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15화 (16/208)

15화.

원래 돈 것 같은 놈이 저렇게 말하니 뭐라고 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떨떠름하게 쳐다보는데 황태자가 시선을 미끄러뜨려 내 방을 둘러보았다.

곧 그의 시선이 내게 다시 돌아왔다.

“들어가도 될까?”

저놈에게 남의 성벽을 넘고 건물을 기어오르는 건 주거침입에 해당하지 않는 듯하다. 이제 와 뻔뻔하게 허락을 구하는 걸 보면.

“안 돼?”

“되겠어요?”

당연한 물음에 나도 모르게 예의 없는 반문을 하고 말았다.

황태자의 사회적 지위가 그제야 생각나 아차 싶었지만, 이미 뱉은 거 나도 까칠하게 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아무리 황태자라지만, 이 자식도 갑자기 말이 짧아져서 솔직히 심기가 불편했다.

여기 남주들은 왜 말부터 놓고 보는 걸까.

물론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조용히 속으로 욕하고 있는데 황태자가 갑자기 빵 터져 웃기 시작했다.

커지는 웃음소리를 따라 내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왜 웃으세요?”

그는 웃음의 여운을 즐기며 나른한 숨을 흘렸다.

“그때랑 너무 달라서.”

“그때 제가 어땠길래 이렇게 미친…… 시원하게 웃으세요?”

“그땐 무서워서 덜덜 떨더니 지금은 좀 뭐랄까.”

그는 잠시 녹음이 이는 정원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어둡게 가라앉은 눈으로 다시 나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겁이 없어 보이네.”

인정하기 싫은데 솔직히 좀 쫄았다.

아니, 진짜 무서워 쟤.

쟤 정말 히든 남주 후보 맞아?

“그렇다고 겁먹지는 마. 칭찬으로 한 말이니까.”

그래도 내가 계속 얼어붙어 있자 황태자가 미소를 지으며 제 손을 들었다.

손바닥으로 바람을 들어 올리듯 가벼운 손짓이었다.

사아아아.

귓가로 무언가가 피어나는 소리가 들리며 달콤한 향기가 밀려왔다.

침대 원목을 따라 붉은 꽃들이 한 송이씩 피어났다.

순식간에 만개한 꽃들이 침대를 가득 채우는 바람에 나는 얼떨결에 꽃에 갇혀 버렸다.

당황하는데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선물. 남의 집에 오면서 빈손으로 오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낯선 서양 황태자의 입에서 엄마한테 듣던 방문 예절이 흘러나오니 기분이 묘해졌다.

역시 K-게임 세계관.

아무리 하드웨어를 서양식으로 설정해도, 소프트웨어는 한국식 가정교육을 벗어날 수 없나 보다.

게임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쟤가 아무리 무서워 봤자 한낱 캐릭터일 뿐이잖아.

마음이 편안해진 나는 내 코앞까지 핀 꽃 한 송이를 집었다.

그것을 만지작거리다 황태자를 올려다봤다.

그는 계속 나를 보고 있었는지 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분명 눈웃음을 짓고 있는데 기묘하게도 그의 금안은 맹금류의 눈처럼 날카롭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 낚아채일 것 같은 기분.

“제가 이에테르 공작가에 있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난 모르는 게 없어.”

“카이엘드 공작님이 말해 줬어요?”

황태자의 개소리를 무시하며 엘런을 입에 담자, 그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엘런이 그런 걸 말해 줄 성격이 아니잖아. 고지식한 걸로 엘런을 이길 인간이 있을지 모르겠네.”

그는 가볍게 흥얼거리듯 엘런을 까다 주머니에서 금빛 회중시계를 꺼냈다.

“엘런이 여자 만나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오늘 2시에 레이디랑 식사를 한다길래 그대인가 했지.”

탁, 시계를 접으며 그가 다시 나를 바라봤다.

“내 생각이 맞았고.”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어요?”

“엘런이 이에테르 공작가로 에스코트를 하러 간다길래 알아봤어.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그는 당당하게 내 뒷조사를 했다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 봄국 남부 에스텔라 남작가의 외동딸. 몸이 안 좋아 밖에 나가지 못하고, 집 안에서 필사만 하는 조용한 남작 영애.”

그는 알아낸 내 신상을 읊기 시작했다.

“반대로 에스텔라 남작 부부는 사회봉사에 관심이 많아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더라고. 그런 지루한 정보들을 듣다 재밌는 걸 발견했어.”

그는 입매를 기울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남작 부부가 겨울국 재건 협회를 후원했더군.”

와…….

나 진짜 억울했다.

내가 빙의했을 때 이미 남작 부부는 죽은 뒤였다.

그런데 이놈은 내가 흑막 부부의 딸, 흑막의 일원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겨울국과 관련이 없어요.”

“그건 내가 차차 확인해 보려고.”

“어떻게 확인하시게요?”

“일단 옆에 두고 지켜봐야겠지.”

지금 프리마돈나 영애 집에서 덕질하려고 외박하는 것도 어떻게 허락받을지 막막한데, 비에른이 퍽이나 너랑 지내라고 허락해 주겠다.

그러나 황태자는 계획이 있는지 내가 모자란 놈 보듯 쳐다보는데도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는 창틀에 기댔던 상체를 일으켰다.

“어쨌든 지금 바로 황실에 가야 하니까, 준비해.”

‘그 자식이 오기 전에 가야지’, 라는 찜찜한 말이 따라붙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제가 왜 황태자님을 따라가나요?”

“내가 너무 친절하게 말했나 보네.”

그는 제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부탁하는 거 아닌데.”

……황태자 닉값하네.

그래도 저 오만한 태도를 이해는 했다.

평생을 갑으로 살았을 테니 갑을 관계 커뮤니케이션을 모를 만하다.

하지만 갑을 관계는 언제나 뒤집힐 수 있다. 언제나 더 간절한 사람이 을이 되는 법이니.

나는 저 황태자에게 아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특히, 제 입으로 신분을 밝히고 황실을 통해 날 찾는다고 말한 지금은.

황태자의 집무실에서 날 죽였다면 아무도 모르게 처리할 수 있었겠지만 여긴 봄국이다.

심지어 이에테르 공작가.

게다가 나를 데리고 봄국 황제를 만나러 가려는 걸 보면 이유는 모르지만 내가 필요한 거다.

만약 그가 공식적으로 찾아왔다면 나라가 떠들썩했을 것이다. 하다못해 커뮤라도.

하지만 조용히 왔다는 건 봄국 황제와 긴밀하게 무언가를 처리해야 한다는 뜻.

이 상황에 봄국 제국민을 죽인다?

그것도 이에테르 공작가 가주의 사촌 여동생을?

짧은 대화를 엿들었을 뿐이지만, 가을국 황태자는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하며 움직이는 자였다.

그런 그가 무모하게 지금 나를 죽일 리 없었다.

심지어 그에게는 내가 필요했다.

비에른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력을 써서 몰래 내 방에 잠입할 만큼.

그러니 한마디로.

지금, 이 순간은 내가 이 새X의 갑이다.

“제가 황성에 따라가길 바라세요?”

나는 황태자의 가증스러운 눈웃음을 따라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가고 싶게 만들어 보세요.”

나는 그의 손에 든 회중시계에 짧게 시선을 준 뒤 눈동자를 들어 그를 응시했다.

“10분 드릴게요.”

***

취소한다.

이 자식은 완벽한 갑이었다.

갑질 좀 할 줄 아는 놈이다.

나는 황성 대리석 기둥 사이를 걸으며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작은 주황색 종이 10장이 주먹 쥔 손 밖으로 삐져나와 있다.

이동 스크롤이었다.

이 세계에서 마법 도구는 어마어마하게 비쌌다.

물론 마녀 영애님께 부탁하면 무료 나눔을 받을 수 있겠지만, 일면식도 없는데 무작정 연락해서 ‘영애님 스크롤 좀…….’ 할 수는 없었다.

내 한 달 품위 유지비는 10골드.

이 스크롤 한 장이 10골드.

10장이니까, 약 10달 치 월급을 받은 셈이다.

황태자 너 진짜 운 좋았다.

내가 10년만 어렸어도 이런 수작에 안 넘어가는데.

넌 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때 탄 걸 다행으로 여겨라.

“스크롤이 그렇게 좋아?”

계속 스크롤을 보고 있으니 그게 웃긴지 황태자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응. 좋아.

너무 좋아.

하, 어딜 먼저 다녀올까?

전에 커뮤 보니까 가을국 근처에 스위스 컨셉으로 디자인된 마을이 있다던데, 거기 가서 치즈나 배터지게 먹고 올까?

여름국에 있다는 몰디브 컨셉 해변도 가 보고 싶고.

아아, 10번이나 해외여행을 갈 수 있어.

입꼬리가 절로 흐물흐물 풀어지는데 어느새 내 귓가에 고개를 바짝 붙인 황태자가 속삭였다.

“더 줄까?”

움찔.

귓가에 닿은 따뜻한 숨에 놀라 나는 한 발짝 떨어졌다.

황태자는 태평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며 내 대답을 기다렸다.

와, 이 자식 재벌 남주 컨셉인가 봐.

자본으로 꼬시고 있어!

나는 내 속물근성을 다잡으며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됐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하하하.”

황태자는 을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었다.

침묵은 거절이 아님을 아는 능력.

그는 제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주황색 스크롤을 몇 개 더 꺼내 내 반대 손에 쥐여 주었다.

“지금은 몇 개 없네. 나중에 더 가져다줄게.”

이래서 재벌물 보나 보다.

이런 자본 폭격이 계속 이어진다면 황태자와 엮여도 기분 나쁠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데 어느새 황제의 알현실 앞에 도착했다.

문 앞에 대기하던 문지기가 우렁차게 소리치며 황제에게 방문을 알렸다.

“가을국 황태자 알렉스 로이드 필리스와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가 알현을 청합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는데, 그것이 허락인지 바로 거대한 문이 열렸다.

끼이익.

육중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고, 그 틈으로 환한 빛이 덮쳐 왔다.

봄국 특유의 화려한 내부 디자인이 시야를 밝혔다.

그 화려한 배경 속, 20개의 계단 단상 위에 있는 황제.

금빛 견장이 빛을 잃을 정도로 반짝거리는 미남이 한쪽 손은 팔걸이에 올려 두고, 반대쪽 손으로 제 무릎 위에 누운 하얀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니, 고양이가 아니었다.

하얀 드레스 자락 아래로 빼꼼히 나온 소시지처럼 통통한 다리.

허리까지 늘어진 아이 특유의 가늘고 보드라운 은빛 머리칼.

작고 귀여운 생명체가 황제의 무릎 위에서 새근새근 낮잠을 자고 있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