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바로 시작할게요.]
엘리아스가 이나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얼음을 깨뜨렸다. 그러자 이나가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시현이 그녀의 몸을 받아 내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엘리아스는 이나의 축 늘어진 손을 잡아 들어 올렸다.
이나는 엘리아스와 맞잡은 손을 타고 생명의 기운이 제게 흘러들어 오는 것을 느꼈다.
엘리아스에게 주어졌던 생명의 속성이었다.
“그런데 엘리아스,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겁니까? 이나 씨를 찾으려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왔었는데 말입니다.”
시현이 혼자 궁금해하던 것을 엘리아스에게 물었다. 그러자 엘리아스가 후후 웃었다.
[아무에게나 셀리나를 넘길 순 없죠. 그래서 셀리나가 가장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렸어요.]
“가장 특별하게……?”
[자세한 건 셀리나에게서 듣는 편이 좋겠네요.]
시현이 곧바로 제 품에 안긴 이나를 내려다보았다. 이나는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홱 피했다.
“엘리아스, 쓸데없는 소리를…….”
[왜요? 저는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요?]
“하아…….”
“이나 씨?”
시현이 답을 갈구하는 눈빛으로 이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나는 그에게 대답을 해 주지 못했다.
엘리아스의 몸이 점점 투명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나는 씁쓸해하는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이제 가는 거야?”
[네. 가야죠.]
[엘리아스…….]
정령들이 훌쩍이며 그녀의 소멸을 지켜보았다. 이나와 시현도 마찬가지였다.
엘리아스는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다시 만나서 반갑고 좋았어요, 셀리나. 부디 이번 생에선…….]
엘리아스가 눈을 감았다. 빛이 되어 사라지는 엘리아스를 보며 이나는 제 정령의 마지막 말을 머리에 각인시켰다.
[모두와 함께 행복해지기를…….]
“응. 그럴게.”
이나는 나지막하게 대답하며 엘리아스와 닿았던 손을 움직였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던 몸에 생기가 가득했다. 엘리아스가 그녀에게 넘긴 생명의 속성 덕분이었다.
이나는 시현의 품에서 벗어나 제 발로 섰다. 잠시 몸을 움직여 보던 이나가 시현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괜찮은 것 같네요.”
하지만 시현의 표정은 뚱했다. 그에 이나가 의아해하며 바라보자 그가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나 씨를 감금하고 싶습니다.”
“네, 네?”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던전에도 못 가게 하고, 다신 희생하지 못하게 하고 싶습니다.”
“이제 그럴 일 없어요. 칼릭스도 없잖아요.”
“제가 불안해서 안 될 것 같습니다.”
시현의 표정이 슬프게 변했다.
“다신 이런 일…… 겪고 싶지 않습니다.”
그제야 이나는 자신이 시현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미안해하는 얼굴로 시현의 양손을 쥐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그만큼 지키고 싶었어요. 시현 씨를, 도하 씨를, 그리고 모두를.”
“…….”
“하지만 그중에서도 시현 씨를 제일 지키고 싶었어요.”
시현이 고개를 들었다. 이나는 미소를 띤 채 말을 이었다.
“그야 시현 씨는 저에게 정말 특별한 사람인걸요.”
“특별한 사람이라는 게…….”
“좋아하니까요.”
시현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제가 들은 게 현실의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듯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이나는 다시 한번 힘차게 말했다.
“좋아한다고요, 시현 씨! 제 말 들려요? 들리면 대답 좀……. 흡!”
이나는 그녀를 덮쳐 오는 입술에 가로막혀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어색하게 그를 받아 내던 그녀의 입술이 점차 농밀하게 움직였다.
한참을 그와 입술을 나누던 이나는 손가락 사이로 눈을 빼꼼 내미는 정령들과 눈이 마주치고서야 시현을 팍 밀어냈다.
“그,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니에요?”
이나의 얼굴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시현은 방금 전 입맞춤으로는 부족했는지 아쉬워하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이나 씨가 참을 수 없게 만들었지 않습니까.”
“제, 제가 언제요!”
“지금도…….”
“이나야!”
그때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이나도 시현도 고개를 홱 돌렸다.
이한이 다른 헌터들과 함께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다른 쪽에선 도하가 아란을 타고 다가왔다.
이나는 왠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이한을 불렀다.
“오빠!”
“이나야!”
이한은 그녀의 앞에 당도하자마자 이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눈물을 주룩 흘렸다.
“이나야, 이나야…….”
“미안해, 오빠. 많이 기다렸지? 정말 미안해…….”
이나가 이한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계속 사과를 전했다. 그럴수록 이한은 말을 삼키고 눈물만 더 쏟아 낼 뿐이었다.
시현을 포함한 모두가 그 모습을 훈훈하게 바라보았다. 도하는 코끝이 찡한 나머지 고개를 홱 돌리기도 했다.
“젠장. 눈에서 땀이 흐르네.”
“울고 싶으면 울어.”
“시끄러!”
시현의 말에 도하가 붉어진 얼굴로 소리를 빽 질렀다. 시현은 그를 보며 픽 웃다가 이제야 대화를 나누는 이나 남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야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
시현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와 이나의 관계마저도.
‘왜지?’
그가 꿈을 꾼 것은 아니었다. 이나와 닿았던 입술의 감촉이 아직까지도 생생하니까.
하지만 그 일이 있은 뒤로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이냐. 바로 이나가 바쁘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시현 씨. 오늘 쌍둥이의 거취를 서준 씨와 의논해야 해서요. 다음에 만나요.”
“미안해요! 오늘은 루엔의 국적을 한국으로 바꿔야 해서 헌터 협회에 방문해야 해요. 시간 될 때 연락할게요.”
이런 식으로 만남을 거절당하기를 벌써 여러 차례였다.
시현은 뚱한 얼굴로 제 앞에 놓인 핸드폰을 노려보았다.
‘이제 더 이상 못 참아.’
사람들은 그를 두고 태평양과 같은 인내심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시현도 한때는 같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의 인내심이 드디어 한계점에 도달했다.
시현은 옷걸이에 걸어 놓은 외투를 잡아채고 길드장실을 나갔다.
마침 들어오려던 참이었는지 그의 길드원이 문 앞에서 해맑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서류를 양손에 잔뜩 든 채로.
“아, 길드장님! 문 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노크를 하려고 했는데. 이거 모두 내일까지 처리해야 하는…….”
“미안하지만 다음에 하죠.”
“네? 길드장님? 길드장님!”
길드원은 저를 지나쳐 빠르게 걸어가는 시현의 뒷모습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기셨나……?”
***
“으으……. 드디어 끝!”
“고생하셨어요, 스승님.”
루엔이 이나에게 짝짝 박수를 보냈다. 이나는 지친 얼굴 위로 애써 미소를 그려 보였다.
오늘 드디어 루엔의 국적이 한국으로 바뀌었다. 이름도 ‘루크 프리먼’이 아닌 ‘루엔’이라는 이름 그대로 돌아왔다.
그 과정에서 영국 헌터 협회의 반발이 있긴 했지만 그들의 항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루엔이 더 이상 각성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세계적으로 공표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그의 정령이 소멸되었으며 더 이상 새 정령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입장문을 공표한 것이지만, 그게 그 의미였기 때문에 영국 헌터 협회도 더 이상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국의 정령사 루크 프리먼이지 비각성자인 루엔이 아니었으니까.
그 사실이 이나는 조금 아니꼬웠지만 결과적으로는 좋게 해결됐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일도 끝났겠다, 루엔, 먹고 싶은 거 없어? 배고픈데 밥이나 먹으러 가자.”
“그 전에, 스승님.”
루엔이 갑자기 싱긋 웃자 이나가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루엔은 그녀의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전에 만나야 할 분이 계신 거 같은데요.”
“응?”
이나는 그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가운 얼굴이 보이자 이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 시현 씨!”
이나는 그를 향해 팔을 붕붕 흔들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뚱한 얼굴이 말랑해질 뻔했지만 시현은 애써 참아 내며 이나의 앞으로 걸어갔다.
이나는 여전히 환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협회에 볼일이라도 있어요?”
시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두 사람은 현재 사귀는 사이였다. 그런데 이나는 왜 자신이 이나를 찾아왔다는 생각은 안 하는 걸까.
‘아니, 잠깐.’
문득 스치는 생각에 시현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키스만 나누고 그 누구도 정작 사귀자는 말을 하진 않았던 것이다.
설마 그래서 그런 건가?
시현이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기자 이나도 슬슬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시현 씨? 무슨 일 있어요?”
“이나 씨.”
“네. 말해 보세요. 다 들어 줄게요.”
“좋아합니다.”
순간 협회 로비에 정적이 흐른 듯했다.
루엔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팝콘이 옆에 있었다면 당장 구매했을 듯한 눈빛이었다.
반면 이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잔뜩 당황해 했다.
“무, 무슨 그런 말을 이런 곳에서……!”
“이나 씨도 저를 좋아한다고 하셨으니, 저희는 사귀는 게 맞습니까?”
“그야 당연……. 아니, 그런 말은 이런 데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하라고요!”
“다른 곳이라면 어떤…….”
“이런 탁 트인 공간 말고, 가능하면 둘만 있는 곳에서…….”
퍽! 데구루루-
갑자기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이나는 뒤를 홱 돌아보았다. 그곳엔 여기 있어선 안 될 인물이 서 있었다.
“오, 오빠.”
“이나야…….”
이한이 잔뜩 충격받은 얼굴로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한참을 굳은 듯 서 있던 그는 이내 떨리는 손을 말아 쥐어 주먹을 만들었다.
이한이 그 상태로 시현을 향해 빠르게 걸어오자 옆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이한의 팀원들이 그를 붙잡았다.
“막아!”
“아이고, 팀장님! 좀 진정하세요!”
“이거 놔! 놓으라고!”
이한이 이성을 잃은 듯 소리를 질렀다. 주변 사람들이 이한은 물론 이나와 어리둥절해하는 시현까지 핸드폰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그 속에서 이나는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개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