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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32화 (33/208)

32화.

[아이시스: 제발 끊지 마요! 계속 써줘요! 나 돈 있어! 채팅 켜요!]

아이시스 영애는 유X브를 보는 것처럼 다급하게 후원을 제안했다.

[아이시스: 아, 쓸 말이 없어서 그러는구나!]

[아이시스: ㅇㅋㅇㅋ]

성녀 영애가 갑자기 제 가슴 위로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분께서는 늘 앞날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성녀 영애에게 집중됐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원탁 위로 내려앉았다.

“7일은 앞날이라 말하기엔 짧은 시간이지요.”

순간 남주들의 눈에서 기묘한 빛이 반짝였다.

은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라이터를 켠 것처럼 그들의 동공에서 잠시 푸른빛이 피어올랐다.

파란 불씨는 몇 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가장 먼저 제 눈빛을 되찾은 건 체이스 경이었다.

그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7일로는 부족하지요. 30일 일정을 모두 정해 두어야 합니다.”

“네?!”

30일은 너무 과하잖아요!

갑자기 늘어난 업무량에 입이 벌어졌다.

항의하기도 전에 쌍둥이 검사 둘이 동시에 끼어들었다.

“성언이라면 따라야지요.”

“저희가 부족했습니다.”

뭐가 부족해?

아냐, 너희 정상이야!

나는 파닥거리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하지만 그들은 성녀 영애를 향해 기도하듯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다시 눈을 뜬 그들은 열기 오른 얼굴로 발언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시선은 내게로 돌린 채. 정확하게는 내 손에 둔 채.

나는 쏟아지는 발언 때문에 다시 고개를 숙이고 정신없이 필기를 해야 했다.

***

“죽겠네…….”

지옥의 회의록 작성은 3시간 동안 이어졌다.

힐링 콘텐츠는 감상하는 사람은 즐겁지만 만드는 사람은 딱히 힐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목이 나갈 것 같다.

다행히 종이를 다 써 버린 탓에 겨우 회의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만약 종이가 떨어지지 않았다면 밤새도록 감금되었을지도 모른다.

“……무서운 사람들.”

나는 새 종이를 챙기며 진저리를 쳤다. 그리고 뒤돌아 나가려다 그대로 멈췄다.

“…….”

손에 들린 종이로 시선이 뚝 떨어졌다.

미쳤네. 내 손으로 장작을 넣으려 하다니.

몸에 밴 사회적 노예 습성이 자연스럽게 프린터 안에 용지를 채우려 하고 있었다. 용지가 필요한 다음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여기서 그 다음 사람은 나였다.

고귀하신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가 잡무를 하실 리 없고, 황제를 대신한 공작과 대륙의 존경을 받는 성녀님 또한 손을 쓰실 리 만무하다.

그렇다고 제 주군 아니면 다 병풍으로 만들어 버리는 쌍둥이 검사나, 주둥이로 다 패고 다니는 얌체 보좌관이 나를 도와줄 리도 없지 않나.

나는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책장 틈에 종이를 숨겨 버렸다.

처음부터 종이 같은 건 없었던 거다.

“종이가 없으니 어쩔 수가 없네.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

성녀 영애가 같이 밥을 먹자고 했을 때는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 몇 시간 동안 노동 착취를 당한 탓인지 슬슬 배가 고팠다.

회의도 거의 마무리됐으니까 다들 식당으로 오겠지?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먼저 건물을 빠져나왔다.

끼익.

문을 열자 평화로운 기지 전경이 바로 보였다.

하얀 설원과 거대한 목조 건물. 그 앞으로 펼쳐진 작은 독채들과 마구간.

말에게 당근을 먹이는 평온한 모습을 보다 피식 웃었다.

이게 무슨 전시 기지란 말인지.

마왕 동면지 탐색대는 특이했다.

뭐랄까, 묘하게 서열이 어그러진 느낌?

엘런도 수하들과 나란히 테이블에 앉아 식사했고, 황제 영애도 내게 예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대놓고 말했다.

허례허식을 지워 낸 모습을 보면 긴박한 전시 상황인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는 고개를 틀어 굴뚝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거대한 사우나 건물을 바라봤다.

중세의 사치, 목욕.

군사 시설이라기엔 말도 안 되게 복지가 좋단 말이지.

몰라, 좋은 게 좋은 거다.

다시 시선을 거둔 나는 식당으로 들어서다 멈칫했다.

테이블이 한쪽으로 밀려 있고, 가장 안쪽에 드넓은 상석이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상석 앞에서 초록색 비단옷을 입은 사내가 흐느끼고 있었다.

“아이고, 이놈들! 이 좁아터진 곳에서 어찌 우리 폐하께서 식사를 하신단 말이냐!”

남자는 발을 동동 구르며 긴 테이블을 두 손으로 내리쳤다.

“이 긴 테이블은 또 무엇이란 말이냐! 감히 폐하를 미천한 것들과 나란히 앉아 식사하시게 만들다니! 여물 먹는 소 떼도 아니고! 이곳이 여름국이었으면 네놈들의 목을 쳤을 것이다!”

아이고오, 늘어지는 곡소리.

염소처럼 떨리는 목소리 톤.

두 손을 주먹 쥔 채 세상이 무너진 듯 동동 구르는 발재간.

주접 내시의 진한 향기를 풍기며 한 남자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가 현실을 부정하듯 도리질을 칠 때마다 검은 휘항이 펄럭였다.

한참 발광하던 남자는 부들부들 떨며 테이블을 짚던 두 손을 움켜쥐었다.

“이래서 여름국에서 시설을 점검하겠다 했거늘. 막돼먹은 가을국 놈들에 맡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놈들이 어찌 예를 안단 말이냐!”

방정맞은 태도와 어울리지 않게 그는 신분이 높은 사람인지, 여름국 사내들이 부지런히 그의 심기를 살피며 상석을 정리했다.

카이엘드가 식솔들과 가을국 사람들은 신기한 동물을 관람하듯 흥미로운 눈으로 남자의 독백을 지켜봤다.

그 조롱 어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비틀비틀 걸음을 내디뎌 벽에 기대 있던 비단 포를 품에 안았다.

데구루루 툭.

여름국 환관은 둥글게 말린 비단포를 볼링공 던지듯 촥, 굴렸다.

은은한 광택을 자랑하며 펼쳐진 비단이 내 발끝에 닿았다.

나는 천 위에 수놓아진 꽃들을 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꽃길?

“감히 밟을 생각 마시오!”

내가 밟고 올까 걱정이 되었는지, 주접 내시가 도도도도 이쪽으로 달려왔다.

“폐하를 위한 길이니 돌아가시오!”

나는 위협적으로 달려오는 남자의 모습에 뒷걸음질을 쳤다. 엮이고 싶지 않다는 본능에 발이 빠르게 움직였다.

광인은 피하는 것이 상책.

다들 같은 마음인지 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자, 마을로 내려온 멧돼지를 피해 달아나듯 고개를 돌리고 뿔뿔이 흩어졌다.

하나, 남자는 호락호락하게 광신도 활동을 마무리하지 않았다.

배식받은 식판을 들고 창가로 걸어가는데, 환관이 내 앞을 막아섰다. 뭐가 불만인지 눈을 가늘게 뜬 채.

남자는 온몸으로 띠꺼움을 발하며 나를 위아래로 훑다 입을 열었다.

“레이디는 에스텔라 남작가의 영애가 맞으시지요?”

고개를 끄덕이니 남자가 문가 자리를 턱짓했다.

“그대의 자리는 저쪽입니다.”

남자가 말한 자리는 상석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입구 자리. 문이 열릴 때마다 찬바람이 솔솔 드는 곳이었다.

자리가 꽉 차 있었다면 저 무례한 말을 납득했을지 모르지만, 쓸데없이 스케일이 큰 알렉스가 만든 식당인 탓에 자리가 널널했다.

즉, 어디 앉아도 상관없다는 말씀.

나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식판을 테이블에 내려 뒀다. 그러자 남자가 경악하며 내 식판을 빼앗아 들었다.

“이, 이런 무례한! 사람이 앞에서 말하는데 어찌 무시한단 말입니까! 당장 자리를 옮기세요!”

“싫어요.”

바로 나온 내 거절에 남자가 거품을 물며 말을 쏟아 냈다.

“아무리 우리 인자하신 폐하께서 예를 갖추지 않아도 좋다 허락하셨다지만, 눈치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눈치가! 남작가 영애면 작위도 없는 신분이거늘! 가아아암히! 폐하와 10보 이내에서 식사하려 하다니! 망측합니다! 망측해요!”

남자는 부르르 떨며 내 식판을 들고 제멋대로 뛰어갔다.

아니! 저 미친놈이 진짜!

나는 처음 보는 광인의 자태에 입을 뻐끔거리다 식판을 뺏으려 따라갔다.

하지만 남자는 무지막지하게 빠른 걸음으로 이미 입구 앞 테이블에 도착한 뒤였다.

그는 식판을 내려 두며 만족스러운 낯으로 읊조렸다.

“여름국이었다면 그대는 식당에 발도 들이지 못했습니다. 자애로우신 우리 폐하의 뜻을 받들어 참는 것이니, 여기서 얌전히 식사하고 돌아가세요.”

그는 표독스러운 얼굴로 나를 노려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이 구역의 여왕벌, 아니 왕벌 놀이를 하고 계시다.

남자는 몇 초간 나를 응시하다 휙 돌아 상석으로 돌아갔다.

와, 저 못된 인간.

먹는 거로 사람을 차별해?

너 먹는 거로 장난치면 지옥 간다. 한국 사후 세계관이 먹는 거에 얼마나 엄격한데!

나는 부들부들 떨며 내시를 저주하다 자리에 앉았다.

됐다. 미친놈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무시하자.

나는 고소한 크림수프를 보며 겨우 마음을 다독였다.

한 숟갈을 입에 넣으니 모락모락 피어오른 따뜻한 김처럼 위장이 요동치며 기뻐했다.

다시 숟가락을 드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찬바람이 훅 덮쳐 왔다.

마음을 다독인 보람도 없이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저 망할 왕벌 자식!

이 자리 엄청 춥잖아!

환관을 한껏 노려보는데 시야로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왔다.

고개를 위로 꺾어 주어야 전신 스캔이 가능한 길쭉한 기럭지.

온몸으로 발하는 올블랙의 색감.

엘런이었다.

그는 식당 안을 훑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그대로 멈췄다.

그런데 엘런은 뭐가 불만인지 한쪽 눈을 찌푸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때였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왕벌이 발재간을 뽐내며 두두두두 달려왔다.

“저은하아!”

재빠르게 다가온 환관은 허리가 휘어질 듯 예를 갖추며 엘런에게 눈웃음을 쳤다.

“참으로 오랜만에 뵙니다. 어찌 전하는 날이 갈수록 얼굴에 서린 빛이 밝아지는지 모르겠사옵니다.”

한겨울에 개나리를 피워 낼 만큼 낯 뜨거운 소리를 재잘대며 환관은 엘런을 배식대로 데려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 다시 수프를 떠 입에 넣었다.

저게 바로 세계관이 인정한 간신이구나.

과연, 목소리와 태부터 남다르다.

환관은 쉴 새 없이 손바닥을 비비며 엘런을 상석으로 안내했다.

나는 환관의 손짓을 따라 상석을 보다 헛웃음을 흘렸다.

상석에 있는 의자 수는 회의실 원탁에 놓여 있던 의자 수와 같았다. 탐색대원 모두 저기에 앉으라고 자리를 마련한 듯하다.

분명 저 사람도 내가 탐색대원인 걸 알 텐데, 딱 내 자리만 빼놓은 거다.

왕벌 자식 차별 제대로네.

탐색대에 늦게 들어와서 그런지 아니면 신분이 낮아서인지 차별의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흑막.

말단 직장인.

이제 하다못해 따돌림까지!

나도 여주인데 내 취급 왜 이래?

야무지게 텃세를 부리는 왕벌을 노려보다 식판으로 시선을 내렸다.

밥이 맛있으니 참는다.

나는 잘 익은 채끝살을 입에 넣으며 분노를 잠재웠다.

중세 유럽 세계관에서 먹는 황실 스테이크란 한마디로, ‘빙의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였다.

녹네, 녹아.

그래 이 정도 호사를 누리면서 저 정도 시련에 불만을 가지면 안 되지.

뭐, 목숨이 위험한 상황도 아니잖아.

금세 서운함을 잊고 식사에 열중하는데 테이블 위로 짙은 그림자가 졌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의자를 빼고 있는 엘런과 그의 어깨너머로 옷소매를 물어뜯는 환관이 동시에 시야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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