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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30화 (31/208)

30화.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황송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그건 너무 가벼워.

내 영혼을 바치고 싶다고 해야 할까?

벅찬 마음에 심장이 뛴다.

그러다 순간 떠오른 생각에 흠칫했다.

잠깐만. AI 연동 메시지는 생각하면 자동으로 답장이 가잖아!

황제 영애는 내 생각을 듣고 있었는지 아랫입술을 깨물어 웃음을 참았다.

으악, 창피해!

‘담당자님, 메시지 차단해 주세요! 빨리요!’

[AI 동기화 메시지를 차단합니다.]

바로 메시지를 차단했지만, 달아오른 뺨은 식을 줄 몰랐다.

메시지 차단을 눈치챘는지, 황제 영애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 분도 있군요.”

비스듬히 기운 고개를 따라 그녀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왔다.

나뭇잎을 탄 바람처럼 가벼운 웃음.

그녀의 청량한 시선을 마주하다 자연스레 봄국 황제를 떠올렸다.

그 폭군 자식은 우리 폐하 영애 반만 닮았어도 욕먹을 일은 없었을 텐데.

저거 봐. 가만히 계셔도 ‘성군’이라는 글자가 이마에서 자체발광하고 있잖아?

목숨 걸어야 하는 예법 튜토리얼도 없고 말이야.

라리사 영애 아버님만 아니었으면 더 신랄하게 깔 텐데.

나는 부지런히 봄국 황제를 욕하다 예법을 떠올리고 벌떡 일어났다.

맞다, 인사.

나는 모자를 벗어 책상 위에 올려 두고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튜토리얼에서 배운 대로 치맛자락을 벌린 채 황제의 허락을 기다렸다.

그런데 허락이 들려오지 않았다.

어색한 정적만 이어질 뿐.

나른한 웃음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재밌는 레이디네요.”

“봄국의 예법입니다. 폐하.”

엘런이 나를 변호해 주듯 바로 대답했다.

“예. 저도 압니다. 봄국 사람이 여름국 황실 예법까지 알긴 어려운 일이죠. 레이디, 이 자리는 공식적인 사교 모임이 아닌 탐색대원으로 함께 협력하는 자리. 하니, 예법을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편하게 앉아요.”

황제 영애의 목소리에서 한땀 한땀 새겨 넣은 군주의 품격이 느껴졌다.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앉을까 말까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정말 예의 안 차려도 되는 걸까?

눈치를 살피려 슬쩍 고개를 들었는데 알렉스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턱을 괴고 있던 알렉스가 책상 위에 올려 둔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는 손바닥으로 공기를 누르는 시늉을 하며 소리 없이 말했다.

‘앉아.’

알렉스의 입 모양을 보니 내가 오버한 모양이다.

이게 다 봄국 폭군한테 당한 트라우마 때문이야.

나는 민망함을 감추며 자리에 앉았다.

그때 엘런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제가 봄국을 대표해 자리했으니 레이디 데이지를 대신 소개해도 될까요?”

“아니. 레이디에게 직접 듣고 싶군요.”

나는 바로 고개를 내렸다가 번쩍 들어 인사했다.

“봄국 에스텔라가의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입니다. 폐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름의 빛, 생명.

폐하의 찬란한 존안을 마주하게 되어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이런 주접스러운 사극 대사가 떠올랐지만, 학습 능력 없는 바보도 아니고 주절대는 대신 미소를 지었다.

잠시 침묵이 일었다.

이번에도 그 침묵을 녹여 낸 건 황제 영애의 따스한 목소리였다.

“반가워요.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

산뜻한 웃음 위로 근엄한 목소리가 얽혀 든다.

“나는 여름국 황제이자 마왕 동면지 탐색에 동행하게 된 디아나 아이스타스 아르테미스. 잘 부탁합니다.”

아르테미스.

내 최애 여신이 그녀의 이름에 담겨 있는 게 너무 잘 어울렸다.

얼굴, 목소리, 인성, 심지어 이름마저 완벽하다니. 분명 황제 영애 안에는 #걸크러쉬 키워드가 있는 게 틀림없다.

그녀가 웃을 때면 후광이 일고, 느릿하게 눈을 깜빡일 때면 그 묵직한 움직임이 내 심장을 쥐어짰다.

아, 덕후가 마주하기에는 너무 화려한 캐릭터야.

수위를 넘은 덕심이 마구 새어 나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다행이라면 내가 일코에 능숙하다는 사실. 나는 바들거리는 손으로 펜을 잡고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모니터로 최애의 라이브 영상을 감상하던 월루의 삶을 떠올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펜과 잉크를 정렬했다.

업무에 집중하는 척 마음을 진정하고 있는데, 귓가로 낮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폐하, 어찌 기다리시지 않고 먼저 들어가십니까.”

회의실로 남자 두 명이 들어오고 있었다.

장포를 입은 남자의 걸음을 따라 비단 자락이 백조의 날갯짓처럼 우아하게 펄럭였다.

단아한 차림새와 상반되는 화려한 이목구비.

저 사람들이 삼거미, 사거미인가?

생각하기 무섭게 손등에서 워치가 반짝였다.

[아이시스: 저 친구들이 삼거미 사거미예요!]

역시.

저들이 그 유명한 황제 영애의 호위 무사, 대륙 제3의 검과 제4의 검이었다.

그런데 쌍둥이라 들었는데 두 남자는 체격만 비슷할 뿐 얼굴이 달랐다.

스타일이 달라서 그래 보이나?

상투관으로 단정히 머리를 정리한 남자와 허리까지 내려온 장발을 찰랑거리는 남자.

상투 머리 남자는 짙은 눈썹 때문인지, 긴 눈매 때문인지 쌍꺼풀이 없는데도 나보다도 눈이 크고 인상이 시원해 보였다.

그리고 연두색에 가까운 녹색 장포를 입었는데, 그의 차분한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주변으로 피톤치드가 퍼지는 듯한 느낌.

계속 보고 있으니 관상이 떠오른다.

저 남주는 대나무 상이었다.

옆에 있으면 대나무 숲 특유의 시원한 공기가 느껴질 것 같다.

특히, 단아한 얼굴에 자리한 맑은 눈동자가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한다.

마음이 정화된달까.

속이 심란해지면 저분의 얼굴을 감상해야겠다.

명상 영상처럼 안정감을 주는 여름국 호위 무사를 보다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그러나 내 시선은 멀리 가지 못하고 바로 옆에 서 있던 푸른 장포의 사내에게 붙잡혔다.

그는 긴 머리칼을 허리까지 늘어뜨렸는데, 시야가 답답한지 이따금 제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결 좋은 머리칼이 손길을 따라 물결치며 허공에서 흩어졌다.

그 모습이 느릿하게 시야에 담겼다. 슬로우 모션이 걸렸기 때문이다.

나는 슬로우 모션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거 외모가 개연성 어쩌고 기능 아니었나?

[빙고!]

알아주니 기분이 좋은지 AI 담당자님이 슬쩍 추임새를 넣었다.

왜 기능이 발동됐는지 알 것 같긴 하다.

절대 청순하다고 말할 수 없는 두툼한 흉통을 가진 남자가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모습은 기묘한 시각적 쾌감을 주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실루엣이 참 묘했다.

손등 위로 바짝 선 핏줄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넓은 소매 아래로 두툼한 팔이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살갗 하나 내보이지 않겠다는 다부진 쇄국주의 전통의상 아래 가려진 야성적인 윤곽.

어쩐지 아찔하고 아슬하다.

‘아, 나 너무 변태 같아.’

자괴감을 느끼는데 워치가 반짝였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성녀 영애의 흥분 어린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

[아이시스: 비주얼 대박이죠? 여름국은 아시아 시장 노리려고 혼 갈았다니까요!]

나는 몰래 화면을 톡톡 치며 찬사를 쏟아 냈다.

[ㅇㅕ 긴 알면 알ㅅㅜ록 제작진을 존경하게 되는 곳이네요. ㅂ ㅔ타 테ㅅㅡ터로 뽑아주셔서 감사합니ㄷ,]

급한 마음에 오타가 엄청났지만, 진심은 전해졌을 거라 믿는다.

제작진 여러분 온 마음을 다해 감사드려요.

저 열심히 [결]까지 달릴게요.

사랑해요.

나를 빙의시켜 준 제작진들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는데, 대나무상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먼저 여독을 푸시지요.”

그는 입가에 미소를 건 채 말했다. 하지만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황제 영애는 그 시선을 마주한 채 대나무상 사내보다 더 깊은 미소를 그려 냈다.

“오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았는데 여독이라니. 삼검의 체력이 걱정되는군. 피곤하면 그대는 여름국으로 돌아가도 좋아.”

그러자 이번엔 푸른 장포의 야생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일은 저희가 폐하를 대신해 탐사를 진행하겠습니다. 앞으로 회의를 이끄시려면 피곤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황제 영애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호위를 맡는 것으로 이야기를 끝냈을 텐데?”

분명 미소를 짓고 있는데 목소리 톤이 낮아 그런지 혼나는 기분이 드는 말이었다.

동로판에서 마주한 K-장녀의 모습에 괜히 내 어깨가 바짝 움츠러들었다.

그런데 정작 꾸지람을 들은 두 사내는 미소를 띠며 우아하게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나지 않사옵니다.”

“저런, 신들이 없을 때 그런 말씀을 하셨나 봅니다.”

두 사내는 황제 영애 앞에서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역시, 여주가 황제면 과보호 충성 남주는 필수로 따라오는 것인가.

나는 그들을 보다 시선을 움직여 알렉스와 엘런을 쳐다봤다.

스텔스 모드라도 켠 양 투명인간이 되어 버린 그들을.

누구도 그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게 좀 이상했다.

아무리 탐색대원으로 참석하는 거니 예의 차릴 필요 없다고 했지만, 솔직히 그건 그냥 하는 말이잖아.

괜찮으니 편하게 대하라는 윗사람의 말이 진심이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아랫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라고 생각했으나 저기에 두 명이나 있었다.

여름의 나라에서 온 두 남자.

그들은 황제를 대리한 봄국 공작과 가을국 황태자를 보고도 인사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다.

오직 이 방에 제 주군만 존재하는 양, 폐하 영애에게 시선을 두고 걱정과 존경을 표할 뿐.

더 이상한 건 저들의 태도가 익숙한지 다들 별말 없다는 점이다.

봄국 황제에게 호되게 예절로 교육을 받은 나만 불편함을 느꼈다.

그때 쾅,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촉촉이 젖은 금발을 휘날리며 한 남자가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얇은 은테 안경을 쓴 남자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회의장을 보다 혀를 찼다.

“예의를 팔아먹은 나라 사람이라도 왔다 간 건가? 찬바람 드는데 문을 닫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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