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알고 있었어.”
이나와 시현이 사귄다는 말을 듣고 도하가 한 말이었다.
그는 큼지막하게 썬 스테이크 고기를 입에 가득 넣고 우물거렸다. 옆에서는 아란이 자기 몫의 고기를 열심히 물어뜯고 있었다.
이나는 의외라는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알고 있었다고요? 어떻게요?”
“둘이서 그렇고 그런 기운을 그렇게 내뿜는데 어떻게 모르겠냐.”
도하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괜히 민망해진 이나는 헛기침을 큼 내뱉었다.
반면 시현은 도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도하 또한 이나를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하는 고기를 입에 집어넣으려다 시현과 눈이 마주치고 멈칫했다. 그러더니 씨익 웃었다.
늘 짓곤 하던 투기 어린 미소가 아닌, 시원시원한 미소였다.
“잘해 줘. 유이나 괜찮은 여자잖아. 잘 못하면 내가 찾아가서 팰 줄 알아.”
시현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이 저에게 대답할 때와 같아서 서준은 또다시 쿡쿡 웃고 말았다.
그 모습을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바라보던 이나가 도하에게 말했다.
“시현 씨한테 부담 주지 마요. 안 그래도 오빠라는 벽이 있는데.”
“유이한 씨 말입니까?”
서준이 의아해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이나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저를 워낙에 과보호하잖아요. 이번 일 알게 되자마자 시현 씨와 대화를 나눠 봐야겠다면서 밤에 포장마차에서 만날 약속을 잡았어요.”
“와. 엄청 부담스럽겠다.”
도하가 질린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한이 이나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세 사람 모두 같은 표정이었다.
늘 먼발치에서 이한을 보기만 했던 루엔만이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물을 뿐이었다.
“스승님을 아끼시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인가요?”
“말도 마. 아주 감싸고돈다니까.”
도하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이나는 괜히 민망해져서 옆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그러고는 탁, 소리를 내며 컵을 내려놓고 시현에게 당부했다.
“아무튼, 무슨 일이 생기면 저를 불러요. 알겠죠? 오빠는 그래도 제 말에는 꼼짝도 못 하니까……. 아니면 제가 같이 갈까요?”
“아뇨. 저 혼자 가겠습니다. 이나 씨에게 전화할 일도 없을 겁니다.”
의외의 말이 시현의 입에서 들리자 이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서준이 그에게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유이한 씨는 만만치 않은 상대일 텐데요.”
“이나 씨에게 의존했다간 우스워 보이기만 할 뿐입니다. 저는 유이한 씨에게 인정받아서 당당하게 이나 씨의 옆에 서고 싶습니다.”
“이야. 멋진데?”
도하가 히죽 웃으며 장난을 던졌다. 시현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이나에게 말했다.
“그러니 이나 씨는 집에서 얌전히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유이한 씨와의 대화가 끝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으음……. 알겠어요.”
이나는 불안한 눈치였지만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녀를 생각하는 시현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시현은 싱긋 웃고는 식사를 이어 나갔다. 그러면서 흘끗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 시간은 오후 두 시.
남은 일곱 시간 동안 길드 업무 외에 할 일이 있었다.
***
밤이 깊어지자 헌터 협회를 포함한 회사들 근처에서 포장마차들이 영업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이한은 그중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한 뒤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까지 5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아직 시현은 오지 않은 상태.
이한은 팔짱을 끼고 포장마차 바깥쪽을 응시했다.
“나보다 늦게 오다니. 기본자세가 틀려먹었네.”
이한이 조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그는 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이나가 데려오는 모든 남자가 싫긴 했겠지만 말이다.
이한은 부모님을 대신해 이나를 키웠다.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런 소중한 동생이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니.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우선 이한 자신을 통과해야 했다.
물론 그는 자신이 팔불출이라는 것도 인정했다. 그런데 그걸 인정하고 나니 더더욱 그 어떤 남자도 이나의 상대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거였다. 그 스스로 상대의 속내를 알아내기 위해.
이한은 미리 주문한 안주를 깨작거렸다. 그러는 사이 시현이 그가 있는 포장마차에 도착했다.
“아.”
시현이 이한을 발견하고는 그가 있는 테이블로 다가왔다.
이한을 만나러 온 시현의 옷차림은 단정하고 멋스러웠다. 그는 흰색 셔츠 위에 검은 니트 조끼를 입고, 그 위에는 얇은 네이비색 재킷을 걸친 채였다.
바지는 베이지색의 일자바지. 매일같이 던전을 도는 탓에 잘 신지 않는 구두까지 신고 온 그는 이한 앞에서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이한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주욱 훑었다.
‘날 만나러 온다고 신경 좀 쓴 건가?’
물론 그렇다고 쉽게 이나를 내어 줄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이한은 속으로 픽 웃으며 그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앉으세요.”
“네.”
시현이 이한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무언가를 그에게 건넸다.
“오는 길에 사 왔습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이한은 눈을 깜빡거리며 시현이 건네는 쇼핑백을 바라보았다.
척 봐도 비싼 브랜드의 쇼핑백이었다. 슬쩍 쇼핑백 틈을 열어 보니 길쭉한 검은색 상자가 들어 있었다.
이한은 그에게 물었다.
“이게 뭡니까?”
“손목시계입니다. 이한 씨께 드리는 뇌물이기도 하고요.”
“……보통 자기 입으로 뇌물이라고 잘 안 하지 않아요?”
“그렇습니까?”
시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한은 그 모습을 보며 허,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 청렴결백하다고 소문난 천조 길드장님께서 뇌물이라니. 이시현 헌터한테서 이런 걸 받았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놀라겠네요.”
“나쁜 걸 드리는 건 아니니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그만큼 유이한 씨의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이한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는 쇼핑백은 옆으로 밀어 놓고 시현의 앞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이런 걸로 제 환심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다면 큰 오산입니다. 제가 궁금한 건 이 쇼핑백 안이 아니라 이시현 헌터님의 속내니까요.”
“이나 씨를 향한 제 마음은 진심입니다.”
“그건 두고 보면 알겠죠. 자, 드시죠.”
이한이 시현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시현은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S급 헌터가 되면서 술에는 내성이 생긴 지 오래입니다. 잘 취하지 않을 겁니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제가 취하려고 먹는 거니까. 대충 장단만 맞춰 주세요.”
이한이 자신의 술잔에도 술을 따라 빠르게 원샷 했다. 그에 시현도 따라서 술을 마셨다.
이한은 잔을 내려놓고 입술 틈새로 크읍, 하고 신음을 흘렸다. 평소 술을 즐기는 타입은 아닌 듯했다.
그는 빠르게 안주를 입에 집어넣고는 샐쭉한 눈으로 시현을 쳐다보았다.
“이시현 헌터는 우리 이나를 왜 좋아하는 겁니까? 예뻐서? 강해서?”
이 질문의 의도는 정해져 있었다. 이한은 상대가 이나의 모든 것을 좋아하길 원했다.
단순히 외모나 능력에 빠졌다고 한다면 그는 당장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생각이었다.
이한의 질문을 들은 시현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강하고, 또 따뜻해서입니다.”
“강하다는 건 무슨 뜻이죠? 능력을 말하는 건가요?”
“아뇨. 내면의 강함을 말하는 겁니다.”
의외의 답이었는지 이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시현은 조금 부끄러운 듯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이나 씨는 출중한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자만하지 않고, 오히려 더 열심히 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죠. 그것이 존경스럽고, 또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이나가 좀 그렇죠.”
이한의 입꼬리가 순간 씰룩 움직였다. 동생이 칭찬받으니 어쩔 수 없이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첫 번째 고비는 넘긴 건가.’
시현은 내심 안도하며 안주로 나온 음식을 집어 먹었다. 하지만 긴장을 풀 순 없었다.
이한이 두 번째 질문을 날린 탓이었다.
“그럼 이시현 헌터는 만약 던전 브레이크가 터진다면 이나와 시민들 중 누구를 먼저 구할 겁니까?”
“그건…….”
질문의 의도가 애매했다. 이나는 던전 브레이크가 터진다고 죽을 사람이 아니니까.
시현이 이나를 믿고 당연히 시민들부터 구할 거라 대답하려 하는데, 이한이 말을 덧붙였다.
“이나가 위험에 처했다는 조건하예요.”
“……!”
그제야 시현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시민들을 구한다고 대답하면 이한은 분명 ‘우리 이나는 어쩌고!’ 하면서 화를 낼 터였다.
하지만 반대로 이나를 구한다고 하면 힘없는 시민들을 외면하는 매정한 사내로 찍힐지도 몰랐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시현이 고민하는 사이 이한이 대답을 재촉했다.
“얼른 대답해 보세요.”
“저는…….”
시현은 대답을 망설이다 결국 솔직히 대답했다.
“시민들을 구할 것 같습니다.”
“하! 우리 이나는 위험 속에 던져 놓고요?”
“아까 말했다시피 이나 씨는 강합니다. 능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시현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이한이 눈을 가늘게 떴지만 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나 씨라면 분명 그 상황에서 제가 시민들을 먼저 구하길 원할 겁니다. 저는…… 이나 씨의 말을 거부할 수 없을 테고요. 저와 이나 씨 모두 헌터니까요.”
“…….”
“그리고 이런 선택을 한 건 이나 씨를 믿기 때문도 있습니다. 이나 씨는 강하니까요. 하지만 만약, 이나 씨가 제게 도움을 청한다면.”
시현이 눈빛을 비장하게 바꾸며 말했다.
“저는 주저 없이 이나 씨를 구할 겁니다.”
“……하아.”
이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었다. 시현이 내뱉은 대답들 중 어느 하나 그의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없었다.
이한은 직감했다. 앞으로의 질문에 대한 대답도 비슷할 거라고.
이한은 술병째로 술을 벌컥벌컥 마셨다. 시현이 깜짝 놀라 제지하려 했지만 이한이 막고 다음 질문을 뱉었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이시현 헌터는 앞으로 이나와 뭘 하고 싶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