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49화 (50/208)

49화.

사다리를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 한 끝에 겨우 ‘아르테미스’ 책을 찾을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도서관 구석구석에 햇살이 가득한 걸 보니 벌써 정오가 된 듯하다.

“다행이다. 1권이라.”

신기하게도 아르테미스 책은 1권이었다.

아이스타스의 반란 서사와 중복이라 그런 건가?

역시나 처음 등장하는 선조는 아르테미스 왕조의 2대 황제, 아이스타스 아르테미스였다.

그녀는 문란한 황제였다.

“후궁을 왜 못 잃으신 겁니까, 폐하…….”

물론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능이 없는 황제인 데다, 외세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황권이 아주 약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귀족들의 힘을 통합해 외세를 몰아내려 했다.

“아, 그럼 인정이지. 성군이네.”

똑똑한 그녀는 즉위 10년 만에 황도에 주둔하던 가을국 세작들을 모두 몰아내고, 가을국의 관심을 봄국으로 돌렸다.

가을국이 봄국에도 똑같은 짓을 하며 봄국 황실의 이능을 말살시키는 동안 그녀는 봄국의 구호 요청을 외면하고 자국 체제를 정돈했다.

그녀는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업무에 시달리며 온갖 제도를 만들었고, 그녀가 만든 제도 때문에 업무가 많아진 후대 황제들이 그녀를 원망했다는 내용이 이어졌다.

자의든 타의든 여름국 황제는 일 중독자로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끝이 났다.

“응? 이게 뭐야?”

우리 디아나 영애 얘기는?

그러나 아무리 뒤적여도 디아나의 이야기는 없었다.

여름국 황족들은 일이 많아 삶이 빡빡하다는 내용의 반복뿐.

내가 동양 세계관 로판 작품을 많이 안 봐서 그런지 이게 어떤 소설의 설정인지 알 수 없었다.

망연한 마음으로 다시 책을 꽂은 나는 불길한 의심을 마주했다.

설마 나만 빙의 후 이야기가 적혀 있는 건가.

트리비아나 서사에도 시에나 영애의 이야기는 없었다. 그건 남편 집안의 설정이니까 납득했다.

아이스타스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아르테미스에도 디아나가 언급되지 않는 건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까 이상하네. 빙의 시작하고 나서 벌어지는 일이 어떻게 설정에 적혀 있을 수 있지?”

베타 테스트는 유저의 ‘선택’에 따른 ‘결과’를 수집하는 게 목적이라며.

근데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어떻게 알고?

“…….”

나는 이 불안한 생각을 확인해 보기 위해 내가 아는 영애들의 성을 찾았다.

그렇게 한참 돌아다니고 있는데 무거운 마찰음이 들렸다.

끼익.

사다리에 매달려 있던 나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요한이 서 있었다.

그는 잠시 두리번거리다 나를 발견하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성큼성큼 다가온 요한은 사다리 아래에 서서 무언가를 적고는 내게 내밀었다.

[찾아다녔습니다.]

굳이 말 안 해도 그래 보였다.

다만, 요한은 제가 화가 난 걸 표현한 거였다. 대답도 듣지 않고 다시 무언가를 적는 걸 보니, 그런 거 같다.

[말도 없이 돌아간 줄 알았어요.]

아니, 선생님. 제가 어떻게 혼자 돌아가요.

저 성벽은 어떻게 넘고, 또 마물이 득실득실한 지역을 혼자 횡단할 리가요.

과한 걱정이다.

나는 사다리에서 내려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요한은 순순히 종이와 펜을 건네주었다. 나는 답을 적어 보여 주었다.

[제가 말도 없이 혼자 돌아갈 리가 없잖아요.]

제 목숨은 소중하다고요.

이 말은 좀 없어 보여서 생략하고, 눈으로 진심을 전했다.

요한은 한참 종이를 응시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 말없이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당연하죠!]

전 안전하게 20억을 타야 해요. 아직 죽을 수 없답니다.

물론 그 말도 적지 못했다.

다행히 요한은 내 진심을 받아들였는지 바로 한숨을 거두었다.

[배고프지 않습니까?]

이번에도 답이 필요한 질문은 아니었는지, 보여 주자마자 그는 아래에 제 말을 또 적었다.

[식당에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같이 가시죠.]

아니, 나는 지금 책을 찾아봐야 하는데.

거절하려던 순간 요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눈동자보다 더 시선을 끄는 게 있었다.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내가 없어져서 여기저기 뛰어다닌 모양이다.

책을 찾아봐야 했지만, 은인을 놀라게 한 게 미안해 맞춰 주고 싶어졌다.

책은 나중에도 볼 수 있으니까.

나는 요한을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본성에 돌아온 우리는 고요한 복도를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요한이 걸음을 멈췄다.

다다다다닥.

몇 초 뒤 다급히 몰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올라온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우리를 발견하고는 눈을 번뜩였다. 아주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피해 의식인가?

기분 탓이 아니라면 그들은 내게 화가 난 거 같았다.

슬프게도 기분 탓이 아니었다.

콰과가아앙.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내게 손을 뻗었고, 날아오던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내 앞으로 날아온 얼음 창이 얼음 방패에 꽂혀 떨어진 걸 보고 굳어 버렸다.

요한의 손이 나와 있는 걸 보니 요한이 막아 준 듯했다.

“--.-.--!”

남자는 뭐라고 소리를 치며 이쪽으로 달려왔다.

내게 시선을 둔 채.

남자가 다가오자 요한이 내 팔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속도를 줄이지 못한 남자는 잠시 휘청이다 다시 자세를 잡고 나를 찾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

그는 나를 찾지 못했다.

고함을 치며 뭐라 말했지만, 분주히 돌아다니는 시선은 내게 고정되지 못했다.

내가 안 보이나?

“-..-.---.-.-”

남자는 그제야 요한에게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요한은 조용히 그를 내려다볼 뿐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뭐가 그리 분한지 남자가 위협적으로 발을 굴렀지만, 요한에게 달려들지는 못했다.

다른 남자들도 이쪽으로 다가와 그 남자의 뒤에 섰다.

“---.-.-.--.-”

“--.-.--.-.---”

뭐라고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으나, 그 광분한 남자의 편을 드는 것 같았다.

요한의 표정이 더 싸늘해졌기 때문이다.

아래로 깔아보는 듯한 시선은 적을 보는 건지 동료를 보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다.

요한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남자는 갑자기 허공으로 마구 팔을 휘저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듯.

나는 그의 팔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살금살금 뒷걸음쳐 기둥 옆에 딱 붙였다.

“--.-.-.-!”

남자는 결국 포기한 듯 씩씩대다 뭐라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한참 뒤에 요한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노트에 적어 두었던 질문을 보여 줬다.

[제가 안 보였던 건가요?]

끄덕.

[이것도 이능이에요?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해요?]

투명 망토인가?

이거 너무 갖고 싶던 기능인데. 눈앞에서 직관, 아니 내가 직접 경험하다니.

그는 내가 겁먹기는커녕 흥분한 눈으로 물으니 기가 찬 듯했다.

헛웃음을 흘린 그가 종이를 받아 끄적끄적 답을 적어 주었다.

[얼음으로 막을 만들어서 모습을 가릴 수 있어요. 빛을 잘 반사하면 시야를 왜곡할 수 있거든요.]

[그럼 얼음 이능이에요?]

[네.]

[와, 신기하다. 얼음 이능을 그렇게 변형할 수도 있군요.]

[낮에만 가능해요. 시야를 왜곡하려면 빛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그는 제 이능의 원리를 설명해 주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능의 설정을 듣다 요한이 들고 있는 노트에 조그맣게 추임새를 적었다.

[대박.]

그는 노트 끝자락에 거꾸로 써진 글자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내가 쓴 글자 옆에 부호 하나를 적었다.

[?]

나는 노트를 받아 답을 써 주었다.

[대단하다는 뜻이에요.]

그는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헛기침을 하더니 슬쩍 제 자랑을 적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정교한 창조라 숙련된 이들만 가능합니다.]

이 세계에는 좋은 이능과 버프가 참 많다.

먼치킨으로 직행하는 버프.

오늘도 새삼스레 내 하찮은 버프를 되새김질하며 눈물을 삼켰다.

요한은 식당에서 밥을 먹은 뒤 도서관에 가는 나를 따라왔다.

아무래도 아까 그 남자들이 걱정이 되었는지, 그는 계속 내 옆에 붙어 있었다.

아, 그래서 아까 내가 없어졌을 때 놀라서 찾아다닌 모양이다.

나는 테이블에 앉아 골라 온 책들을 읽었다.

그래서 더 이상 그의 걱정에 동조할 틈이 없었다.

성녀 영애의 프로페타 설정집과 황녀 영애의 피델리오 설정집을 읽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 책에도 영애의 이야기는 없었으므로.

오직 나만이 가문 설정집에 타임라인 시작 후의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내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요한이 물어왔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요. 그냥 책이 재미없어서요.]

[거짓말 같은데요. 한 번도 눈 안 떼고 계속 읽었잖아요.]

[제가요?]

[네, 한 번도 안 쳐다보던데.]

그제야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니 요한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제야 봐 주네.]

“…….”

판사님 판결이 필요합니다.

저는 가만히 있는데 저쪽이 먼저 꼬셨단 말이에요.

내가 착각에 빠진 걸까, 남주가 끼를 부리는 걸까.

객관성을 찾으려 열심히 설렘을 거둬 내는데 요한이 말을 적었다.

[아까 있던 일은 미안해요.]

[요한이 왜 사과해요? 요한의 잘못도 아니잖아요. 근데 친구는 가려 사귀는 게 좋겠어요. 폭력적인 친구는 거르는 게 좋아요.]

그러자 요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친구 아니에요. 제 마음대로 멀리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고요.]

헉, 혹시 가족인가?

여기 안 늙는 설정 있잖아.

아빠? 삼촌? 설마 할아버지?!

의도치 않게 패드립을 한 건가 싶어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는 침착하려 노력하며 물었다.

[어떤 사이인데요?]

[동료예요.]

직장 동료 같은 건가?

그러고 보니 궁금해졌다.

[요한은 무슨 일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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