까.’

시현이 검 손잡이를 지그시 쥐었다.

그것을 본 엘리아스가 양손을 저었다.

[잠깐만요. 전 당신과 싸우러 온 게 아니에요.]

“그럼?”

시현이 날카롭게 물었다. 엘리아스는 조금 시무룩해졌지만 꿋꿋하게 말했다.

[당신이 왜 저를 경계하는지 알아요. 칼릭스와 함께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 경계하는 게 당연해요.]

“…….”

[하지만 그 모든 행동들이 제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저도 칼릭스에게 조종당하고 있었거든요.]

그 말에 검을 꺼내려던 시현이 멈칫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지금은 칼릭스에게서 벗어났다는 소리인가? 칼릭스는 확실히 죽었고?”

[네. 셀리나가 그를 해치우고 저를 구원했어요.]

“설령 칼릭스가 죽었어도, 지금도 그놈의 힘이 네 안에 남아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말을 어떻게 믿지?”

[그건…….]

엘리아스의 낯이 곤란함으로 물들었다.

엘리아스가 머뭇거리는 사이 시현도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하지.’

엘리아스의 말을 믿자니 불안하고, 안 믿자니 다른 대응을 할 수도 없었다.

엘리아스를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좋을 텐데.

시현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시현 씨!]

익숙한 부름이 들려 시현이 흠칫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이즈였다. 어디선가 뿅 나타난 이즈는 몹시 반가워하는 얼굴로 시현의 앞에서 방방 뛰었다.

[꺄악! 드디어 왔구나, 시현 씨!]

“이즈, 이리 오세요.”

시현은 다급하게 이즈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이즈가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응? 왜 그래?]

“저 정령은 적일지도 모릅니다. 언제 공격할지 모르니 제 곁에서 떨어지면 안 됩니다.”

[뭐어?]

이즈는 깜짝 놀라더니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냐, 시현 씨! 엘리아스는 적이 아니야!]

“네……?”

[물론 우리를 공격하긴 했지만 그건 칼릭스에게 조종당해서 그런 거였고, 지금은 맑고 깨끗한 기운밖에 안 느껴지는걸!]

“그럼…… 정말 조종이 풀렸다는 겁니까?”

[응!]

이즈가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시현이 멍한 표정을 짓는 사이 엘리아스가 안도했다.

[제 말은 안 믿어도 이즈의 말은 믿나 보네요. 다행이에요.]

“그…… 죄송합니다.”

그제야 시현은 엘리아스에게 사과했다. 어투도 존댓말로 돌아온 상태였다.

엘리아스는 그저 인자하게 빙긋 웃을 뿐이었다. 그에 시현이 더욱 민망해하고 있는데 이즈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오해는 풀린 거지?]

“일단은요.”

[다행이다. 엘리아스는 정말 적이 아니야. 이나도 구해 줬는걸!]

시현이 눈을 치켜떴다. 그토록 듣고 싶었던 이름이 드디어 나오자 그는 서둘러 이즈에게 물었다.

“이즈, 이나 씨는 어디 있습니까? 무사한 겁니까?”

[이나는 무사해! 엘리아스가 숨겨 줬거든.]

“다행…… 다행입니다.”

시현은 잠긴 목소리로 계속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헤헤 웃던 이즈가 돌연 난감해하는 표정을 띠었다.

[어……. 근데 있지…….]

“네.”

[으음…….]

이즈는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무언가를 말할지 말지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에 시현이 의아해하자 가만히 있던 엘리아스가 끼어들었다.

[이즈, 그건 직접 보여 주는 게 빠를 것 같아요.]

[응. 그러자.]

“무엇을 보여 준단 말입니까?”

결국 답답해진 시현이 물었다.

엘리아스는 대답 대신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엘리아스가 서 있는 땅의 옆쪽 땅이 열리더니 땅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끌어 올려졌다.

동시에 그 안에서 다른 정령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오! 드디어 왔군!]

[다행이에요……!]

“다들 무사했군요.”

시현은 이나의 정령들을 보며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어서 올라오는 무언가를 보자 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거대한 얼음이었다. 맑고 투명한 얼음 속에는 사람이 잠들어 있었다.

그 사람은 시현이 그토록 그리고 찾던 이나였다.

“이나 씨!”

시현은 다급하게 얼음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 간절한 눈빛으로 엘리아스를 돌아보았다.

“이나 씨를 꺼내 주세요. 부탁입니다.”

[그건 안 돼요.]

엘리아스는 미안해하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시현이 초조해하며 물었다.

“왜 안 된다는 말씀입니까?”

[셀리나의 몸은 현재 불안정해요. 여기서 꺼내게 되면…….]

“꺼내게 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얼마 못 가 죽을 거예요.]

시현이 숨을 흡 들이켰다. 얼음에 올린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엘리아스는 그와 얼음 속의 이나를 번갈아 보며 말을 이었다.

[칼릭스는 죽기 직전, 최후의 공격을 시도했어요. 셀리나를 포함해 던전의 모든 것을 파괴할 작정이었죠.]

“칼릭스가…….”

[저는 그때 깨어났어요. 칼릭스가 죽으면서 저를 조종하던 사악한 마력이 사라진 거죠. 셀리나와 반갑게 재회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어요. 셀리나도 정신을 잃은 상태였거든요.]

“…….”

[셀리나는 쓰러지고, 공격은 쏟아지고……. 그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한 가지뿐이었어요. 셀리나의 힘을 빌려 공격을 막는 것.]

“하지만 이나 씨도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맞아요. 셀리나는 마력 부족으로 정신을 잃은 상태였죠. 그래서 전 셀리나의 수명을 이용했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수명을 이용했다는 건…… 설마 이나 씨의 몸이 불안정해진 원인이 당신이라는 소리입니까?”

시현이 눈을 부릅뜬 채 엘리아스를 노려보았다. 당장에라도 엘리아스를 없애 버릴 것 같은 눈빛이었다.

엘리아스는 변명하지 못했다. 그저 사과를 전할 뿐이었다.

[미안해요. 그 방법밖에는 없었어요.]

“젠장!”

시현이 욕을 크게 내뱉으며 바닥을 내려쳤다. 그 모습을 보며 엘리아스와 정령들이 어쩔 줄 몰라 했다.

시현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그렇게 나가 버리는 게 아니었는데. 제 상처가 벌어질지언정 이나의 곁에 남아 있었어야 했는데.

뼈아픈 후회가 그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었다. 시현은 결국 이나의 앞에 주저앉으며 흐느꼈다.

그 모습을 다른 정령들과 함께 훌쩍거리며 지켜보던 이즈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시현에게 말했다.

[걱정 마, 시현 씨! 엘리아스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댔어!]

“네……?”

시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곧바로 엘리아스에게 향했다.

“그게 사실입니까?”

[어쩌면요.]

“방법이 뭡니까?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시현이 눈물도 채 닦지 않고 다급히 물었다.

엘리아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시현, 이라고 했나요. 혹시 자연에 어떤 속성들이 있는지 아나요?]

“네?”

그의 물음에는 대답해 주지 않고 질문을 던지는 엘리아스를 보며 시현이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마음이 조급한 시현이었지만 엘리아스가 답을 바라는 눈빛을 하자 그는 망설임 끝에 대답했다.

“……이나 씨의 정령들만 봐도 답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물, 바람, 불, 땅, 전기, 얼음……. 다양한 속성이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맞아요.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속성이 뭔지 알아요?]

“그게 뭡니까?”

[생명이에요.]

시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리아스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모든 자연에는 생명력이 깃들어 있어요. 그건 정령이라고 다르지 않죠. 저도, 이즈도, 그리고 다른 정령들도. 모두 생명이라는 속성을 품고 있어요. 자연 없인 생명이 존재할 수 없지만, 그 반대도 마찬가지거든요.]

“엘리아스, 설마 이나 씨를 살릴 방법이라는 게…….”

시현이 무언가를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정답이라는 듯 엘리아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맞아요. 지금부터 저는 제 생명의 속성을 셀리나에게 줄 거예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그때 얼음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현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얼음 속에서 깨어난 이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나 씨! 깨어난 겁니까? 몸은…… 몸은 어떻습니까?”

“죽을 것 같아요.”

이나가 과장을 섞어 대답했다. 사실 그대로 두면 죽을 몸이었기에 사실과 다름없었지만.

이나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시현이 얼굴을 굳혔다. 그에 민망해진 이나가 픽 웃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아닌 거 다 압니다.”

시현이 울적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대체 왜 그런 겁니까? 대체 왜…….”

“시현 씨가 자기 몸을 희생한 것과 같은 이유죠, 뭐.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었으니까.”

이나의 그 말에 시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차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사이 엘리아스가 이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셀리나. 새롭게 주어진 삶은 어떤가요?]

“좋았는데, 너 때문에 안 좋아질 것 같아.”

이나가 얼굴을 살짝 굳힌 채 말했다.

“엘리아스, 나 때문에 너를 희생하지 마. 너에겐 너의 삶이 있잖아.”

[맞아요. 저에겐 저의 삶이 있죠. 그러니 제 삶은 제가 쓰고 싶은 대로 쓸 거예요. 셀리나를 살리는 데에.]

“엘리아스.”

[셀리나, 저에겐 남은 시간이 별로 없어요.]

그 말에 이나가 멈칫했다. 엘리아스는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오래 살아서 얌전히 소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칼릭스에게 잡혀 왔어요. 그리고 그에게 착취당하면서 제 소멸은 더욱 앞당겨졌죠.]

“…….”

[정령으로서는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생명이지만, 셀리나에게는 인간으로서 적당한 삶을 살 정도는 될 거예요. 그러니 전 셀리나에게 제 생명을 주고 싶어요.]

“엘리아스…….”

[그리고 제가 원했던 대로 잠시나마 어린 정령들을 돌보기도 했고요. 이젠 정말 더 원하는 것이 없어요.]

엘리아스가 이나의 정령들을 보며 말했다. 정령들은 슬픈 눈으로 엘리아스에게 물었다.

[엘리아스, 죽는 거야……?]

[죽는 게 아니에요. 자연으로 돌아가는 거죠. 저는 언제나 여러분의 곁에 있을 거예요.]

엘리아스가 빙긋 웃었다. 아무래도 결심이 확고한 모양이었다.

이나는 한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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