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그는 속눈썹을 팔랑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리다 크게 웃었다.
“하하. 그러게요. 그렇게 만나고 싶어 했는데, 어떻게 만나게 될지는 상상을 안 해 봤네요.”
그는 말끝을 흐리다 제 턱을 쓸었다.
“아니다. 하긴 했는데…….”
그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테이블에 머물던 초록색 눈동자가 천천히 올라왔다.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고 싶어서 그것만 신경 쓰다 보니 이렇게 만나게 되는 건 상상해 보지 못했군요.”
온전한 모습으로 만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니.
대체 어떻게 만날 거라고 생각한 거냐.
오싹해하는 나와 달리 녹스는 진심으로 기쁜 것처럼 웃고 있었다.
“제가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실 겁니다.”
새싹 같은 연둣빛 눈동자에 흥미가 반짝였다.
악의 없는 흥미.
오래 기다려 온 케이크가 제 접시로 올라왔을 때 보일 법한 눈빛이었다.
나는 저 미친놈의 말을 끊고 소파에 등을 깊숙이 기댔다.
“협회장님이 얼마나 기쁘신지는 별로 알고 싶지 않고. 내가 알고 싶은 건 다른 건데.”
나는 팔짱을 끼며 물었다.
“왜 절 만나고 싶어 한 거죠?”
그는 의아하다는 듯 눈을 살포시 찌푸렸다.
“기억 안 나세요? 저랑 약속했잖아요. 함께 찾기로.”
야, 인간적으로 그런 대사 치지 마. 나 흑막 같잖아.
설정집에서 데이지는 철이 없을 뿐이지 흑막은 아니었다.
이런 애랑 미래에 뭘 하기로 약속할 만큼 야망 같은 게 있을 리가.
똑똑.
그때, 아까 나를 안내해 줬던 스콧이 차를 가지고 들어왔다.
따뜻한 차를 따라 준 그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긴장했는지 목이 좀 말랐던 터라 나는 바로 차를 들었다.
찻잔을 입에 대며 다시 그에게 물었다.
“구체적으로 뭘 찾기로 했다는 거죠?”
“황제의 사생아요.”
“풉.”
나는 손등으로 입가에 튄 차를 닦았다.
“여기요.”
녹스는 퍽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제 손수건을 건넸다.
“우리가 누굴 찾는다고요?”
제대로 들었지만 한 번 부정해 봤다.
“겨울국 황제의 사생아요. 그녀에게 불의 이능이 있는지 같이 확인하기로 했잖아요.”
더 명확한 답을 주며 녹스가 내 앞에 손수건을 두었다.
“마족이 인류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같이 그녀를 찾아 대륙을 통일하기로 했잖습니까.”
그는 재촉하듯 되물었다.
내가 이제 와서 발을 빼는 거라 생각한 건지 목소리에 다소 날이 서 있었다.
나는 아까 거절했던 손수건을 쥐고 황급히 입가를 닦는 척했다. 잠시라도 생각할 시간을 벌 요량이었다.
‘아니, 이거 캐붕 아니냐. 무슨 집순이가 저런 야망이 있어!’
나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곱씹으며 차분히 머릿속을 정리했다.
잠깐만, 녹스 저거 지금 연기하는 거 아니야?
나 그런 약속 한 적 없는데, 우겨서 자기 치부에 엮어 보려고.
“글쎄요. 전 그런 기억이 없는데요.”
나는 부러 차갑게 말했다.
“으음, 어쩐지. 말도 안 되는 밀지를 전하면서 계속 피하는 게 이상하다 싶더니, 마음이 변하셨구나.”
녹스는 침음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존심 상하게도 나는 크게 움찔했다.
뒤늦게 졸지 않은 척해 봤으나, 놈이 입술을 깨물고 제 집무실 책상으로 가는 걸 보니 이미 눈치챈 것 같았다.
철컥.
녹스는 서류 더미 속에서 열쇠 하나를 찾더니 제 금고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서류철을 하나 가져왔다.
“당신이 이럴까 봐 우리가 계약서를 쓴 거죠.”
뭔데, 무슨 계약이야 이건.
불안한 마음을 꾹 누르며 녹스가 건넨 계약서를 받았다.
신체 포기 각서라도 나오는 게 아닐까 잔뜩 겁먹고 있는데, 힘 빠지게도 그 안에 든 서류는 근로 계약서였다.
곧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나 직장인 컨셉으로 쭉 세계관 최강자들한테 등골 뽑아 먹히는 캐릭터인가 봐.
슬픈 캐릭터 해석을 부정하며 서류를 읽었다.
분명 내 글씨였다.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명필이었다.
‘망할…….’
데이지, 이 중2병 걸린 오컬트 오타쿠 같으니.
네가 무슨 마족 지대를 정복해!
나는 내 캐릭터의 만용을 원망하며 계약 내용을 읽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잠깐만, 학습 지도라뇨?”
근로 계약 기간은 종신.
그런데 근로 형태가 교육직이었다.
“마족과 마족 지대의 특성을 교육하는 게 그대의 역할이니까요.”
“……제가요?”
“네, 당신이 사생아에게 사라진 역사와 마족의 약점을 알려 주기로 했잖아요.”
나 가끔 한국사도 헷갈리는데 남의 나라의 사라진 역사를 알 리가…….
싸한 마음에 나는 조심스럽게 AI를 찾았다.
‘담당자님, 저 혹시 저 자식이 말한 걸 알고 있나요?’
[네. 특성 버프를 사용하면 해석과 검색을 통해 정보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또 알고 있는 모양이다.
이건 집순이라는 단어에 대한 모욕이다.
집순이는 집에서 뒹굴뒹굴 놀며 시간을 낭비한다는 뜻이지, 자택 근무로 원격 노예처럼 산다는 뜻이 아니었다.
데이지는 이 남자에게 그동안 뭘 보여 줬길래, 비밀 병기를 육성할 선생으로 고용된 걸까.
뭐가 됐든 암담했다.
“계약은 계약이에요, 데이지.”
빙긋 웃으며 그가 제 구불거리는 머리를 다시 귀 뒤로 넘겼다.
나는 그런 녹스를 보다 시선을 내렸다.
탁.
두툼한 계약서를 일단 덮었다. 지금 꼼꼼하게 읽는 건 불가능할 거 같으니.
‘담당자님, 제 계약서가 어디 있는지 확인해 줄 수 있어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다.
함께 한 계약이라면 이놈에게 1부, 내게도 1부 있을 거다.
AI는 접근 제한된 정보가 아니라면 서슴없이 정보를 공유해 줬다.
계약은 내 캐릭터가 직접 한 설정일 테니 아마 알려 줄 거다.
집에 가서 꼼꼼히 읽어 보고 #변호사여주한테 법률 검토받아야지.
이 미친놈의 영역에서 언성 높이지 말고, 뒤에서 합법적인 계약 해지 방법을 찾아보자.
차분히 AI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상한 답이 돌아왔다.
[은행에 방문해 유저의 금고를 확인해 보세요.]
[캐릭터에 설정된 자산과 비밀문서를 저장할 수 있습니다.]
[봄국 유저 ‘데이지 마야 에스텔라’의 주거래 은행은 카이엘드 은행입니다.]
……나 개인 금고도 있었어?
그러자 질문으로 인지한 AI가 낭랑하게 답했다.
[은행 계좌를 배정받은 유저도 있지만, 배정받지 못한 유저도 있습니다. 하지만, 계좌는 누구나 언제든지 오프라인에서 개설 가능합니다.]
왜 영애들이 커뮤니티에서 팁 글을 전부 읽어 두라고 뉴비에게 충고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이거 까딱하면 아무 기능도 모르고 살다가 로그아웃 하기 십상이다.
내가 멍하게 상태창을 보고 있으니 생각에 빠졌다 여겼는지 녹스가 다시 말을 걸었다.
“제가 바라는 건 하나예요. 데이지가 약속을 지키는 거.”
또 놈이 ‘싱긋’ 웃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요?”
이놈이 날 원하는 이유가 마족 정보 때문일 거라고는 예상했다.
계속 곁에 두고 그 정보를 빼내려는 이유가 비밀 병기 교육을 위해서인 줄은 몰랐지만.
힘이 빠졌다.
그래도 만나러 와 보길 잘했네.
혹시라도 놈의 집착이 나에 대한 ‘소유욕’ 때문이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내 ‘효용성’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감금 엔딩은 아니겠군.
그렇다면 이놈을 달랠 수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그 비밀 병기에게 교육을 해 주는 것뿐이잖아. 교육 그 까짓거 해 주면 그만이지.
가끔 와서 책이나 읽어 주다 일 터지기 전에 남주 선택하고 [결]치면 되니까.
연락이 가능하게 소통을 유지하면 녹스는 날 데려가려 무리수를 두지 않을 것 같았다.
얘는 내가 봄국 황제와 공작이랑 엮이면서 접근하기 힘들어질까 봐 불안해했던 거니까.
“알겠어요.”
나는 수긍하고 계약서를 다시 그에게 돌려줬다.
“황제의 사생아를 찾으면 제가 아는 건 모두 알려 드리죠.”
계약서를 받은 녹스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부터 말해 드리려고 했는데.”
뭐를?
“겨울국 황실의 사생아. 찾았거든요.”
뭐라는 거지? 벌써 찾았다니.
아니, 여기 애들 왜 이렇게 부지런해?
너네 왜 이렇게 전개가 빨라? 나만 여유를 추구하는 사람인 거니?
믿을 수 없어 녹스를 빤히 응시하는데 그는 소파에 기댄 채 여상히 말을 이어 갔다.
“아쉽게도 그 사생아는 몇 년 전에 죽었어요. 하지만 다행히 딸을 둘이나 남겨 뒀더라고요. 이건 뭐라고 해야 하나. 사생아 손녀?”
그는 숟가락으로 잔을 괜히 휘저었다.
“어쨌든 우리가 못 찾을 만했습니다. 그렇게 오래 산에 숨어 살았을 줄이야. 이능 덕에 용케 마물에 당하지 않고 살아온 모양인데, 그래도 정상인의 몰골은 아니었죠.”
겨울국 황제는 대외적으로 전투 중에 죽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봄국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산에 숨어 살았던 걸까?
제 명예를 지키려고?
아니, 애들은 무슨 죄야.
3대가 산속에서 50년을 살았다니 안쓰러웠다.
‘봄국은 디저트의 나라인데, 그것도 못 먹었을 거 아니야.’
봄국 어드밴티지를 하나도 누리지 못한 겨울국 사생아가 불쌍했다.
조금 핀트가 나간 동정이지만, 어쨌든 그녀들을 안쓰럽게 생각하는데 녹스가 계속 말을 이었다.
“사생아가 죽고 나서도 몇 년간 숲에서 버틴 걸 보면, 자매에게도 이능이 있는 게 분명해요. 동생은 제 이능을 우리에게 보여 줬는데 언니는 의심이 많아서 아직도 숨기고 있어요.”
그는 불만스러워 보였다.
나는 그 욕심 많은 태도가 이해가 가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동생이 이능을 드러냈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 아닌가요? 협회장님이 원하는 계획은 한 명만 있어도 충분할 거 같은데.”
그러나 협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동생의 이능은 충분하지가 않아요. 겨우 벽난로나 켜는 수준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