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그녀는 내가 처음 타임라인을 시작했을 때 데뷔탕트 드레스를 만들어 준 양장사였다.
리안은 마음이 급한지 바로 메시지를 또 보냈다.
[리안: 사진 찍으신 거 보니까 이능의 부산물이 더 있으신 거 같은데 혹시 대량 구매할 수 있을까요? 개인 소장하려는데 수량이 많이 필요해서요. 절대 시장에 유통 안 할게요!ㅠㅠ]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 답장을 하려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개인 소장 목적이라는데 많이 필요해 봤자, 얼마나 필요하겠어.
[그냥 드릴게요! 필요한 개수 말씀해주세요.]
[리안: 아니에요! 말씀은 감사한데 제가 안 돼요. 필요한 수량이 너무 많아서 돈은 꼭 드려야해요. ㅠㅠ]
[리안: 사실 제가 생화로 컬렉션을 해 보는 게 로그아웃 전 소원이었는데, 영애가 올리신 이능의 부산물 사진 보니까 가슴이 뛰어서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메시지를 보냈어요 ㅠㅠ 혹시…… 백송이 정도 빼주실 수 있을까요?]
화병 하나에 담긴 꽃만 세도 얼추 백 송이가 넘었다. 그냥 드려도 상관없었다.
그나저나 꽃으로 컬렉션이라니.
“예쁘겠네.”
나는 금손 양장사가 만든 생화 드레스를 상상하다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본 셰밍으로 꽃을 보내 주겠다고 메시지를 적던 나는 내용을 모두 지우고 다시 썼다.
[영애, 시간 되시면 저희 집으로 오실래요? :]]
***
소원이라는 말은 진심이었는지 본 셰밍의 주인, 리안은 30분도 되지 않아 이에테르 공작저에 도착했다.
“근처에 계셨나 봐요?”
“아, 아뇨! 영애 메시지 받자마자, 삯마차 잡고 바로 왔어요.”
나는 응접실에서 내 방으로 이동하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리안은 신년제를 앞두고 컬렉션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아 고민이 컸다고 한다.
생화로 옷을 만드니 쉽게 모양이 망가지고 옷감이 변색돼 스트레스가 심했다고.
그래서 이능의 부산물을 구해서 딱, 한 벌이라도 제대로 된 생화 드레스를 만들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잘나가는 디자이너라 그런지 돈이 많은 모양이었다.
한 벌이라 해도 그게 다 얼마야.
나는 머릿속으로 값을 계산하다 생각을 털어 냈다.
어쨌든, 그녀의 창작 욕구와 열정은 대단했다.
붉은 카펫 복도를 걷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거 어디서 보던 구도인데.
예술가한테 후원하는 귀족.
‘어? 담당자님, 이거 메이저 에피소드 아니에요?’
[아닙니다.]
아니구나.
세계사에서는 많이 본 것 같은데 웹소설에서는 많이 안 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AI의 판결을 받아들이고 방문을 열었다.
“허억!”
옆에서 밭은 숨이 쏟아졌다.
“여, 영애. 이게 다 이능의 부산물인가요?”
나는 웃으며 문을 더 활짝 열었다.
“편하게 보시고 필요한 만큼 가져가세요.”
내게도 그녀가 딱 필요한 사람이었다. 시장에 이능의 부산물을 유통하지 않으면서, 화병 몇 개를 비워 줄 사람.
게다가 생화 드레스는 팔지 않고 진열장에 전시할 예정이라 했으니, 모두의 안구 복지에도 좋은 일이었다.
금손 여주의 버프와 이능의 부산물 조합이라니.
벌써 보고 싶네.
리안은 흥분해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꽃을 보고 있었다.
“와, 백일홍 색이 너무 고와요. 이 백합들은 전부 크기도 크고 탐스럽게 피었어요. 이능을 참 섬세하게 발현하셨네요. 영애! 여기 데이지 꽃도 있어요. 영애 이름이잖아요.”
리안은 웃으며 작고 새하얀 꽃 하나를 들었다.
“데이지 꽃말이 뭔지 아시죠?”
“엇, 아니요?”
데이지 꽃말이 뭐람? 꽃말을 외우고 다니는 사람도 있나?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리안은 고개를 갸웃했다.
“데이지를 좋아해서 이름을 그렇게 지으신 거 아니에요?”
“아니요. 설문 조사할 때 듣던 노래가 데이지라서 아무 생각 없이 적었어요.”
다시 생각해도 극악무도한 설문 조사였다.
(빙의) 인생이 결정되는 질문인 줄 알았으면 심사숙고해서 답변했지.
귓가에서 데이지를 외쳐 대는 노랫말 때문에 귀찮아서 데이지를 적는 일은 없었을 거다.
갑자기 현생 음악을 떠올리니 내 플레이리스트가 그리워졌다.
나는 내가 가장 좋아했던 DJ를 떠올리며 눈물을 삼켰다.
그때, 리안이 물었다.
“데이지는 무슨 노래예요? 발라드예요?”
“아뇨. 영애, 혹시 제X 아세요? 세계적인 DJ인데 그분이 프로듀싱한 노래예요.”
내가 들어도 벅차오른 목소리였다.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려는데 놀라운 답변이 돌아왔다.
“알죠. 저도 제X 좋아해요.”
“영애…… 거짓말하지 마세요.”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긴 하지만, 국내에서는 유명하지 않았다.
“정말인데? 저 현생에서는 제X 왔던 페스티벌도 갔었어요!”
“영애, 잠시만요. 저 지금 가슴이 웅장해지려고 해요.”
낯선 로판 세계에서 만난 타 분야 덕질 메이트에게 심장이 반응했다.
리안은 정말 팬이었는지, 그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X는 천재예요. EDM에 어쿠어스틱에, 못하는 작곡이 없고 가사는 시 같잖아요.”
“영애, 그 심미안 버프는 그냥 받은 게 아니셨군요. 현생의 안목이 영향을 미쳤나 봐요.”
우리는 한참 천재 DJ의 음악성에 관해 깊은 토론을 했다.
그러다 문득 든 호기심에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영애는 어떻게 제X를 좋아하게 되신 거예요?”
“사실 제가 오랫동안 좋아한 모델이 있는데, 그 친구가 팬이에요. 투어도 따라다니고, SNS에 후기도 자주 올려서 접하게 됐어요.”
“아하. 최애를 통해 새로운 최애를 전도 받으셨군요.”
아름다운 덕질의 선순환이었다.
“영애가 좋아하던 모델은 누구예요?”
사실 패션 쪽은 관심이 없어서 들어도 모를 게 분명했지만, 나는 최대한 반갑게 리액션을 하며 들을 준비 했다.
그것이 서로의 안목을 존중해 주는 덕후의 도리였다.
“아드리안이라고 아세요? 아마 잘 모르실 거예요. 대중적으로 유명한 모델은 아니라.”
그녀는 머쓱해하며 물었다.
“어, 들어 본 거 같긴 한데……”
리액션을 하려던 나는 문득 이상함을 느끼고 다시 물었다.
“근데 영애 이름 리안이잖아요? 혹시 아드리안의 애칭인가요?”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어쩌다 한 설문 조사에 반사적으로 이름이 나올 정도면 그녀가 아드리안이라는 모델에게 얼마나 미쳐 있는지 가늠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바라봤는데, 그녀는 그 시선이 쑥스러웠는지 말을 돌렸다.
“데이지 꽃말이 뭔지 맞혀 보세요.”
“음. 정말 모르겠어요.”
리안이 웃으며 데이지 꽃을 다시 화병에 넣어 두었다.
“희망이래요.”
리안은 왜인지 감격한 눈으로 이능의 부산물을 응시했다.
“이름에는 인생이 담겨 있다고 하잖아요. 그래서 작명소에서 돈 비싸게 주고 이름 짓는 분들도 많으시고. 그 말이 맞는 거 같아요. 영애는 오늘 제게 희망이 돼 줬어요.”
그녀는 결심한 듯 데이지 꽃 화병을 가리켰다.
“저는 데이지를 가져갈게요. 그리고 컬렉션이 끝나면 영애에게 선물로 드릴 거예요.”
“아니에요. 저한테 주실 필요 없어요.”
이것은 마치 명품 브랜드 수장에게 옷감을 선물하고 그 브랜드 드레스를 선물받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영애 의상실에 전시하고 홍보하세요. 저는 괜찮아요.”
“아니요. 영애가 입어 주시면 그게 더 큰 홍보가 될 거예요.”
나는 흐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집순이가 입었는데 홍보가 될 리가…….
“그런 건 잘나가는 영애들한테 입혀야 홍보가 되지요. 프리마돈나 영애 정도는 되어야…….”
“아니요! 데이지 영애가 입는 데이지 드레스라니. 이것만큼 멋진 게 어디 있나요.”
별로 멋지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흥분 어린 그녀의 눈을 보니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름 쪽에 페티시가 있는 것 같다.
생각이 또 익숙하게 변태적으로 흘러가는데 그녀가 뿌듯한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영애 바쁘실 텐데,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더, 더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영애, 이것도 지금 너무 저한테는 과분한…….”
“리안 영애, 주변을 둘러보세요.”
그녀는 머뭇거리다 떨리는 시선으로 내 방을 살폈다.
“저는 남는 게 이능의 부산물이에요.”
그녀도 눈이 있다면,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만들고 싶은 옷이 더 있잖아요. 옷감 고른다 생각하시고 색감이랑 질감 마음에 드는 아이들로 가져가세요.”
유혹에 넘어간 리안은 입을 달싹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
리안은 머릿속으로 구상해 둔 드레스가 몇 벌 더 있었는지, 생각보다 빠르게 꽃을 골랐다.
나는 집사 하레네에게 꽃들을 그녀의 작업실까지 운반해 달라고 부탁했다.
리안은 마차에 오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영애, 이러실 필요 없는데…… 너무 감사해요.”
“아니에요. 저도 어차피 영애 의상실에 가야 했거든요.”
“옷 필요하세요?”
역시 #직업물여주.
본업 이야기가 나오자 안광이 달라졌다.
“네, 사실 제가 이틀 뒤에 불편한 사람을 만나야 해서 세 보이는 옷이 필요하거든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러자 리안이 들고 온 가죽 가방을 뒤적이며 중얼거렸다.
“세 보이는 옷이면 블랙이 좋겠네요. 바로 디자인 따면…….”
“아, 아니요. 본 셰밍은 맞춤 제작인 거 알지만, 저는 영애가 만들어 두신 옷 중에서 고를 거예요.”
맞춤 제작을 한다고 해도 의상실에는 전시용으로 제작해 두는 옷들이 몇 벌 있었다.
나는 그걸 수선해서 입을 생각이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그러나 리안은 이미 제 가방에서 드로잉 북을 꺼낸 뒤였다.
사락.
그녀는 종이를 넘기며 광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영감이 떠올랐어요.”
“……갑자기요?”
“네, 천사의 타락. 천사가 타락하면, 날개가 새까맣게 타면서 앙상해지잖아요.”
예술가의 광기 어린 목소리가 마차 속으로 파고들었다.
슥슥.
그녀는 빠르게 스케치를 하며 설명했다.
“벨벳 소재 홀터 드레스를 기본으로 잡고, 어깨랑 팔은 블랙 레이스를 덧대서 시스루로 선을 드러내고……. 아, 패시네이터는 블랙 베레모로 작게 잡은 다음에 은 브로치를 달아서 포인트를 줘야겠어요.”
속사포처럼 말하며 리안은 계속 그림을 그렸다.
엄청난 속도였다.
대충 선을 긋는 것 같은데, 그녀가 말한 디자인이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직감했다.
“혹시 이건 영애의 버프인가요?”
“네, 저는 ‘금손에 빠른 손’ 버프가 있어서 작업 속도가 빨라요.”
이건 빠른 수준이 아닌데요.
과장 조금 보태서 프린터인 줄 알았다.
“옷 제작도 버프 쓰면 반나절 안에 완성할 수 있어요. 제가 제대로 환불받고 오실 수 있게 만들어 드릴게요!”
“아뇨. 저 환불하러 가는 거 아닌데…….”
하지만 몰입한 리안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센 여주로 보이게 만들어 주겠다며 시안에 집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