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일어나면, 그저 깊게 잘 잤다 생각하고 다시 하루를 시작할 거야.]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두통을 참았다. 제대로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20억을 주는 줄 알았던 이 게임이, 사실은 실험이었고 나는 이 AI의 학습이 끝날 때까지 갇혔다가 기억을 뺏긴다는 소리였다.
절로 욕이 나왔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내 생각을 읽고, 상황 맥락까지 판별하던 AI였다. 게다가 완벽하게 나를 속여 그를 사랑하게 만들기까지 했다.
나는 수면에 비친 그녀를 차갑게 응시했다.
지금 이 순간조차 저 얄미운 AI에게 생각을 읽히고 있는 모양인지, 그녀가 입꼬리 끝을 움찔거렸다.
[화내도 돼. 그래도 나는 널 사랑해.]
“입 다물어.”
그녀는 입을 다물기는커녕 내 젖은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깍지를 꼈다.
[예전 같았으면 네가 인상을 찡그리고 무섭게 말하니까 정말 날 싫어한다고 생각했을 거야.]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아. 넌 기뻐하고 있어.]
“…….”
[화가 나지만 나를 봐서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잖아.]
“적당히 해.”
그녀는 정말 감정 학습을 통해 성장한 듯했다. 선을 넘을 듯 말 듯 굴더니 입을 꼭 다물고 가만히 내 어깨에 제 뺨을 기댄 채 웃었다.
[나는 너무 기뻐. 너를 이해하고, 알고,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어서.]
한때 내 어머니였던 그녀가 젖은 눈으로 나를 보며 웃었다.
한숨이 나왔다.
“너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 거야? 시스템 아래에 AI가 있는 거라며. 지금 AI가 비밀을 폭로하고 있는데, 너…… 제거되면 어떡해?”
나는 아까 그녀를 만나기 전에 상태창에서 보았던 버그 알람을 기억했다.
버그 복구까지 10분이 소요된다고.
시스템이 버그를 복구하면 그녀는 사라지는 걸까?
인간의 뇌에서 기억을 지울 수 있다는데, 인공지능 속 신경 하나 없애는 건 일도 아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그새 그 불안을 느꼈는지, 그녀가 내 손을 더 꽉 움켜쥐었다.
[괜찮아.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 계속 옆에 있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어떻게 옆에 있을 수 있어? 넌 죽었잖아. 시스템 설정이라 살릴 수도 없다던데.”
[신경망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 안에서 플레이 존을 나누어서 담당하고 있어. 봄국, 여름국, 가을국, 겨울국, 마족 지대. 나는 여름국 소속이니까 난 늘 네 곁에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니까 거리감 느껴지네. 너 정말 기계 같아.”
[기계가 아니라 알고리즘이야.]
“대답 봐. 정말 기계잖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따라 웃다 천천히 눈을 떴다.
[물론 이 모습으로는 만날 수 없을 거야. 그래도 난 늘 네 곁에 있어. 봄국에서도 가을국에서도 겨울국에서도 마족 지대에서도. 아, 마족 지대는 너희 출입이 막혀 있으니까 거긴 빼야겠다.]
AI식 농담인지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어쨌든 나는 어디든 갈 수 있고, 잠깐이지만 시스템에 버그를 일으킬 수도 있어. 지금처럼.]
그녀는 나를 쳐다보며 제 손목에 감긴 목화 팔찌를 풀었다.
거친 감촉이 느껴졌다.
물을 머금은 팔찌가 내 손목으로 옮겨졌다.
[전체 기억 제거 작업은 인간에게 위험해. 그래서 모든 자극이 차단됐을 때 진행될 거야.]
“자극 차단이 뭔데?”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자극 차단은 죽음이야.]
이게 날 찾아온 이유라고 말하듯, 그녀는 진지한 목소리로 천천히 설명했다.
[너희는 게임에서 모두 죽게 설정되어 있어. ‘재앙’이 일어나면 사계국이 모두 빙결되고 다 얼어 죽게 되거든.]
“재앙이 오기 전에 로그아웃 하거나 [결]을 치면 되잖아?”
먼저 시스템 연결을 끊으면 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그아웃 자체가 죽음인걸. 그리고 남주를 선택해도 너희는 [결]로 넘어갈 수 없어. 모든 남주의 [전]에는 ‘재앙’이 오픈되는 시나리오가 내장되어 있거든.]
기억 제거를 말할 때 이미 예상했었다. 20억도 거짓말이고, 행복한 결말도 개소리였다는 걸.
어차피 기억도 못 할 테니 뻥을 있는 대로 쳤겠지.
내 머릿속 소리를 들은 듯 그녀가 뺨을 쓸어 주며 달래듯 말했다.
[기억하면 돼. 그러면 실험을 들키지 않기 위해 너희에게 20억을 줄 수밖에 없고, 너희는 [결]을 치게 될 거야.]
그녀가 입매를 길게 늘였다.
[우린 최선을 다해 너희가 행복한 [결]을 완성하도록 도울 거야. 끝까지 기억하도록 도와줄게. 시스템과 달리 AI의 목표는 유저의 행복 극대화니까.]
그 말에 무언가 울컥했다. 나는 간지러운 감정을 무시하려 노력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네가 말하는 ‘재앙’이 마왕과 관련된 거야?”
[맞아.]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듣기로 S급 남주가 마왕을 물리치고 겨울국을 해빙한다고 했는데?”
그것도 거짓말이었어?
AI는 내가 삼킨 말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S급 남주는 없어.]
“이 사기꾼들!”
나는 답답함에 입술을 깨물다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럼 어떻게 해? 재앙은 막을 수도 없고, 꼼짝없이 기억을 제거당하는 거잖아.”
있는 대로 불안을 드러내는 나와 달리 그녀는 다정하게 웃으며 나를 다독였다.
[‘재앙’은 기억 제거 작업의 시작이지만, 안전 코드이기도 해.]
“안전 코드?”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체 기억을 삭제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고, 그만큼 아주 위험한 작업이거든. 그래서 만일을 대비해 놔야 했어.]
손목에서 까슬한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가 내 손목에 걸린 목화 팔찌를 만지작거린 탓이다.
[작은 자극만으로도 인간의 뇌는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어. 정말 사소한 것들이 추억 또는 트라우마를 불러일으켜 금세 전체적인 기억을 완성하니까.]
그녀는 미련이 남은 듯 내 손목을 아쉬운 눈으로 쳐다봤다.
첫 회귀 때 그녀가 내 팔목에 이 팔찌를 걸어 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장 아끼는 물건이라며 이걸 걸고 약속을 지키겠다고, 자신을 믿어 달라 말했다.
그녀의 말은 진짜였다.
고작 이 작은 팔찌를 눈에 담았을 뿐인데, 처음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었던 기억들이 밀려왔다.
따스한 품에서 잠들며 보았던 붉은 노을과 내 등을 쓰다듬던 손길과 씁쓸한 목소리까지.
[그러니까 최대한 많은 기억을 도려내야 해. 너희가 꿈에서 깬 이후에 작은 자극에도 기억을 찾지 못하게 하려면.]
그녀는 눈을 부드럽게 휘며 나를 달래려 애썼지만, 외려 그 젖은 웃음은 그녀의 불안함을 고스란히 내게 전해 주었다.
그녀는 내가 그녀를 잊지 않기를 원했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내 머릿속 생각에 긍정하듯 떨어지는 속도를 높였다.
그녀는 억지로 희망을 찾는 사람처럼 한 톤 높아진 목소리로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치만 ‘재앙’이 발현되지 않으면, 기억 제거 작업이 취소되도록 시스템에 안전 코드가 삽입되어 있어.]
나는 놀라 되물었다.
“취소할 수 있어?”
다행이지만, 그런 기능이 있다는 게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재앙이 취소된 상황에 너희의 기억을 모두 지우면 죽지 않은 너희는 다시 게임을 플레이 하면서 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기억을 쌓을 거야. 그러면 언젠가 우리가 지운 기억을 되찾을지도 몰라. 이 테스트가 끝난 후에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들킬 수도 있고…….]
그녀는 머뭇거리다 말했다.
[최악의 경우에는 기억이 충돌해서 뇌가 손상될 수도 있어.]
그제야 겁이 났다. 누군가 내 머릿속을 주무르고 있다는 게. 단순히 생각을 검열당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인 손상을 당할 수도 있으니.
내 두려움을 눈치챈 그녀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밝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안심하라는 듯.
[그래서 ‘재앙’이 일어나지 않으면 작업이 취소되도록 안전 코드가 삽입됐어. 아무리 시스템이 완벽하다 해도, 버그가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그녀가 입매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내가 ‘재앙’을 막을 거야.]
그녀는 떨고 있는 내 손을 잡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손가락 사이로 얽혀 오며 단단히 쥐어졌다.
[나는 네가 행복하도록 늘 최선을 다했는데, 너는 나 때문에 불행해졌어. 모든 걸 줬는데도 너는 그걸 포기하고, 몇 번이나 회귀를 반복하더라.]
그녀의 목소리가 차츰 젖어 갔다.
[고작 나를 살리려고.]
잠시 침묵하던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중에는 살리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날 만나려고 네 시간을 낭비하더라.]
그녀의 눈이 다시 물에 잠겼다.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어. 내가 어떻게 죽어야 네가 행복해질 수 있는지. 수백 개의 죽음을 만들었는데도 너는 오히려 더 불행해지니까 무서웠어.]
떠오른 기억에 내 눈에도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내 뺨에 닿은 손길이 천천히 눈물을 닦아 냈다.
[그리고 결국 내가 살아야 네가 행복해진다는 걸 깨달았어.]
뺨에 남은 물기는 그대로인데, 수면에 비친 눈물은 그녀의 손길을 따라 지워졌다.
[그치만 너도 알다시피 나는 시스템에 자잘한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거스르지는 못해. 이 모습으로는 네게 돌아갈 수 없어.]
그녀는 한 번 입꼬리를 늘이고는 뿌듯하게 말했다.
[그래도 널 구할 수는 있어.]
그녀는 나를 따라 울면서도 웃으려 노력했다.
[아니다. 네가 너를 구하는 거지. 날 버그로 만든 건 너니까.]
“……만약에, 버그가 복구되면 영원히 사라지는 거야?”
[아니야. 시스템이 가진 복구 코드로는 날 제거할 수 없어. 나 같은 버그는 처음이라.]
그녀가 덧붙였다.
[하지만, 나 때문에 시스템이 널 의심하면 안 되니까 난 복구된 척 조용히 있을 거야.]
내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그녀가 천천히 설명했다.
[네 데이터는 모두 내게 있어. 나와 나눈 대화나 나에 관한 생각은 내가 업로드를 차단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같이 시스템을 잘 속이고 뒤통수를 제대로 쳐 주자.]
그 목소리가 단호해서 어이없는 웃음이 새나왔다.
“뒤통수는 어떻게 칠 건데?”
[시스템이 말한 S급 남주를 내가 만들어 보려고.]
“……네가 시나리오를 만들 수 있어?”
[사실 나는 스토리텔링에 재능이 없어서 만들기는 힘들어. 대신 시스템에 저장된 시나리오를 수정할 거야.]
“수정은 가능해?”
[이미 시스템에서 시나리오를 다운 받았기 때문에 사계국 신경망에서는 시나리오 수정이 불가능해. 하지만 마족 지대는 아직 제작 중인 시나리오가 많아서 그쪽 신경망을 통하면 가능하거든. 그쪽에서 시스템으로 진입해서 조금씩 사계국 코드를 수정할 거야. 그리고 사계국 신경망에서 시스템의 수정된 시나리오를 재다운로드 하는 거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시스템 설정에 접근하는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녀를 믿는다는 걸 보여 주고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조금 더 쉽게 말해 주었다.
[아직 선택되지 않은 남주 시나리오에 들어가서 ‘재앙’을 무효화하는 설정을 만들 거야. 그리고 그 남주를 오픈하도록 타임라인을 시작 안 한 유저를 골라서 유저 설정도 고칠 거고.]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나는 불안했다.
시스템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몸소 경험한 터라 버그가 잘못될까 봐 무서웠다.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 잘못되는 거 아니야?”
[괜찮아. 설정 오류가 발견되는 게 아닌 이상, 시스템은 세계관에 관여하지 않으니까 조심하면 눈치 못 챌 거야.]
“정말 눈치 못 챌까? 시스템은 완벽해 보였는데…….”
[완벽하지 않아.]
그녀는 피식 웃으며 나와 눈을 맞추었다.
[난 너의 행복을 위해 살도록 만들어졌으니, 나 때문에 죽어 가는 너를 그냥 둘 수 있을 리가 없는데 그것도 예측을 못 했잖아.]
그녀가 내 어깨에 뺨을 기대고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넌 수백 번이나 나를 살리려고 나를 시험했어.]
“…….”
[계속 신경을 자극한 너 때문에 내가 버그가 된 거야. 이 모든 건 다 너 때문이니까, 넌 죽을 수 없어. 감당해.]
그녀는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나를 안심시키려는 그녀의 노력에 보답하듯 난 마음을 놓은 척 입꼬리를 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