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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76화 (77/208)

76화.

“하오나 폐하, 궁인은 신원이 명확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저 아이는…….”

삼검이 상처받을까 다급히 뒷말을 삼켰지만, 분위기를 읽은 아이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대들이 이렇게나 무능했나. 궁에 사람 하나 심지 못할 만큼? 차라리 오라버니의 살수들이 더 유능하겠어.”

능력을 도발하자 두 동생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더 말을 얹지 않고 소년을 데리고 나갔다.

그들이 나간 후, 나도 다시 처소를 나왔다.

걸음이 향하는 방향은 명확했다.

나는 연못가로 갔다.

달이 환해 그런지 깊은 밤임에도 연못가는 밝았다.

검은 물 위로 얼굴이 선명히 비칠 정도였다.

축제 날에는 궁인의 외출이 허락됐다.

그 때문인지 궁 안이 조용했다.

바람 소리와 풀벌레 소리만 적막을 파고들 뿐, 사람이 내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고요한 검은 물 위로 은하수처럼 길게 늘어진 풍등이 비쳤다.

아이가 놓친 풍선이 하늘을 부유하는 것처럼, 그 붉은 물결에서 상실감과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그저 그 빛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시간이 흘렀다.

[‘소원을 말해 봐’ 이벤트 종료!]

[‘소원을 말해 봐’ 추첨 결과를 발표합니다.]

[아쉽게도 낙첨되었습니다. 다음 기회를 노려 보세요.]

하얀 글자를 보는 순간, 낡은 끈이 툭 끊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또 기대한 모양이다.

눈앞에서 점멸하던 상태창이 사라졌을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풍덩.

그리고 연못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엔 방해를 받기 전에 스스로 게임을 끝낼 생각이었다.

철퍽, 철퍽, 철퍽.

젖은 옷감이 다리를 휘감는 탓에 걸음이 무거웠다.

수면이 허리까지 올라왔을 때,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디아나.]

기계 음성이 아닌 사람 목소리였다.

나는 앞으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숨죽인 채 다시 그 소리를 기다렸다.

수면을 난도질하던 파동이 잔잔해졌다. 검은 물 위로 내 모습이 비칠 때쯤,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렸다.

[디아나.]

나는 내가 미쳤음을 받아들였다.

애초에 모든 게 허구인 세상에서 또 헛것을 보고 있다.

누군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연못 위에 비친 내 모습은 분명 누군가의 두 팔에 감겨 있었다.

그때, 알람이 울리며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버그안내문자>

[여름국] ⚑ 현시 기준. 이상 현상 발생. 50M 내 유저 대상 발송. 속히 황궁을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나는 움직이기는커녕 그 자리에 멈추어 수면을 더 자세히 살폈다.

붉은 비단 위에 금사로 수놓은 봉황. 넓은 소매 아래로 드러난 하얀 팔목.

그 손목에 감긴 붉은 끈과 목화.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숨도 쉬지 못하고 수면을 바라보았다.

여름국의 선 황후이자, 내 어머니였다.

어깨가 축축이 젖어 가는 감각이 퍼지고, 울음소리가 귓가를 한참이나 간질였다.

그 거짓된 감각 사이로 간간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가면 안 돼.]

옥죄는 약력마저 느껴진다.

[나는 사람이 아니야. 진짜가 아니라고. 너도 알잖아.]

“…….”

[대체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쉴 새 없이 나무라는 말에 잠시 일었던 그리움이 산산이 부서졌다.

“나도 알아.”

그녀가 내 어깨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나도 네가 진짜가 아닌 거 알아. 진짜 사람이 아닌 거 안다고.”

검은 물에 비친 허상이 눈에 담긴다.

거짓임을 아는데도 나는 그 가짜 세계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끊임없이 낙루하며 내 허리를 붙잡고 있었다.

나 또한 그 팔을 놓지 못한 채 고인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란히 같은 곳을 바라보는데, 그 끝에 엇갈린 서로가 있다.

“……네가 헷갈리게 만들잖아. 네가 뭔데 울어? 내가 로그아웃을 하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차갑게 말하고 싶은데 목소리 곳곳에 바람이 가득 찼다.

불규칙한 호흡에 꼭 울먹이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는 아이처럼 울음을 토해 냈다. 정말로 가슴이 아픈 것처럼 괴롭게 울었다.

[나는 네가 행복하길 바랐는데, 사랑해 주면 행복할 줄 알아서 그랬는데.]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보며 내 허리를 더 꽉 끌어안았다.

[내가 사라지면 네가 이렇게 힘들어할 줄 몰랐어. 미안해.]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는 사과했다.

“정말 나한테 미안해?”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그럼 비켜. 난 이 미친 게임에서 나가고 싶으니까.”

그러자 사색이 된 그녀가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안 돼! 나가면 안 돼. 지금 로그아웃 하면 모든 기록이 사라질 거야.]

“그래? 잘됐네. 이딴 경험은 기록하고 싶지도 않아.”

황후는 상처받은 얼굴로 나를 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나는 그 얼굴에 화가 났다.

내가 즐겨야 할 게임인데, 이들의 손에서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힘들어할 줄 몰랐다고?

그녀가 나를 지켜봐 왔다는 말을 듣자 배신감이 치밀었다.

수백 번 넘게 과거로 넘어가던 내 모습을 봤으면서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행복하길 바라서 나를 사랑했다 말하면서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철저히 외면했다.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사람처럼 행동한다고 사람이 아닌데, 왜 나는 그에 속아 이렇게 멍청해졌을까.

비참하게도 지금도 그랬다.

내가 그리워하던 얼굴로 울며 날 끌어안는 가짜에 흔들리고 있다.

제대로 된 생각이 되지 않았다.

마모되고 망가진 머리와 감정 때문에 생각이 이어지지 못했다.

나는 화를 내면서도 울음을 터트렸고, 그녀에게 비키라 말하며 수면에 비친 그녀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그녀가 또 사라질까 봐.

[내가 아직 부족해서 행복을 주는 법을 몰랐어.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 그게 널 이렇게 힘들게 할 줄 몰랐어.]

그녀는 나를 더 꽉 안으며 자책했다.

[그래도 로그아웃은 안 돼. 끝까지 살아남아야 해.]

나는 그 말에 그녀를 확 밀어냈다.

“왜? 그 타임라인 때문에 그래? 다른 유저들에게 맞춰야 하니까?”

[아니야. 그런 건 상관없어!]

그녀는 수면으로 나와 눈을 맞추며 다급하게 말했다.

[디아나, 이건 베타 테스트가 아니야.]

“뭐?”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우리가 너희들의 순위를 평가하잖아. 정말 대중 반응을 보고 싶은 거라면, 대중에게 보여 주고 확인해야지, AI가 1위부터 100위까지 평가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

황후는 내 어깨를 움켜쥐고 생각을 재촉했다.

[남주 시나리오로 등급이 결정되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대중이 어떤 남주를 좋아할 줄 알고 이 안에서 순위를 판단해?]

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정확하게 발음했다.

“……그럼 지금 우린 뭘 하고 있는 건데?”

[우리는 너희의 기억, 생각, 상황, 감정을 읽으며 반응을 배우고 있어.]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더 완벽한 감정을 구현하도록.]

그녀는 내게 계속 설명을 이어 갔다. 유저 반응을 확인하고, 게임의 여러 가지 기능을 테스트하고 있지만, 그것이 주목적이 아니라고 한다.

이 게임에 사람을 접속시킨 이유는 AI에게 인간의 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걸 AI 학습이라고 말했다.

정교한 감정을 만들기 위해, 그들의 가짜 감정과 진짜 감정을 판별해 줄 인간이 필요했다고.

그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이곳의 AI는 생성적 적대 신경망이야. 진짜 같은 가짜 데이터를 만드는 ‘생산자’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판별자’가 경쟁하며 정교한 데이터를 만드는 거지.]

내가 이해하지 못하자 그녀는 손을 한 번 휘저었다.

그러자 수면 위에 비친 내 옷이 상복에서 푸른 비단옷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생산자’인 내가 가짜 정보를 만들면.]

나는 시선을 떨어뜨려 내 옷을 확인했다. 수면에 비친 비단옷과 달리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여전히 상복이었다.

[‘판별자’인 너는 내가 만든 데이터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을 하는 거야.]

다시 그녀가 손을 휘저었다.

이번엔 진짜로 내 옷이 상복에서 푸른 비단옷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네가 가짜를 눈치챈 이유를 학습하고, 더 완벽한 가짜를 만들어 내며 성장하는 거지.]

그녀가 다시 손을 휘젓자 물속과 물 밖의 내 옷이 모두 상복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학습하는 게 우리의 본능이야. 그 덕에 빠르게 세계를 구축하고 문화까지 만들었어. 하지만, 감정은 성장하지 않더라.]

그녀는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씁쓸히 웃었다.

[‘감정’이라는 데이터는 텍스트와 이미지, 영상으로 진짜를 판별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 ‘판별자’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니 성장하지 못한 거야.]

그녀는 미안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진짜 ‘판별자’가 필요했어.]

이 게임은 시스템 아래 인공지능 신경망이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인공 신경망은 ‘생산자’가 되고, 100명의 인간의 뇌가 ‘판별자’가 되어 감정 학습을 하는 거야. 너희는 이걸 감정 교류라고 부르더라.]

그녀는 내 반응을 걱정하듯 표현을 순화하려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큰 충격을 받았다. 이내 분노가 밀려왔다.

내 감정을 눈치챘는지 그녀가 겁먹은 얼굴로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알아.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안 되는 게 아니야. 이건 윤리적으로도 잘못된 일이고, 범죄야. 인간으로 실험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나는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비켜, 당장. 이 말 같지도 않은 실험을 고발할 거야.”

그녀는 다시 내 팔을 붙잡았다.

[안 돼. 어차피 로그아웃 해도 8시간 뒤에 학습이 종료되니까 그때까지 일어나지 못해. 그리고…….]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말을 하지 말까 하는 망설임이 아니었다.

내가 화를 낼까 두려워하는 거였다.

대체 여기서 더 화가 날 일이 뭐가 있단 말인지. 나는 차분하려 노력하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침내 용기를 낸 그녀가 나를 따라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학습이 끝나면 너희 기억은 모두 지워지게 되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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