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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65화 (66/208)

65화.

“정신이 드십니까?”

나지막한 여인의 속삭임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 안으로 한 여인이 들어왔다.

물빛 머리를 하나로 묶은 여인은 쉬, 소리를 내며 내 어깨를 눌렀다.

“가만히 계세요. 갑자기 일어나면 위험합니다.”

나는 일으키던 몸을 그대로 다시 침대에 뉘었다.

대체 몇 번째 기절이지.

‘내 시나리오는 웹소설화 되면 큰일 나겠는데…….’

이 집 여주는 왜 툭하면 쓰러지냐며, 답답해서 하차해야겠다고 말하는 댓글이 보이는 듯했다.

천장의 붉은 휘장을 바라보던 나는 눈을 감고 운명을 받아들였다.

나는 #생존물 여주였다.

차라리 납치 감금을 해 줘.

감금물이 내 [기]-[승]보다 안전할 거 같아.

나 #감금물 여주 할래.

[……유저에게는 그 두 키워드 모두 존재하지 않습니다.]

AI가 헛소리하지 말라며 끼어들었다.

이제 막 일어나서 그런지 감정이 마구 날뛰었다.

위험 키워드도 없는데 내 전개 왜 이래요!

시스템의 차별에 눈물이 고이려는 찰나 알람이 들렸다.

[1건의 메시지가 수신됐습니다.]

[AI 담당자 ON 상태로, AI 담당자 시스템과 동기화가 가능합니다. 메시지를 확인하시겠습니까?]

누가 메시지를 보낸 거지?

[‘아샤 아나이스’에게 수신되었습니다.]

처음 보는 이름에 눈을 깜빡이는데 의원이 내 팔목을 꼭 움켜쥐었다.

그녀는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무언가 허락을 구했다.

아마 그녀가 ‘아샤 아나이스’인 듯했다.

아, 이분도 영애셨구나.

양팔에 토시를 차고 있어서 워치가 보이지 않아 몰랐다.

메시지 수신에 동의하자 바로 생각이 파고들었다.

[아샤: 의료 기록은 민감 정보 라 공개 전에 영애한테 먼저 허락받아야 할 거 같아서 메시지 보냈어요. 여긴 수인영애가 있어서 말을 조심해야 하거든요.]

나는 누운 채 꾸벅 인사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의사 영애는 미소를 지은 채 계속 메시지를 보냈다.

[아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 없는 독이라 괜찮을 거예요.]

[독이요? 저 독을 먹었나요?]

[아샤: 네, 독향이기는 한데 주 목적은 수면이라 정확히 말하면 수면제죠.]

아샤는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리고는 검지로 하늘을 쿡쿡 찔렀다.

[아샤: 72시간 동안 잠들다 깨어나는 독초예요. ‘로미오와 줄리엣 풀’인데, 셰익스피어에 과몰입한 제작진이 이름 붙인 거 같죠?]

게임 시나리오 작가님이 작명을 대충하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인지, 그녀도 작명에 불만이 있어 보였다.

아샤는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진중한 눈빛을 보내왔다.

[아샤: 보통 독살당한 척 계략을 짜거나, 신분 세탁하려고 죽은 척할 때 사용되는 풀이거든요. 혹시 영애, 빌런 역관광이나 도망 여주 서사를 준비하고 있나요?]

아샤는 협탁에 올려 둔 가방을 열어 보여 주었다.

양쪽으로 벌어진 케이스 안에 열댓 병의 약재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아샤: 그런 거면 말씀해 주세요. 다시 재워 드릴게요.]

그녀는 정말 명의였다.

환자의 상태를 명확하게 진단하는 것도, 환자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의료 기록을 보호해 주는 것도, 또 맞춤 처방으로 다시 독을 먹여 주려는 것도.

나는 윤리 의식을 뛰어넘은 그녀의 직업 열정에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혹시라도 내게 다시 독을 먹일까 겁이 났다.

[아니에요! 제가 먹은 건 절대 아니에요!]

[아샤: 알겠어요. 그러면 영애가 먹은 독을 공개할게요. 여름국 의금부에서 음독 사건을 조사한다고 진단 공개해 달라고 했거든요.]

[네. 저는 상관없어요.]

근데 나한테 누가 수면제를 먹였을까?

잠이 잘 온다고 궁인이 향을 피워 주긴 했는데.

그거 진짜 음독 시도였을까?

실수 아닐까?

봄국 남작 영애를 해코지해서 어디다 쓰려고…….

쓰러지기 전 기억을 되짚던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나를 납치할 만한 사람이 머릿속에 떠오른 탓이다.

나를 데려가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놈이 하나 있긴 했다.

바로 얼마 전 알게 된 이름 모를 흑막.

하지만 여긴 여름국이고, 난 여기 온 지 하루도 안 됐는걸?

무슨 정보가 그렇게 빨라?

그리고 하루 새에 어떻게 궁인을 매수해?

그때, 의사여주가 한숨을 내쉬며 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아샤: 저런. 흑막에게 당하셨나 보군요. 영애 추리에 방해될 수도 있으니, 일단 진단은 비공개해 둘게요.]

자동 메시지는 이게 안 좋다.

내 생각을 들은 그녀가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심지어 그녀는 직업 특성상 흑막에게 당한 여주들을 많이 보아 온 모양인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샤: 영애의 건투를 빕니다. 그럼 이제 메시지는 끌게요. 아!]

그녀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눈을 빛냈다.

[아샤: 수인영애가 커뮤니티에 글 올려서 영애를 구했어요. 나중에 따로 감사 인사하세요.]

의원이 눈웃음을 지으며 창문을 고갯짓했다.

햇살이 내려앉은 나무 창틀 너머로 서쪽 방 복도가 보였다.

이거 참, 영애들한테 늘 신세만 지네.

미안함에 민망해지는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약재를 정리하는 소리였다.

어느새 토시와 두건을 벗은 아샤가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녀의 분주한 움직임을 따라 물빛 머리카락이 노을빛에 은은히 반짝였다.

그제야 그녀의 의상이 눈에 들어왔다.

단정하면서도 각 잡힌 정장.

가을국 복식이었다.

영애, 멀리서 와 주셨구나.

민폐인 것 같아 어깨가 움츠러들면서도, 또 날 위해 타국에서 날아와 줬다는 사실에 감동했다.

나는 입을 달싹이다 다시 한번 영애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가을국분이신 것 같은데, 먼 곳까지 와 주셔서 감사해요.”

아샤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니에요. 마침 진료차 가을국 황궁에 들른 참이라, 폐하께 출국 허락을 받아서 스크롤도 받았거든요.”

“가을국 궁의셨어요?”

아샤는 한쪽 눈을 찌푸렸다.

“아니요. 궁에서 지내는 건 아니지만, 가끔 황궁에서 불러 주시면 찾아뵙고 있어요.”

여주가 명의면 황실에서 소문 듣고 찾는 건 유구한 수순이지.

나는 흐뭇하게 능력 여주를 바라보다 문득 떠오른 의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가을국 황족들은 치유 이능이 있지 않나요?”

“그 이능을 기사와 사용인들한테 쓰지는 않으니까요.”

하긴 알렉스도 공작한테 영지 받고 나서 공녀를 치료해 줬다고 했지.

납득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가방을 닫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맞다. 영애 방에 독향을 피운 용의자는 아침에 잡혔어요. 영애가 생각한 흑막이 맞을지 모르겠네요.”

“벌써 잡혔다고요? 저 오래 잠들어 있었나요?”

“18시간 잠들어 있었어요.”

머쓱해져서 목덜미를 긁는데 아샤가 웃으며 물었다.

“배후가 누군지 안 궁금해요?”

“누구였어요? 어떻게 찾았대요?”

“연못에서 독향을 피운 궁인의 시신이 발견됐대요.”

타임라인을 시작하고 처음 듣는 살인 이야기에 등골이 오싹했다.

그러나 아샤는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히 말했다.

“그 궁녀 목에 창흔이 있었대요. 금군(궁을 수비하고 황제를 호위하는 군사)들이 황궁을 수색하며 칼을 찾아다녔는데, 희빈의 처소에서 피가 묻은 검이 발견된 거죠.”

“……그럼 일검이 절 납치하려 한 걸까요?”

“글쎄요. 바로 옥에 갇혔다고 들었는데, 금방 자백하지 않을까요.”

굉장히 찜찜했다.

일검이 나를 공격해서 무서운 건 아니었다.

뭐랄까.

일검이 싫은 것과 별개로 그가 누명을 쓴 게 아닐까 하는 묘한 촉이 온 탓이다.

이런 살인 사건에서 범인이 바로 잡힐 경우, 그 범인은 누명을 쓴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나는 손가락을 매만지다 아샤에게 물었다.

“영애, 근데 일검은 범인이 아닐 거 같지 않나요?”

“왜요?”

아샤는 뭐가 문제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나는 그녀에게 몸을 바짝 기울이며 속삭였다.

“이상하지 않아요? 범인이 너무 빨리 잡혔잖아요.”

“아.”

그녀는 내 말에 흥미가 동했는지 의자에 앉아 제 턱을 쓸었다.

“하긴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 증거가 나오는 건 의심스럽죠.”

“네, 제 말이 그 말이에요.”

혼자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아샤가 중얼거렸다.

“궁중 암투에서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 독살 범인이 잡히는 건.”

“진짜 범인이 판 함정일 가능성이 크죠.”

내가 그녀의 의심을 완성하자 아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 살인 미수 사건이 이렇게 쉽게 끝나는 로판은 없죠.”

“아샤 영애, 뭘 좀 아시네요.”

의사 영애와 나는 확실히 아는 것도 없는데 막연하게 진범이 있다고 여겼다.

이것은 일종의 습관이었다.

웹소설 다독으로 얻은 전개 예측 증후군.

영애와 나는 의사와 환자에서 추리 소설에 빙의한 독자1과 독자2가 되어 범인을 추리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네요. 칼이 나왔다 해도 조사가 끝나지 않았는데, 황가 일원을 바로 옥에 가두다니.”

“아, 그건 일검이 혼혈이라 그럴 거예요. 저도 어제 들은 건데 여름국 사람들은 가을국 혼혈인을 싫어한대요. 이 기회에 일검을 치우려는 거겠죠.”

“역시 황궁 암투는 살벌하네요.”

“그러니까요. 저는 #궁중암투물 키워드 골랐으면, 절대 [결] 못 칠 거예요.”

“정치싸움이 제일 무섭죠. 지능캐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어요.”

“지능캐라니. 저와는 아주 거리가 먼 단어네요.”

나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내일 디아나한테 말하고 바로 봄국으로 돌아갈까.

그런데 무언가를 고민하던 아샤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래서 남주 캐릭터 수가 많나 봐요. 서로 견제하다 죽는 일이 많으니.”

나는 아샤의 말에 움찔했다.

그녀는 놀라울 만큼 이성적이었다.

나도 남주를 캐릭터로 느끼긴 하지만, 그녀는 정말 남주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듯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죽음을 입에 담는 걸 보니.

아샤는 굳어 있는 나를 보다 피식 웃고는 어깨를 툭툭 쳤다.

“너무 겁먹지 말아요. 남주끼리 서로 견제하고 죽이고 이런 일 비일비재하거든요. 강한 시나리오만 살아남는 거죠.”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떼어 내며 입을 달싹였다.

“여, 영애 너무…….”

“무정하다고요?”

아샤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런 말 좀 들어요.”

“아, 아니요! 절 치료해 주시러 여기까지 와 주신 분에게 무정하다뇨.”

“그럼요?”

“음…… 남주를 캐릭터로만 보시는 거 같아서요.”

과몰입의 반대말을 찾고 싶었는데,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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