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비슷한 그림체의 삽화가 이어졌다.
배경 묘사도 없고 인물만 그려져 있어서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저 두 사람이 같이 있거나, 떨어져 있을 뿐.
5점의 그림을 넘긴 후에야 새로운 인물이 나왔다.
아기였다.
나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왜 일기야?
범인은 이해할 수 없는 황족의 예술적 소양인가 싶었다. 턱을 괸 채 대충 그림을 보다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자 마지막 그림이 나왔다.
짧은 은발 소년이 눈을 감고 엄마 품에서 자는 모습이었다.
정말 예뻤다. 그림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뭔가 뭉클한 마음이 들 만큼.
내가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한참 그 그림을 보고 있으니 안젤리카가 웃으며 내게 몸을 기울였다.
“저도 이 그림이 제일 좋았어요.”
그녀는 나른한 한숨을 쉬며 말했다.
“게임 디자이너님이 누구신지 모르지만 정말 천재 같아요. 프레스코화로 일기를 표현하다니. 이렇게 우툴두툴한 소재에 선명한 색을 표현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림 좋아하시나 봐요?”
“네 제 현생이…….”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모두 사라졌다.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안젤리카가 토끼처럼 눈을 부릅떴다.
“블라인드예요. 현생 정보를 말하면 이렇게 묵음 처리 되더라고요.”
“아아. 커뮤니티 글만 필터링 되는 줄 알았는데, 육성도 삭제되는군요.”
“팁 글에 나와 있었는데 영애 안 읽었죠?”
눈을 가늘게 뜨고 묻자 안젤리카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재밌는 글이 너무 많아서 나중에 읽으려고 미뤘더니…….”
나는 깊이 침음했다.
나야 그렇다 쳐도 안젤리카는 정말 아는 게 없었다. 그런데 커뮤니티 차단이라니.
이 게임에는 숨겨진 기능이 많다 보니 걱정됐다.
내가 아는 게 많으면 좋겠지만, 나도 플레이를 시작한 지 3개월밖에 안 돼서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아, 봄국 영애들을 소개해 주면 되잖아!
나는 시에나와 아리나 그리고 다채로운 머리색의 영애들을 떠올렸다.
플레이 기간도 길고 정보 나눔에 인자한 유저들.
“영애, 봄국 영애들 소개해 줄게요! 저보다 아는 것도 많고 다들 좋은 분들이라 전개 짜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예요.”
“헉! 저, 저를요?”
왜인지 안젤리카는 당황한 듯 눈을 도르륵 굴렸다.
“잘 모르겠어요. 그때 보니까 다른 유저분들은 좀 무서우신 거 같아서…….”
안젤리카는 프리마돈나의 안방 공연을 떠올렸는지 금세 울상이 되었다.
그날 영애들이 좀 짓궂긴 했지.
하지만 그런 게 무섭다고 평생 혼자 플레이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안젤리카처럼 출생의 비밀을 가지고 고립된 캐릭터는 더더욱.
“영애, 저 믿고 봄국 유저들 한번 만나 보세요. 정말 좋은 분들이에요.”
“영애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만나 볼게요…….”
안젤리카는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저 잠시 녹스 집무실 좀 다녀올게요.”
“녹스 집무실은 왜요?”
“영애한테 사회생활이 필요하다고 설득하려고요.”
안젤리카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음. 설득될까요?”
“저만 믿어요.”
나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집착 흑막 다루는 로판만 20권은 읽었거든요.”
방법은 간단하다.
첫 번째, 당기고 싶으면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 주기.
두 번째, 밀어내고 싶으면 원작 여주처럼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나는 결연하게 녹스의 집무실을 향해 올라갔다.
집착의 끝을 보여 주마.
***
똑똑.
노크 후, 나는 허락이 떨어지기 전에 문을 열었다.
“아, 레이디 데이지. 오셨군요.”
당황한 녹스가 책상에서 일어나며 나를 쳐다봤다.
“협회장님과 논의할 사항이 있어서 급하게 찾아왔어요.”
“하하, 스콧 사무관과 미리 일정을 잡아 주시면 좋을 텐데요.”
“네?”
나는 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인상을 와락 썼다.
“안젤리카 황녀님을 위한 일에 스케줄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그 어떤 일보다도 저희 일을 가장 우선시하셔야죠.”
나는 벌레 보듯 녹스를 보며 위아래로 시선을 움직였다.
“이것 참 걱정되네요. 사계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건 저뿐인 것 같아서.”
녹스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빡 돋았다.
하지만 그는 쉽게 제 분노를 드러내는 대신 ‘싱긋’ 웃었다.
“데이지 양의 말이 맞습니다.”
그는 읽던 서류철을 덮고 두 손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무슨 일로 오셨죠?”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소파로 가서 앉았다.
“제가 요즘 협회에 자주 오고 있잖아요?”
“네. 매우, 자주, 오고 계시죠.”
녹스는 동감하는지 냉큼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저와 자주 만나는 귀부인과 영애들이 의심하고 있어요.”
녹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의심이라면 어떤?”
“아무래도 제가 결혼 적령기다 보니 협회장님과 그런 사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아.”
녹스가 묘한 눈으로 의뭉스러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예전에 나랑 억지로 결혼하려고 난리 친 과거를 잊었는지 굉장히 불편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오늘도 에즈히나 거리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협회에 가야 한다고 빠졌더니 물으시더군요.”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녹스를 쳐다봤다.
“혹시 겨울국 재건 협회에 애인이라도 있는 거 아니냐고 말이죠.”
“아.”
녹스는 또 한 번 뜻 모를 감탄사를 흘렸다.
떨떠름해하는 거 같았다.
남주가 뭐 이렇게 변심이 빨라?
처음부터 나를 좋아해서 가지려 한 게 아니다 보니, 내가 제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자 흥미가 팍 식은 듯하다.
그래. 그 마음 계속 유지해라.
나는 눈을 옆으로 굴리며 고민을 털어놓듯 말했다.
“생각해 보니 좋은 방법 같더라고요.”
“……뭐가 좋은 방법이라는 말씀입니까?”
녹스가 낮은 목소리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어차피 계속 안젤리카 황녀님과 만나려면 협회에 드나들어야 하는데, 이렇게 된 거 아예 협회장님 애인이라고 공표하고 만나는 게 서로 편하지 않겠어요?”
녹스의 녹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예의상 짓는 그 ‘싱긋’ 웃음도 사라졌다.
“생각해 보세요. 협회장님과 제 관계가 공식화되면 저는 협회에 들를 필요 없이 협회장님의 저택에 드나들 수 있잖아요.”
녹스의 안색이 점점 안 좋아진다.
“협회를 운영하는 시간뿐만 아니라, 새벽부터 심야까지 제가 필요할 때마다 협회장님을 찾아뵐 수 있는 거죠. 효율적이지 않나요?”
“주어진 시간 안에 일을 처리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녹스는 바로 반박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젤리카 황녀님도 협회에 나오실 필요 없고, 제가 집으로 가서 만나 뵈면 되니까 협회장님 저택으로 가는 게 효율적이죠.”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굳은 녹스를 살폈다.
“표정이 안 좋으시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당연히 저는 협회에도 지금처럼 자주 들를 생각이에요. 협회에 들러 협회장님과 자주 논의하고, 남는 시간에도 협회장님의 저택에 찾아뵙는다는 말이었어요.”
나는 고개를 까닥이며 강조했다.
“늦은 만큼 시간을 많이 투자해서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죠.”
“저, 레이디 데이지.”
그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나는 고개를 저어 그의 말을 막았다.
“저도 협회장님처럼 마족을 몰아내는 미래에 진심이에요. 그 넓은 어깨에 짐을 혼자 짊어지지 마세요.”
녹스는 환장할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입을 달싹이다 겨우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지만 저희가 실제로 그런 사이도 아닌데, 제가 데이지 양의 혼사에 방해가 될까 걱정이군요.”
“뭐 혼삿길이 막히면, 협회장님과 결혼하면 되죠.”
나는 결혼에 미련 없는 귀족 여주처럼 여상히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결혼하면 눈을 뜨고 잠들 때까지 함께 붙어 있을 수 있고, 소문을 신경 쓸 필요도 없으니.”
딱.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네. 당장 이에테르 공작님께 우리 사이를 알려야겠어요.”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그가 다급하게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어차피 곧 저희 관계에 대한 소문이 날 텐데요.”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숨을 뱉었다.
“설마 저를 헌신짝처럼 버리겠다는 말씀은 아니시죠? 미래를 약속해 놓고 혼자 잘 살겠다고 절 이용만 하시고!”
“우리가 약속한 미래는 그 미래가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결혼은 별로라고 생각하세요?”
“결혼은 신중하셔야 합니다.”
“알겠어요. 그럼 이거라도 해 주세요. 협회장님의 저택에 고지 없이 출입 가능한 사람으로 등록해 주세요.”
“레이디, 사교계는 소문이 빠릅니다. 제 집에 드나들면 레이디의 평판이 땅에 떨어질 거예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필사적인 녹스를 보니 약간 죄책감이 들었다.
이제 슬슬 빠져나갈 구멍을 던져 줘야 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요. 봄국 사교계에 퍼질 소문 때문에 제가 이러는 거잖아요. 대체 왜 협회 본사를 유동 인구가 많은 에즈히나 거리에 지으신 거예요.”
나는 지긋이 녹스를 쳐다보다 물었다.
“아니면 안젤리카 황녀님을 사교 모임 일원으로 모셔 볼까요?”
녹스가 갑자기 눈을 날카롭게 떴다.
“안젤리카 황녀님을 봄국 사교계에 발을 들이게 하자고요?”
“저는 계속 황녀님을 만나야 하는데, 사람들은 황녀님의 존재를 모르니 자꾸 저를 협회와 엮잖아요. 이러다 협회장님 연인으로 소문나는 건 시간문제라고요.”
녹스가 움찔했다.
나랑 진심으로 엮이기 싫은가 보다.
“그분들은 제가 난민 봉사를 다니는 거로 알고 계시니까, 황녀님을 협회 봉사에서 만난 겨울국 출신 레이디라고 소개하면 어떨까요?”
나는 그냥 던져 보는 말인 것처럼 손톱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밖에서 황녀님을 만나는 걸 보면 지금처럼 협회에 다녀도 아무도 이상하게 안 볼 거예요. 아예 밖에서 황녀님을 뵙거나 저희 공작가에 초대해서 교육을 해도 좋고요.”
나는 손뼉을 쳤다.
“아, 그러면 지금처럼 자주 협회에 올 필요도 없겠네요.”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다시 녹스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그건 좀 그렇죠? 협회장님에게는 제가 필요한데……. 안 되겠어요. 우리는 어차피 계속 엮여야 하는 사이니 그냥 협회장님 저택에 출입 가능한 연인으로 공표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