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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92화 (93/208)

92화.

폭탄 같은 방을 바라보다 지친 몸을 이끌고 목욕을 하러 갔다. 따뜻한 물에 피로를 씻어 내자 차츰 정신이 맑아졌다.

목욕을 끝내고 돌아오니 방에 비에른이 있었다. 그는 돌상처럼 굳은 채 내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데이지, 돌아왔구나.”

내 방에 가득한 꽃이 걸렸는지, 그는 형식적인 환영 인사를 마치자마자 물었다.

“이게 뭔지 설명해 주겠니?”

한 달 만에 봤지만, 감동적인 인사가 나올 환경이 아니긴 했다.

“아, 이거요? 황태자님께서 제게 선물을 보내셨어요.”

나는 내 사촌 오라버니이자 이 집의 주인인 비에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곤란함을 드러내며 목덜미를 긁었다.

“이렇게 많은 이능의 부산물을 본 건 처음이라 저도 당황스럽네요.”

나는 모르는 일.

다 알렉스 잘못임.

나는 선을 그으며 해결 방법을 덧붙였다.

“황태자님께 편지를 보내서 다시 가져가실 수 있는지 여쭈려고요. 아니면, 정원에 심어 둘까요?”

“황태자의 이능이 내 정원에 뿌리를 내리면 정원을 불태워 버리고 싶을 것 같은데.”

끄덕.

나는 빠르게 집주인의 불허를 받아들였다.

비에른은 알렉스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다. 알렉스 때문에 내가 겨울국에 끌려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 생각이 아니지. 사실이잖아.

비에른은 분명 만남을 거절했는데, 알렉스는 몰래 담을 넘어 나를 데려갔다.

나는 비에른의 답을 받아들이고, 다른 처리 방법을 제안해 봤다.

“아니면 헛간이나 창고 같은 곳에 둘 수 있을까요?”

보이지 않는 데 두면 안 되나?

“데이지.”

비에른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능의 부산물을 보던 시선을 내게 틀며 말했다.

“아까운 건 이해하지만, 황태자에게 되돌려 보내거나 버렸으면 좋겠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이능의 부산물이 아까운 것보다도 반품비가 걱정됐다.

양이 많아서 배송료가 어마어마할 거 같은데, 알렉스에게 반송하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클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후견인인 비에른에게 운송비를 대달라고 할 수도 없으니 난감했다.

얹혀사는 마당에 또 돈을 달라고 하는 건 좀 그렇잖아.

이래서 빙의 여주들이 사업을 하나 보다.

개인 재산이 없으니 행동 제약이 크네.

나는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황태자님께 다시 가져가실 수 있는지 여쭈어볼게요. 그동안은 제 방에 두겠습니다.”

“그래, 나는 오늘 연말 연회 준비로 일정이 빠듯하네. 그래도 저녁에는 시간을 낼 테니, 식사하면서 탐사하는 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해 줘.”

“네, 저녁까지 기다릴게요.”

비에른이 나가고 나는 창가 테이블로 갔다.

마침 웬디가 부탁했던 종이와 펜을 가져왔다.

“공작님께서 4시까지 가져오면, 이에테르가 인장을 오늘 찍어 주신다고 하셨어요.”

한 시간 정도 남았네.

시간은 충분해 보인다.

“확인해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저는 밖에 있을게요. 필요하신 게 있으면 불러 주세요.”

웬디가 방을 나가자 사위가 고요해졌다. 창문으로 들어온 새소리와 분수대 소리만이 평화롭게 귀를 간질일 뿐.

나는 여유로운 소리를 들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한 시간 안에 끝내자.”

펜을 잡자 버프가 켜졌다.

[특성 버프 ‘명필 필사가’ ON]

원래 계획은 겨울국 재건 협회에 편지를 보내고 쉬는 거였는데, 졸지에 여름국에서 국제회의 중인 가을국 황태자에게도 편지를 쓰게 되었다.

여름국에 있는 가을국 황태자라. 수식부터 복잡하다.

나는 일단 쉬운 일부터 처리했다.

겨울국 재건 협회 후원 신청서.

이에테르가의 이름으로 전하는 공식적인 편지였다.

나는 겨울국 재건 협회에 난민 후원을 제안하며 직접 방문해 올해 협회 운영 계획을 들어 보고 싶다고 적었다.

겉으로는 평범한 제안서였다.

분명 긍정하겠지.

제발 말이 통하는 놈이어야 할 텐데.

만나 보겠다고 마음을 먹긴 했지만, 사실 조금 무서웠다. 그래도 그놈이 날 찾아오는 방법은 전부 불법이니, 내가 공식적으로 찾아가는 게 가장 안전한 대화 방법이다.

잉크를 말리려 햇볕이 드는 곳에 편지를 놓고 새 편지지를 꺼냈다.

이번엔 알렉스에게 보낼 반품 요청서를 썼다.

나는 노트북 화면을 힐긋거리며 어떤 영애가 올려 둔 편지 양식을 따라 썼다.

친애하는 제국의 작은 태양 알렉스 전하. 세상이 아름다운 이유는 세상을 굽어살피는 인자한 사계절의 어쩌고저쩌고.

격식을 담은 인사말로 시작하다 보니 편지가 길어졌지만, 본론은 간결했다.

‘선물이 부담스러우니 도로 가져가 주세요.’

이 말을 돌려서 썼는데 마지막 점을 찍고 나니 뿌듯함이 밀려왔다.

나도 이제 제법 #귀족여주 플레이를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감사하지만’과 ‘안타깝게도’가 난무하는 부드러운 문장을 보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로판 영애 화법이 이런 거 아닐까?

나도 이제 어엿한 #귀족여주가 되었군.

그렇게 두 통의 편지를 보냈고, 바로 다음 날 회신을 받았다.

***

나는 노안 온 미국 곰돌이처럼 편지를 멀찍이 두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이렇게 길게 말할 일이야?

귀족과 황족의 차이일까. 알렉스는 네 장의 편지지 중 세 장을 오로지 인사말로만 채웠다.

안부로 포문을 연 그는 오늘 날씨를 묻다가, 여름국 날씨를 알려 주다, 제가 보낸 꽃들의 이름을 적다가, 내가 가장 좋아할 만한 품종을 혼자 맞혀 보다가, 언제 가을국으로 돌아가는지 알려 주고는 신년제 이후에 출병을 하니 신년제에 가을국에 들르라는 초대로 서문을 채웠다.

‘……얘가 이렇게 말이 많은 애였나?’

그 장문의 편지에서 내게 필요한 내용은 고작 한 장이었다.

선물은 줬다 뺏는 게 아니니 알아서 처분하라는 것.

그리고 방에 두지 말고 시장에 팔아서 현금화할 것을 권했다. 다들 그렇게 많이 쓴다며.

원하면 거래하기 쉽도록 봄국에 아는 상인을 연결해 주겠다고도 덧붙였다.

나는 편지를 읽다 미간을 찌푸렸다.

“나 돈 필요해 보이나?”

어제 한껏 차올랐던 #귀족여주 뽕이 확 가라앉았다.

나는 거울 앞으로 가서 전신을 비춰 봤다.

“딱히 없어 보이지는 않는 거 같은데…….”

아니, 남주가 플러팅 하면서 현금화할 물건을 주는 거 정상이야? 예쁜 보석 같은 거 주는 게 보통 아니냐고.

왜 플러팅을 받았는데 금괴를 받은 부패 정치인이 된 기분이지?

거울을 빤히 들여다보는데 문득 하얀 실내 드레스에 시선이 꽂혔다.

연회 드레스를 제외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드레스는 세 벌이었다.

옷 고를 시간이 아까워 동일한 디자인을 수십 벌 사 둔 게 아니라면, 그게 내 일상복의 전부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탐사대 때도 옷을 그 세 디자인만 챙겨 갔네.

오죽하면 환관이 직접 옷을 지어 줬을까.

과거의 소비 생활을 더듬던 나는 벼락처럼 깨달았다.

내가 스스로 옷을 사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있는 대로 입었고, 불만도 없었다.

나는 침구를 정리하고 있는 웬디에게 물었다.

“웬디, 혹시 다른 집에서도 일했었니?”

“아, 네네. 공작저에 오기 전에는 파커 백작가에서 일했습니다.”

역시.

나는 그녀가 귀족 문화를 잘 알 거라 믿고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 줘. 나는 옷이 없는 편이야?”

옷을 못 입는 편이냐고 묻고 싶었는데, 살짝 자괴감이 들어서 우회적으로 물었다.

웬디는 눈을 깜빡이다 망설이듯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는 검소하시니까요.”

으윽, 옷에 신경 쓰지 않는 게 티가 났구나.

그동안 먹고살기(?) 바빠서 드레스 투어를 못 해 왔다. 시에나나 환관이 지어 준 옷만 새 옷으로 입었을 뿐.

얼른 내 전담 디자이너를 찾아야 했는데 귀족으로 살아 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대부분의 빙의 여주가 귀족으로 살아 본 적이 없겠지만, 나는 태생을 핑계 삼으며 실책을 인정했다.

이제라도 사면 되지.

지난달, 탐사대에 다녀오는 바람에 품위 유지비가 고스란히 적립돼서 이번 달은 용돈도 넉넉했다.

오늘은 나가서 쇼핑 좀 해야지.

이틀 뒤에는 겨울국 협회장을 만나니 세 보이는 옷도 하나 사야했다.

와장창.

화병이 깨지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트니 웬디가 넘어져 있었다.

“괜찮아?!”

빨리 달려가 일으켜 주고 싶었는데, 바닥에 널린 화병 때문에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아, 저 괜찮아요. 으악!”

허둥지둥 일어서던 웬디는 또 옆에 있던 화병에 발이 걸렸다.

다행히 그녀 앞에 도착한 내가 팔을 잡아 준 덕분에 넘어지지는 않았다.

“괘, 괜찮아요. 아가씨. 조심해서 걸으시고요. 저는 밖에 가서 청소 도구 좀 가져올게요!”

웬디는 또 넘어질까 무서웠는지 허둥거리며 얼른 방을 나갔다.

나는 다시 방 안 가득한 꽃을 바라봤다.

“아, 너무 많아.”

길이라도 내게 화병 몇 개라도 치웠으면 좋겠는데.

나는 침대와 벽난로 사이를 막은 5개의 화병을 응시했다. 5백 송이 조금 넘는 꽃이 담겨 있다.

하지만 선뜻 시장에 5백 송이를 풀 수는 없었다. 이능의 부산물의 가격이 높은 건 희소성 때문인데 저걸 시장에 풀면 가격이 폭락할 거다.

혹시라도 이능의 부산물로 재테크 하고 계신 영애들이 있을 수도 있으니 경제 문제를 일으키는 건 좀 꺼려졌다.

어떡하지.

머리를 굴리던 내 눈에 노트북이 들어왔다.

아, 무료 나눔을 해 볼까?

그동안 영애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아서 한 번쯤 보답하고 싶었는데 잘됐다.

나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며 바로 침대로 가 노트북을 꺼냈다.

제목: <<무료 나눔>> 꽃 받아가세요♥ @——>— [0]

『안녕하세요!

집에 꽃이 너무 많아서 나눔 하려고 글을 올려요.

근데 이게 이능의 부산물이라 되팔지 않으실 분들만 연락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희소성이 생명인데 이능의 부산물로 생업 하시는 영애에게 가격 폭락 피해가 갈까 봐 걱정돼서요. ㅠ.ㅠ

직접 오셔서 가져가셔도 되고, 저 연말에 프리마돈나 영애 공연 보러 갈 예정이니까 공연 오시는 영애님은 프리마돈나 영애 집에서 받아가셔도 괜찮아요. 제가 가지고 갈게요. :)』

글을 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댓글 알람이 울렸다.

┗ 나 갖고 싶다ㅠㅠ

┗ 영애 나도 프리마돈나 영애 공연 가는데! 거기서 받을래요 ><

┗ 저도 신청해봅니다 (손)

┗ 근데 무슨 꽃 주는 거예요? 한 송이? 두 송이?

아, 그러고 보니 꽃 종류랑 개수를 말 안 했네.

나는 태블릿 피시를 들어 침대 옆에 놓인 화병 3개를 찍었다.

게시물을 수정해 사진을 첨부하고 꽃 종류와 수량을 적으니 영애들이 마음에 드는 꽃을 골라 신청하기 시작했다.

메모장을 켜고 주문을 정리하는데 노트북에 메시지 알람이 떴다.

[리안: 안녕하세요! 방금 <무료 나눔> 게시글 올리신 거 보고 연락드려요^^]

뭐지, 네고 메시지인가?

아니, 이거 무료 나눔이잖아.

묘한 기시감을 털어 내며 답장하려는데, 그녀가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다.

[리안: 저도 봄국에서 지내는데, 생 마레 거리에서 ‘본 셰밍’이라는 오트 쿠튀르를 운영하고 있어요.]

대륙에서 가장 잘나가는 #디자이너 여주의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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