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우리는 마왕이 동면에서 깨어나기 전에 그를 습격할 생각이에요. 비겁하긴 하지만 잠들었을 때 공격하는 것 외에는 우리에게 승산이 없으니까요.”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굳은 표정으로 요한이 입을 열었다.
“[그분을 죽인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마왕이 일어나면 사계국의 모든 인류가 죽게 될 거예요.”
“[그분이 인간을 모두 죽인다고 했습니까?]”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예언은 틀린 적이 없어요.”
잠시 침묵하던 요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계국은 위험하군요. 다시 마족 성으로 데려가 드리겠습니다.]”
그는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방향의 걱정을 했다.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뇨. 사실 하나 더 말할 게 있어요.”
입안이 바짝 말랐다.
그래도 나는 솔직하게 털어놨다.
“지금 마왕 토벌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 동료예요.”
요한은 조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 말도 덧붙였다.
“저도 마왕 토벌단의 단원이었거든요.”
나는 고개를 내려 시선을 피한 채 말을 이어 갔다.
“제 옆에 있으면 분명 언젠가 제 동료들을 만나게 될 거고 그들이 요한의 정체를 눈치챌지도 몰라요.”
“[그게 그대에게 문제가 됩니까?]”
한참 침묵하던 요한이 물었다.
“제가 아니라 요한에게 문제죠. 요한을 죽이려 할지도 몰라요. 아니 죽이려 들 거예요.”
나는 슬롯으로 엮여 있으니 아마 죽이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요한은 달랐다.
나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어 요한을 쳐다봤다.
그는 말없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생각을 정리하는 듯했다.
나는 요한이 상처를 받았을까 봐 걱정이 됐다.
사계국 지도자들이 마왕을 죽일 계획을 하고 있고, 심지어 나는 그 계획을 돕는 사람이었으니까.
체감상 몇 시간 같은 몇 초가 흘렀다.
생각을 마쳤는지 요한의 푸른 눈동자가 차츰 밝아졌다.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화원을 둘러보다 붉은 꽃 한 송이에 시선을 두었다.
“[혹시 이 생명 이능의 부산물도 그대의 동료가 만든 겁니까?]”
이능의 부산물인 건 어떻게 알았지?
이능 있는 사람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지, 요한은 한 번에 알렉스의 존재를 간파했다.
움찔한 나를 보고 답을 얻은 듯 요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겠습니다.]”
요한은 꽃의 줄기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바람이 불어와 요한의 짧은 머리칼을 살랑였다. 매끈한 이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느긋한 움직임만큼 천천히 올라온 얼음이 꽃받침과 꽃잎을 감쌌다.
요한은 얼어붙은 꽃을 무감한 눈으로 살폈다.
챙.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리고 얼음에 금이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음이 파스스 사라졌다.
그러나 얼음 결정에 파묻혔던 꽃은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고요한 화원에 차가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생명의 이능은 빙결의 이능으로 무력화시킬 수 없다고 하던데 사실이었군요.]”
요한은 아쉬운 듯 붉은 장미에서 손을 거두었다.
그가 손을 떼는 찰나, 꽃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잿가루가 포자처럼 주변으로 흩어지더니 연둣빛 잔디 위로 소복이 쌓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잿더미를 응시했다.
요한은 갑자기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함부로 그대의 물건을 망가뜨려서.]”
그러나 목소리는 감정 한 점 없이 차분했다.
“[다시는 데이지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겠습니다. 또한.]”
시선을 들자 나를 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요한은 나를 보며 맹세하듯 천천히 한 자 한 자 말했다.
“[그대의 동료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는 눈을 감고는 검지와 중지를 붙인 손가락으로 제 미간을 짚었다가 심장을 짚었다.
마족의 수신호인 듯하다.
경례나 맹세 같은 의미의.
경건하고 깔끔한 행동인데…….
죽이지 않겠다는 맹세가 왜 살벌하게 들리는 걸까.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시키지도 않은 자기 증명을 끝낸 마족 남주가 얌전히 내 대답을 기다렸다.
여기서 또 걱정된다고 말하면, 이번엔 화원을 태워 증명할까 봐 무서웠다.
위험하니 돌아가라는 논리를 무너뜨린 요한에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계시는 동안 편하게 지내세요.”
나는 흐린 눈으로 요한을 응시하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다시 방법을 생각해 보자.
요한이 스스로 돌아가게 만들 방법이 있을 거야.
***
나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왜 시스템이 내게 감정선을 허락하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
취향에 취해 제대로 사고 쳤다.
엄청난 남주를 사계국으로 데려와 버렸다.
마왕을 잡겠다고 사계국 최강자들이 뭉치고 있는 현재.
마왕이 잠든 지금 마족 사이에서 서열 1위로 꼽히는 마족 제1 수호성.
마족 지대 최강자를 내 손으로 사계국에 데려왔다.
마왕이 기상하기 전에 요한이 사계국을 멸망시키는 건 아닐까?
아니야. 아닐 거야. 요한은 내 슬롯에 있잖아. 내가 안전하게 잘 다룰 수 있을 거야.
왜 인간의 목숨이 소중한지, 왜 인간에게 나쁜 짓을 하면 안 되는지 가르치면 되지 않을까?
#역키잡 소설에는 여주가 남주를 인성교육 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잖아.
그래, 키워드를 믿자.
비록 요한은 성인 남성이지만 키워드 버프로 내가 잘 가르칠 수 있을 거야.
나는 불안을 다독이며 차가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카페인이 공급되니 슬슬 정신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봄국으로 온 지 일주일이나 됐다는데도 그동안 별일 없었잖아?
괜찮을 거야.
마음이 진정되니 시끌벅적한 대화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오랜만에 봄국 카페에서 유저들과 만났다.
대화 주제는 또 가을국 검투 대회였다.
“영애들도 가을국 검투 대회에 참가하죠?”
“아, 아뇨. 저는 녹스 허락이 필요해서 가을국에는 못 갈 것 같아요.”
“녹스는 가을국에 안 가나요? 영애라도 보내 달라고 설득해 봐요!”
푸른 머리 영애가 안타깝다는 듯 안젤리카를 유혹했다.
“해외여행 서사 짜기가 얼마나 힘든데! 이런 기회는 놓치면 안 된다고요.”
붉은 머리 영애가 맞장구를 쳤다.
“가을국은 근대 로판 컨셉이라 전차도 있고 5성급 호텔도 있어서 유저 혼자 여행하기 좋아요.”
“맞아요. 게다가 #직업물 여주들이 많아서 화장품이나 입욕제, 도자기, 책 같은 것도 쇼핑할 수 있고요.”
가을국은 근대 로판 컨셉의 플레이 존.
유저들 말에 의하면 혼자 여행하기 제일 편한 국가라고 했다.
전차를 탈 수 있어 교통비도 저렴하고, 리버뷰&시티뷰가 모두 환상적인 5성급 호텔이 있어 호캉스 하기도 좋다고 한다.
게다가 화학과 인쇄 등의 기술이 발달해 화장품 전문점, 서점, 소품샵 등 #직업물 여주의 손길이 닿은 굿즈가 많아 쇼핑하기도 좋고.
말 그대로 여행하기 좋은 나라.
시에나가 허공을 보며 아련하게 말했다.
“전 아직도 오라 호텔의 프리미엄 스위트룸 뷰를 잊지 못하겠어요.”
“시에나 영애! 라운지 얘기도 해 주셔야죠. 거기 브런치 미쳤잖아요!”
“브런치 받고 풀장 얘기도 해야죠. 밤에 루프탑에서 야경 보며 즐기는 수영이 얼마나 환상적이던지.”
추억에 젖은 아련한 목소리가 꽃다발처럼 가닥가닥 엮였다.
다들 가을국 여행 경험담을 하나씩 늘어놓는데, 아리나가 헐레벌떡 카페로 들어왔다.
“헉, 늦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저희도 이제 막 왔어요.”
“그래요? 다행이다.”
“뛰어왔어요? 세상에, 땀부터 닦아요.”
“아뇨. 뛰어와서 그런 게 아니라, 오다 무서운 걸 봤더니 식은땀이 났네요.”
“무서운 거요?”
영애들이 질문하자, 아리나가 눈을 반짝이며 부채를 폈다.
“인어공주 남주 말이에요! 저도 본 거 같아요.”
오랜만에 광기 어린 안광을 빛내며 아리나가 작게 웃었다.
“영애들 말이 맞았어요. 눈이 마주치니까 미래가 보이더라고요.”
미래?
안젤리카도 호기심이 일었는지 읽고 있던 태블릿 피시를 내려 두고 물었다.
“인어인데 미래를 볼 수 있는 남주인가요? 그런데 왜 인어공주라고 부르세요? #TS물인가요?”
“아뇨. 말을 못 하는 분이라 커뮤에서 인어공주 같은 남주 아니냐고 그 키워드를 붙였거든요. 아, 영애들은 커뮤니티를 못 보죠.”
아리나가 흥분 어린 목소리로 말하다 깨달음을 얻고는 안젤리카의 태블릿을 건네받았다.
몇 번 톡톡 화면을 건드린 그녀가 게시물을 보여 줬다.
제목: 똑똑, 여기가 안데르센 선생님 구역인가요? 봄국에서 인어공주 남주 만난 후기 올립니다. [48]
『선생님들 썰 듣기 전에 일단 자식 이름부터 골라주세요.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는 순간 일남일녀를 낳아 백년해로하는 미래를 보고 왔습니다.
딸이면 아쿠아마린, 아들이면 코발트블루라고 지으려는데 괜찮은가요?』
아리나가 후후 웃었다.
“제가 이래서 커뮤를 못 끊어요. 정보의 보고잖아요.”
아리나는 차가운 레모네이드를 마시며 우리를 쳐다봤다.
“정말 눈을 마주치는 순간 머릿속에 자식 이름이 스치더라고요. 화이트 골드, 블루 사파이어. 보석처럼 살라고 고급지게 지어 봤어요.”
“……영애, 정신 차려요. 영애는 이미 남주 선택했잖아요.”
시에나가 조심스럽게 아리나의 어깨를 흔들었다.
아리나는 시에나의 손을 떼어 내며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라리사 영애에게 장문으로 편지를 써야겠어요. 아이템 구걸 좀 해 봐야지.”
“매번 거절당하면서 질리지도 않아요?”
가만히 듣고 있던 푸른 머리 영애도 끼어들었다.
“맞아요. 그리고 라리사 영애가 영애 차단했다고 하던데요.”
“정말요?”
놀라는 시에나와 달리 아리나는 미간을 한 번 일그러뜨리고는 덤덤하게 부채를 살랑였다.
“어쩐지 메시지 1이 안 없어진다 싶더니.”
“아리나 영애는 이럴 거면 남주 선택 왜 했어요.”
“그런 키워드가 있는 줄 몰랐죠! 이건 키워드 사기라고요. #부둥물인 줄 알았는데 #시집살이물이라뇨!”
전혀 상반되는 키워드에 깜짝 놀랐다.
“그게 가능한가요?”
시에나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리나 영애는 남의 육아물 캐릭터를 남주로 골라서 저렇게 됐어요.”
“남의 육아물이요?”
“라리사 영애 오빠를 남주로 골랐거든요.”
아리나가 침음하며 부채질을 했다.
“얼굴에 홀려서 키워드 더 보기를 안 한 내 실책이에요.”
나는 믿을 수 없는 말에 넋을 놓았다.
“설마 라리사 영애가 영애를 시집살이시키는 거예요?”
푸른 머리 영애가 키득거리며 설명했다.
“아뇨. 황가 방계 친척이 아리나 영애의 지참금부터 매너까지 하나하나 다 시비를 걸고 있어요.”
“어떻게 그, 그럴 수 있죠? 육아물에 왜 시집살이물이 나와요?!”
“원작에 라리사 영애가 새언니를 시집살이에서 구해 주고 부둥받는 서사가 있는데, 그게 남주 시나리오로 들어간 모양이에요.”
아리나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아아. 남주 선택 철회하고 싶어요. 나 로판 영애 화법도 모른단 말이에요.”
그녀는 냅킨을 들어 눈가를 닦았다.
“황궁 정원은 넓어서 산책하기 힘들 테니 들어가서 쉬라길래 배려해 주는 건 줄 알았죠.”
그녀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근데 그게 우리 집 평수 작다고 까는 말이었을 줄이야!”
“그게 그런 뜻이었군요!”
안젤리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입을 크게 벌렸다.
“영애도 #시집살이물 조심해요.”
“네! 조심할게요.”
안젤리카가 다부지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리나가 한숨을 푹 쉬었다.
“어쨌든 남주 교환권만 얻으면 바로 인어공주 남주를 선택하겠어요.”
“아니, 영애 또 충동적으로 남주 선택하지 말고 이번엔 잘 알아보고 해요.”
“잘 알아볼 필요가 없는 얼굴이라니까요? 제가 봄국 플레이를 몇 년이나 했는데 어떻게 그 얼굴을 이제 발견한 건지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외국에서 몰래 들어온 사연 있는 남주 같아요. 옷차림 보니까 용사 같고요.”
아리나가 두 손을 깍지 끼더니 그 위로 제 턱을 올렸다.
“자유롭게 외국을 돌아다니는 용사라니. 분명 시댁 없는 남주일 거예요.”
진지한 목소리가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모두가 짠한 마음을 삼켰다.
나는 아리나의 서사를 동정하다 묘한 기시감에 고개를 기울였다.
“잠깐만요. 외국에서 온 용병 남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