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화사한 정원을 배경으로 서 있는데도 어둑한 분위기를 내뿜는 걸 보면 엘런의 캐릭터도 참 한결같다.
매끈한 대리석 위로 내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엘런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엘런의 착장을 본 나는 걸음을 멈췄다.
단정히 넘긴 검은 머리가 햇살에 반짝이고, 검은 정복에 달린 골드 체인과 견장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겨울국에 간 이후 느슨한 차림만 봐 와서 그런지 격식을 차린 엘런의 모습이 낯설었다.
“오랜만이군.”
“그러게요. 탐색이 끝나니 얼굴 뵙기 힘들어졌네요.”
나는 말을 뱉어 놓고 움찔했다.
얼굴 뵙기 힘들다는 말을 이상하게 들을까 봐 걱정된 탓이다.
그러나 엘런은 꼬투리를 잡는 대신 미소를 지으며 창밖 정원으로 시선을 틀었다.
“날씨가 좋은데 걸으면서 얘기하는 건 어떨까?”
“좋아요.”
나는 흔쾌히 수락하고 엘런과 밖으로 나갔다.
차려입고 왔길래 이후에 중요한 약속이 있는 줄 알았는데, 엘런은 정원을 절반이나 가로지를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간 여유가 있나 보다 여기며 나는 그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노란 수선화가 만개한 화원에 들어서자 엘런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가 파트너 신청을 했다는 얘길 들었어.”
“아, 그거요.”
소문이 여기까지 났구나.
개인적인 신청인데 엘런이 알 정도라니.
알렉스가 내 기사로 나서면 전 대륙을 무대로 황태자비 데뷔 확정이다.
그런데 갑자기 엘런이 한숨을 흘렸다.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
“……소문이 정말 빠르네요.”
고작 지난주에 결정한 내용인데, 여기까지 퍼지다니.
아, 설마?
“혹시 파트너 기준이 바뀐 이야기도 들으셨나요?”
“응. 어제 들었어.”
와, 그것도 알고 있어?
“공작님 생각보다 정보력이 좋으시네요.”
“날 어떻게 생각한 건지 모르지만, 매주 디아나 폐하와 알렉스 전하와 함께 회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좋겠어.”
하긴 엘런은 두 황실의 측근이니까 황실 정보를 빨리 받겠구나.
“근데 왜 제가 그걸 염두에 둬야 하나요?”
“내가 그대를 위해 도와줄 수 있는 일이 많다는 뜻이야.”
“아.”
사면권을 양도해 준다고 하던 남주가 이젠 인맥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그놈의 #착각계만 아니면 엘런도 참 괜찮은 남주인데.
나는 은근 세심한 엘런을 올려다보다 고민했다.
알렉스와 엘런.
둘 중 한 사람을 고른다면 엘런이 낫지 않을까?
엘런을 고르면 봄국에서 살 수 있으니까 외롭지 않을 거고, 사람이 단순하니 머리 쓸 일이 없어서 편안한 전개를 펼칠 거 같다.
알렉스는 머리가 너무 좋아서 대화하려면 나도 머리를 아주 많이 굴려야 한단 말이지. 그래도 요즘은 좀 유해지긴 했다만.
나는 착잡한 한숨을 삼켰다.
그런 고민을 하는데 엘런이 걸음을 멈췄다.
“사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그는 긴장했는지 한 번 헛기침을 했다.
“그대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라.”
무슨 허락을 청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알렉스가 내게 대신 기사로 참가하게 해 달라고 했던 일을 듣고, 엘런도 내 기사가 되게 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온 모양이다.
뭐야, 비에른 생각이 맞았네.
나는 엘런에게 몸을 돌리고 그의 말을 들어 줄 준비를 했다.
엘런은 곧게 선 채 나를 쳐다봤다.
꽤 오랫동안.
한참 후에야 엘런이 입을 열었다.
“데이지.”
“예.”
“그대에게 배운 게 많아.”
“……네?”
난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줄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는데?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어 눈을 가늘게 뜨자 엘런이 웃으며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대의 나이였을 때 황실을 두려워했지.”
그는 수선화 밭으로 시선을 틀었다. 그리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생각에 빠진 것 같았다.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엘런은 혼잣말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모한 토벌 요청도 받아들이고, 갑작스러운 지원금 요청도 거절하지 못했어.”
엘런은 어린 나이에 가주가 되었으니 부담이 컸을 거다. 아무리 북부 가신들이 혈맹이라 불릴 정도로 충성심이 강하다 한들, 그를 지켜 줄 만큼 큰 가문은 아니었으니까.
어쩌면 그래서 더 무서웠을지도 모르겠다. 제가 무너지면 가족 같은 가신들도 피해를 볼 테니.
요즘 부쩍 느끼는 건데, 캐릭터 설정을 괜히 본 것 같다.
마족 지대에서 캐릭터 설정을 본 후로 나는 엘런과 알렉스에게 과한 몰입감, 특히나 동정심을 느꼈다.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자 엘런이 내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엘런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그대는 봄국 황제의 강요에 맞서다 탑에 갇히기도 했고, 가을국 황태자의 파트너 요청도 소신 있게 거절했지. 황실이 규칙마저 바꿀 정도로 그대를 원하는데 말이야.”
음. 약간 오해가 있었다.
나는 봄국 황제의 강요에 맞설 생각이 없었고, 탑에 갇힐 줄 알았으면 군말 없이 “네!” 했을 것이다.
알렉스가 규칙을 바꿀 정도로 파트너 신청에 진심인 줄도 몰랐고.
그러나 엘런은 나를 제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칠 대쪽 같은 사람으로 오해했다.
나를 내려다보는 맑은 적안이 루비처럼 반짝거린다.
내가 찜찜한 눈으로 쳐다보건 말건 엘런은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대는 나를 위해 소신을 지키는데, 나는 그대에게 파트너를 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지. 참 부끄럽더군.”
“소신이요?”
엘런은 내 반문이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날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그대가 직접 황실을 거절할 때까지 나서지 못한 걸 용서해. 행복해야 할 파트너 선택으로 레이디에게 소신을 가지게 하다니, 얼굴을 들 수가 없어.”
그래, 얼굴을 들지 마.
내가 왜 대리 수치를 느껴야 하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어.
흐린 눈으로 엘런을 보는데 그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내가 남녀의 감정을 잘 알지 못해. 경험이 없거든.”
그래 보여요.
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래서 다음에 또 이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나도 용기를 내기로 했어.”
엘런은 긴장한 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아, 제발 그러지 마. 너 결심한 눈 할 때마다 나 진짜 불안해.
나는 덩달아 긴장한 채 붉은 시선을 마주했다.
“오늘 나는 그대의 오랜 소원을 들어주려고 해.”
“소원이요?”
나도 모르는 내 소원을 어떻게 안다는 건지 모르겠다.
또 이상한 소리를 하겠거니 하고 착잡한 마음으로 망언을 기다리는데 엘런이 믿을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나와 결혼해 주겠어, 데이지?”
순간 시간이 정지한 기분을 느꼈다. 바람이 화원을 지나는 소리와 분수대의 평온한 물소리가 느리게 들릴 정도로.
엘런과 나는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물론 정말 시간이 멈춘 건 아니었다. 큰 충격을 받아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뭐, 결혼?
나는 입을 벙긋거리다 겨우 되물었다.
“지금 저한테 청혼하신 거예요?”
당황한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내가 좋아서 떤다고 생각한 건지 뿌듯하게 웃으며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냈다.
“맞아. 그대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
나는 엘런이 상자를 열기 전에 그의 커다란 손을 움켜잡아 상자를 봉쇄했다.
“자, 잠깐만요! 토벌 전까지는 결혼 생각 없다고 하셨잖아요!”
과부 만드는 건 예의가 아니라며! 너 이 자식, 갑자기 왜 예의를 잃었어?
“그렇게 생각을 했었지.”
엘런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기억을 더듬듯 잠시 침묵했다.
“그런데 그대의 용기를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어.”
엘런은 내게 잡힌 제 손을 빼내어 내 손등을 덮었다.
“내가 죽으면 그대가 다른 이의 곁에서 행복할 수 있게 빌어 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죽더라도 그대를 내 이름 옆에 두고 싶어졌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반박하고 싶었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손등을 움켜쥔 커다란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내려 엘런의 손을 쳐다봤다. 그래서 엘런이 어떤 표정으로 말을 하는지 보지 못했다.
“사실 카이엘드 초대 가주는 마왕을 물리친 적이 없어. 학살에 지루함을 느낀 마왕이 희롱하듯 칼에 저주를 남기고 제 성으로 돌아갔을 뿐이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지만, 나는 엘런이 웃고 있지 않다는 걸 느꼈다.
고개를 들자 역시나 엘런의 굳은 얼굴이 눈에 담겼다.
“부대가 전멸한 탓에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지만, 그분의 일기에는 적혀 있었지. 마왕은 절대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다고.”
붉은 눈동자가 조금 가까워졌다.
내게 눈을 맞추기 위해 엘런이 고개를 숙인 탓이다.
반듯한 얼굴과 달리 목소리는 어딘가 일그러져 있었다. 미묘한 떨림이 고막으로 전해졌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두려워. 살아 돌아올 확률이 거의 없거든.”
바람 소리가 요란하게 귓가를 할퀴었다. 그 소리 탓에 머리칼이 뺨을 비비는 거친 감각이 크게 느껴졌다.
타인의 두려움을 마주하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누구도 내게 이토록 투명하게 겁에 질린 제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겁을 먹었던 것 같다.
그 표정을 눈치챘는지 엘런이 입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마구 흩날리던 내 머리칼을 가지런히 넘겨 주었다.
“신년제가 끝난 후에 바로 출병하게 될 거야.”
그는 다시 내 손등을 따뜻한 손으로 뒤덮었다.
“그때까지만이라도 함께 있고 싶어.”
엘런은 진지하게 말하다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내가 죽는다고 해도 그대가 평생 과부로 살 일은 없을 거야. 다들 막대한 재산을 가진 카이엘드 공작부인과 결혼하고 싶어 줄을 설 테니.”
이 와중에 무슨 이런 해괴한 농담을!
뭐라 한소리를 하려고 와락 인상을 쓰는데 엘런이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결혼 선물로 에즈히나 거리에 있는 내 건물들을 그대에게 증여할 거야. 카페에서 레이디들과 노는 거 좋아하잖아. 내가 없는 동안 편안하게 마음껏 놀아도 돼.”
엘런은 인수인계를 하는 것처럼 여상히 말했다.
“공작부인 업무는 내 보좌관들이 대신해 줄 테니, 그대는 업무를 볼 필요도 없어. 아, 물론 그 의무는 해야겠지만.”
뭔가를 떠올린 듯 대뜸 엘런이 얼굴을 붉혔다.
“그 짧은 시간 안에 2세가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볼게. 그런데 사실…….”
그는 부끄러운 사실을 고백하듯 잠시 시선을 떨궜다가 다시 체리 알처럼 선명한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내가 경험이 없어서.”
“……뭐라고요?”
“동정이라고.”
미쳤나 봐.
아니! 손도 안 잡아 본 사이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지금 얼결에 손을 잡긴 했다만……. 아니! 그래도 이건 아니지! 갑자기 청혼하면서 2세 얘기라니! 너무 빠르잖아!
질색하며 나는 손을 확 뺐다.
그러자 엘런이 충격받은 얼굴로 그대로 굳었다.
그는 천천히 다시 자세를 바로 세웠다.
“나는 뭐든지 빨리 배워.”
자존심이 상했는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족할 때까지 열심히 배워 볼 테니, 알려 주면 잘해 볼게.”
“뭘 알려 줘요!”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결혼이라뇨!”
“갑작스럽긴 하겠지, 그대가 원하던 결혼식이 있었을 테니.”
“결혼식 얘기가 아니잖아요!”
다짜고짜 찾아와서 무슨 유언장 작성하듯이 청혼을 하냐고.
넌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해?
기껏해야 파트너 신청을 예상했던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을 벌린 채 엘런을 쳐다봤다.
눈치가 있다면 뭐가 잘못됐는지 깨달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엘런은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갑자기 찾아온 행운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지만, 이건 그대의 것이 맞아.”
내가 기뻐서 넋이 나간 거라 생각한 건지 엘런은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천천히 답해 줘도 돼.”
그리고 내 손을 잡더니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긍정을 확신하고 있는 저 얼굴에 대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말문이 막혔다.
사실 욕을 할 수 있었다.
시간을 좀 더 들이면 내가 너랑 결혼하기 싫은 이유를 100가지도 넘게 말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엘런은 치트키를 썼다.
전쟁을 앞두고 죽음이 두렵다고 말한 남주한테 어떻게 날카로운 말을 쏘아붙일 수 있을까.
심지어 이제 곧 마왕을 상대하러 전쟁을 나가는데.
어렵게 제 두려움을 고백한 엘런에게 막말을 하는 게 꺼려졌다.
그렇게 잔인하게 굴기에는 동료로서 쌓인 정이 깊었다.
고민하는 내 반응을 긍정적으로 여긴 모양인지, 그가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기다리고 있을게.”
결국 나는 엘런의 기대 어린 눈빛을 외면하지 못했다.
내 손끝에 맞닿은 엘런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나는 시선을 내려 엘런의 커다란 손을 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거절을 하더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
나는 청혼의 여파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가을국 황태자에게 파트너 거절 편지를 보내는 것을 까먹을 정도였다.
나는 아침에 부랴부랴 알렉스에게 거절 편지를 보낸 뒤, 바로 용병소개소로 향했다.
마차 창밖으로 에즈히나 거리가 보였다. 특히나 빽빽한 건물들이 눈에 담겼다.
이제 여기 올 때마다 엘런의 청혼이 생각날 거 같다.
“하아.”
한숨을 쉬며 무거운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생각이 길어지기 전에 용병소개소 건물에 도착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데이지 영애?”
익숙한 말투에 뒤를 돌았다. 그러자 모자를 깊게 눌러써 얼굴을 가린 모녀가 보였다.
아니 모녀가 아닌가?
보통 로판에서 모녀면 머리색이 비슷하던데, 저 모녀는 엄마는 핑크색 머리였고 아이는 은발이었다.
그때, 아이가 슬쩍 모자를 위로 올리고는 내게 눈을 반짝였다.
“맞네!”
라리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