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점점 몰려오자 이한은 결국 이나의 손을 붙잡고 헌터 협회 직원들을 위한 휴게실로 올라갔다.
시현은 그 자리에 버려두고.
휴게실에 들어온 이한은 이나를 자리에 앉히고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에게서 살기 어린 기운이 고오오 뿜어져 나왔다.
휴게실 안에 있던 직원들이 눈치를 보다 결국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이나는 괜히 그들에게 미안해졌다.
이한이 이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인데 왜 이렇게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지는 이나도 알 수 없었다.
이나가 애써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이한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이나야.”
“으, 응?”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이시현 헌터가 너를 좋아하는 것 같던데.”
“살다 보면 고백 한 번쯤이야 받아 볼 수도 있는 거지, 뭐.”
“듣자 하니 너도 이시현 헌터를 좋아한다고 했다고?”
젠장. 거기까지 들었나.
민망한 기분이 들어 이나의 귓불이 붉어졌다.
당사자인 시현과 해도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오빠인 이한 앞에서 하려니 그냥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다.
이나가 아무 말도 못 하자 이한이 이를 으득 갈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리고…… 둘이 사귄다고.”
“음. 그렇게 됐어.”
“언제부터?”
“얼마 안 됐어. 일주일 정도밖에……. 아니지. 시현 씨가 오늘 못을 박았으니 오늘이 1일인가?”
“그놈이 사귀자고 제대로 말도 안 한 거야?”
이한이 뭐 그런 놈이 있냐는 듯 눈을 치켜뜬 채 물었다. 이나는 뺨을 긁적이다 은근슬쩍 시현을 변호했다.
“아니, 뭐…… 꼭 사귀자고 말을 해야 사귀는 건가. 좋아한다고 하고 그걸 받아 주었으면 그게 사귀는 거지, 뭐.”
“마음에 안 들어. 나중에 딴 여자 생기면 내가 언제 사귀자고 한 적 있냐면서 발뺌할 녀석 같잖아!”
“오빠, 최근에 드라마 뭐 봤어?”
“애인의 복수…….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라!”
이나가 짜게 식은 눈으로 쳐다보자 이한이 큼큼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근엄한 얼굴로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그놈 반대야.”
“오빠는 내가 누굴 만나든 반대할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그놈은 더 반대야!”
“왜?”
“이시현 헌터는 원체 무뚝뚝하잖아. 게다가 그 사람을 좋아하는 여자가 좀 많아? 팬 카페까지 있잖아. 분명 너를 힘들게 할 거야.”
“오빠가 못 봐서 그래. 시현 씨도 알고 보면 자상한 남자라고. 팬 카페 정도야 뭐, 나도 있고.”
생긴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이나에게도 소수 규모의 팬 카페가 있었다. 심지어 이한도 그 카페에 가입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팬 카페로 시현을 깎아내리려는 게 황당해서 이나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한은 잠시 당황해 하다가 갑자기 침울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너에게는 평범한 삶이 어울려. 너도 그걸 원했잖아. 이시현 헌터와 사귀면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큰 화젯거리가 될 거야.”
그건 사실이었다. S급 헌터끼리의 교제는 꽤나 드문 일이니까.
게다가 대상이 국내 톱 랭크라 불리는 두 사람이라면 더더욱.
이한이 걱정하는 바는 이나도 알고 있었다. 그는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할 이나를 걱정하고, 또 그로 인해 그녀가 구설수에 오를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알고 있기에 이나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었다.
“오빠, 난 유이나야.”
“응?”
“내가 유명해지든 유명해지지 않든 나는 유이나로서의 삶을 살 거야. 전처럼 슬리퍼 끌고 집 앞에 떡볶이 사러도 가고, 친구들 만나 카페에서 수다도 떨면서. 물론 가끔 던전도 클리어해 주고. 하지만 바뀌는 건 없을 거야.”
“…….”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 말을 신경 쓰는 타입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이나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이한은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 틈을 노려 이나는 못을 박으려 했다.
“그럼 이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다 해결된 거야?”
“아니. 아직.”
이한의 표정이 돌변했다. 다시 무섭게 일그러뜨린 얼굴로 그가 말했다.
“이시현 헌터를 만나 봐야겠어. 내가 직접 보고 어떤 놈인지 알아낼 거야.”
“시현 씨도 바쁜 사람인데 꼭 그래야겠어?”
이나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하지만 이한의 고집은 꺾기가 어려워 보였다.
그때 누군가가 휴게실 문을 두드렸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한의 팀원이 문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말했다.
“저어…… 유 팀장님, 이시현 헌터가 유 팀장님을 뵈러 찾아왔는데요.”
“마침 잘됐네. 들어오라고 해.”
이나는 문득 직원 휴게실에서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곧이어 모습을 드러내는 시현을 보자 걱정이 싹 날아갔다.
“시현 씨.”
이나가 반갑게 손을 흔들자 시현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는 곧장 이나에게로 걸어오려 했지만 이한이 그 앞을 막아섰다.
“전 아직 두 사람의 교제를 허락한 게 아닙니다.”
이한의 말에 시현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더니 시현이 진지하게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말이 통해서 좋네요.”
이한은 픽 웃더니 다시 근엄한 얼굴로 돌아왔다.
“오늘 밤에 저랑 술 한잔 하시죠.”
“술…… 말입니까?”
“네. 장소는 헌터 협회 근처 포장마차, 시간은 밤 아홉 시. 뭐, 싫으면 말고요.”
“아닙니다. 가겠습니다.”
시현이 결국 승낙하자 이한이 씨익 웃었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물론.
‘저게 다 뭐 하는 짓이람.’
지켜보던 이나는 한심함에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
약속 장소와 시간이 정해지자 이한은 그 전에 일을 끝내 놓기 위해 자리로 돌아갔다.
일이 있는 것은 시현도 마찬가지였다. 이나는 루엔을 데리러 갈 겸 그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협회에서 소란이 있었다고 하더니.”
그때 누군가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그는 이나와 시현을 번갈아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두 분 때문이었군요.”
“서준 씨.”
이나가 반갑게 그를 불렀다. 반면 시현은 그를 보고서도 마냥 반가워하지 못했다.
서준은 이나를 좋아하니까.
전에는 K 탓에 협력자로서의 관계가 강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적은 사라졌고, 이제 시현은 이나와 교제 중이었다.
시현이 은근슬쩍 이나의 앞을 막아섰다. 그의 눈에 경계심이 어렸다.
그것을 느낀 서준이 싱긋 웃었다. 시현은 그의 미소를 보고 멈칫했다.
마치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위화감의 이유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소식 들었습니다. 두 분이 사귀신다고요.”
“그게 벌써 서준 씨 귀에도 들어갔어요?”
이나가 뺨을 붉게 물들이며 물었다. 서준은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더니 그들에게 화면을 보여 주었다.
“그야 벌써 기사도 났는걸요.”
“맙소사.”
이나가 얼굴을 손에 파묻었다.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는 그녀와 달리 시현은 여전히 경계 어린 눈으로 서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준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축하드립니다. 두 분 다.”
“……!”
시현은 몸을 움찔 떨었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곧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떠올렸다.
“감사합니다.”
시현은 서준이 전하는 축하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진심을.
그래서 경계를 거두고 그의 축하를 받아들였다.
날카로운 기운을 뿜다가 갑자기 잠잠해지는 시현을 보며 이나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서준이 두 사람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두 분, 식사는 하셨나요?”
“아뇨. 슬슬 먹으려고 했어요.”
“저도 아직 안 했습니다.”
“마침 잘됐군요. 그럼 다 같이 식사나 하시죠. 청호 길드장님과 루엔 씨도 부를까요?”
“좋아요. 루엔은 제가 데려올게요. 근처 카페에 잠깐 가 있으라고 했거든요.”
이나가 반색하며 정령들과 함께 잠시 자리를 벗어났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서준이 장난스럽게 시현에게 말했다.
“우리 중에서 가장 숫기가 없던 분이 이나 씨를 쟁취했군요.”
시현은 뭐라고 맞받아쳐야 할지 몰라 입을 달싹거렸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뭐가 말입니까? 설마 이나 씨를 쟁취한 거요?”
“아뇨. 본부장님의 진심을 경계한 것 말입니다.”
“아.”
그제야 그의 마음을 읽은 서준이 머쓱하게 웃었다.
“제가 말한 이유가 아니어서 다행이에요. 그런 이유였으면 화내려고 했거든요.”
“그 점에 대해선 전혀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서준이 싱긋 웃더니 이나가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속이 쓰린 건 사실입니다. 그만큼 제가 이나 씨를 많이 좋아했거든요.”
“…….”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제 아무렇든 어떠랴 싶어졌습니다.”
멀리서 이나가 루엔을 데리고 달려오고 있었다. 서준은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이나 씨가 모든 걱정을 털고 저렇게 활짝 웃는걸요.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천조 길드장님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알 것 같습니다. 천조 길드장님이 우리 중에서 누구보다 이나 씨를 걱정하고, 이나 씨의 상처를 보듬어 주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런진 몰라도 생각했던 것만큼 속이 쓰리진 않은 것 같습니다.”
서준이 시현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맞부딪치자 서준은 부드럽게 미소를 띠었다.
“그러니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이나 씨를 행복하게 해 주세요.”
“……명심하겠습니다.”
시현이 마치 맹세하는 것처럼 진지하게 대답했다. 서준은 결국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점이 너무나 그다워서 도저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