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갑자기 환경이 바뀌어서 면역력도 안 좋아졌을 텐데, 먼지랑 곰팡이 있는 데서 자면 안 돼.
기관지 안 좋아진단 말이야.
#역키잡 키워드 때문인지 요한에게 엄마의 마음을 느끼게 된다.
“얼른 짐 싸세요.”
재촉하자 요한은 제가 잘못 들었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데이지의 집이요?]”
“네. 어제 이에테르 공작님께 허락도 받았어요. 제 호위 기사 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호위 기사로 일하세요. 이에테르가에서 숙식도 제공할 거예요.”
아마 급여도 괜찮을 거다. 우리 비에른은 통이 큰 사람이니까.
그런데 좋아할 거라 생각했던 요한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참 조용히 있던 그가 겨우 입을 뗐다.
“[같이 살자는 말씀입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뉘앙스가 이상하게 들려서 흠칫했다.
동거 제안 같잖아.
나도 얹혀사는 거고, 저택도 넓어서 거의 옆 동네 사는 느낌인데 동거라니.
아니, 굳이 따지면 동거가 맞긴 한데.
‘맞다’라는 간단한 답이 쉽게 나오지 않아 입을 달싹이는데 요한이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은빛 속눈썹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봄볕에 반짝거리는 그 작은 움직임을 보고 있으니 새삼 이곳이 봄이라는 당연한 생각이 들었다.
아리나 영애의 캐해 능력을 존중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동화 한 편을 감상한 듯한 몽환적인 기분에 파묻혔다.
신념 없는 의 유일한 철학.
외모가 개연성.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분위기의 잘생김을 표현했는지 대단하다.
내가 또 주접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한 모양인지 요한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요?”
요한은 웃음을 그대로 머금은 채 벽에 머리를 기댔다.
“[이게 꿈의 연속인지 현실인지 구별이 안 되어서요.]”
“무슨 꿈을 꿨길래 그런 말을 해요?”
그는 대답 대신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그때, 문가에서 바람이 훅 밀려왔다.
쾌쾌한 먼지에 달콤한 냄새가 섞인 바람에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의아함에 눈이 가늘어지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웃음기를 지워 낸 요한이 문으로 나갔고, 나도 따라 일어났다.
처음에는 내가 안 내려오니까 하레네가 올라온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 앞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용사님! 저 부탁이…… 어? 손님이 계셨네요?”
누구지?
그녀의 손목을 먼저 살폈지만, 여자는 손목에 워치를 차고 있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차림새를 훑었다.
검은 원피스와 갈색 앞치마.
하나로 묶은 긴 머리칼.
두건을 매고 있었는지 이마에 살짝 파인 자국이 있다.
색이 짙은 옷과 위생에 신경 쓴 차림을 보니 식당을 운영 하는 여자인 듯했다.
아, 1층 카페 주인인가?
그런데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요한과 나를 번갈아 보고는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손에 든 종이를 어찌하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리다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해요!”
그녀가 허둥지둥 돌아가려고 하길래 나는 그녀를 붙잡았다.
“저기.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엑스트라가 요한을 찾아왔다니.
그녀의 정체도, 이곳에 온 이유도 알 수 없어 긴장됐다.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희 카페 냉각기가 고장 나서 용사님께 부탁을 드려 보려고 왔어요. 자, 작업을 건 건 아니었어요! 그런 마음도 있었지만, 연인이 있는 분에게 그러지는 않아요!”
자기가 뱉어 놓고 놀랐는지 그녀가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비명을 삼켰다.
……요한이 마음에 들어서 온 모양이었다.
엑스트라도 같은 마음인가 보다. 취향으로 잘생긴 남주에게 마음이 동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녀의 손에 노트가 쥐어져 있었다.
“그거 요한한테 보여 주려고 가져오신 건가요?”
“네, 맞아요.”
나는 그녀가 건넨 종이를 받았다. 여자는 머뭇거리다 또 말을 쏟아 냈다.
“저희 오빠가 용사님이랑 같은 길드 소속이거든요. 오빠 말로는 용사님이 마검사라고 하던데. 냉각기 마석이 말썽이라, 마력을 조금만 흘려주시면 되거든요…… 실례인 건 알지만 도움을 주시면…….”
아마 요한은 지금 이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을 거다.
돌아보니 역시나였다.
내용이 궁금한지 요한이 한쪽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여자에게 물었다.
“혹시 펜 있으세요?”
그녀가 주머니에서 펜을 꺼냈다.
“네네! 필담은 가능하시다고 들어서 챙겨 왔어요.”
“감사합니다.”
나는 종이에 질문을 적어서 요한에게 보여 줬다.
[혹시 용병소개소에서 마검사라고 했어요?]
마력도 종류가 있다.
마법진에 힘을 흘려 다양한 이능을 시전할 수 있는 일종의 기본 에너지와 특정 이능을 바로 발현하는 특수한 에너지였다.
요한의 마력은 후자였다.
그리고 그 ‘이능이 되는 마력’을 타고난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설마 용병소개소에서 얼음이나 불을 만들 줄 안다고 자랑한 건 아니겠지?
정신이 아찔해진다.
당장 마족 지대로 돌려보내야 하나 걱정하는데 다행히 요한이 아니라는 답을 썼다.
그리고 마검사로 몰린 이유를 적었다.
[용병 입단 시험으로 단장과 대련을 했는데, 1합으로 자기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고 화를 내더군요. 저보고 마검사라고 하길래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는 조금 억울한 듯했다.
마음이 착잡해졌다.
1합이면 검 한 번 맞대고 단장을 이겼다는 소리인가?
이쪽이 더 괴물 같았다.
차라리 마검사가 인간적이다.
한숨을 길게 내쉬자 요한이 고개를 숙여 내 표정을 살폈다.
[제가 실수라도 했습니까?]
실수랄 것까지야 있나.
잘나게 설정된 게 잘못은 아니지. #아포칼립스 남주가 전투력이 뛰어난 건 당연하잖아.
나는 고개를 저으며 글을 썼다.
[그냥 마검사라고 하는 게 좋겠어요. 가서 마석에 마력을 넣어 주는 척하면서 상자에 이능을 써 주세요.]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얼른 필담을 나눈 종이를 찢고 주인에게 노트와 펜을 돌려줬다.
“도와드린다고 하네요. 카페로 가시죠.”
“감사합니다. 제가 안내할게요.”
여자는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녀는 우리를 1층 카페로 데려갔다. 카페 안에 들어서자 그녀에게 나던 달콤한 냄새가 훅 밀려왔다.
그녀는 요한이 도와줄 거라 믿었는지 미리 계산대 옆에 냉각 상자를 올려 두었다.
“이거예요.”
그런데 고장 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냉각 상자 안에는 얼음이 가득했다.
나는 먼저 상자 뒷면을 돌려봤다.
“…….”
상자에 꽂힌 마석이 박살 나 있다.
나는 가늘게 뜬 눈으로 카페 사장을 쳐다봤다.
이거 고장이 아니라 일부러 부순 거 같은데.
“고, 고치기 힘드시면 말해 주세요. 어머, 손님! 어서 오세요!”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더니 마침 들어온 손님을 응대했다.
나는 다시 버프를 켜고 요한에게 귓속말했다.
“이건 일부러 마석을 부순 거라 마검사도 못 고쳐요. 그냥 상자 만지는 척하다가 안 될 거 같다고 해요.”
요한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요한에게 상자를 주고 쇼케이스로 시선을 돌렸다.
카페에 들른 김에 따라온 하레네와 마부에게 줄 간식을 살 생각이었다.
마침 손님 응대를 끝낸 주인이 바로 요한에게 다가왔다.
“용사님, 어떠세요? 고칠 수 있으세요?”
주인은 양심 없이 저렇게 물으며 종이에 글을 썼다. 가만히 질문을 읽던 요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는지 더 보채지 않고 울상을 지었다.
“세상에, 완전히 망가졌나 보네요.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고생이라니. 1분도 안 걸렸잖아요.
나는 흐린 눈으로 주인을 보며 그녀의 작업 방식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리나 만큼이나 자신감이 넘치는 막장 멘트였다.
주인 언니 얼굴이 귀염상 그 자체에 쇼케이스에 있는 다쿠아즈 비주얼을 보니 본업까지 존잘이신 거 같긴 하지만, 그래도 그건 너무 허술한 작업 아닌가요.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때,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포장해 드릴까요?”
쇼케이스 뒤에 있던 남자가 유리문을 열며 물었다.
이 사람이 오빠인가?
일이 없을 땐 동생을 도와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동생은 오빠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저 요한에게 뭐라고 말을 걸고 있었다. 요한이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니 그녀는 육성으로 말하며 종이에 글씨를 끄적였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다시 고개를 틀어 주문부터 마쳤다.
“이거 종류별로 하나씩 주세요.”
“네. 금방 해 드릴게요.”
주인의 오빠는 상처가 가득한 손으로 열심히 포장했다.
그때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다시 쳐다보니, 주인은 언제 만들어 뒀는지 요한에게 얼음을 곱게 간 주스를 건네고 있었다.
“용사님, 너무 수고 많으셨어요. 이것 좀 드세요.”
정말 요한을 꾈 생각으로 찾아왔던 게 확실했다.
“여기요. 포장 끝났습니다.”
나는 다쿠아즈를 받으며 은화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연인이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제 작업을 마치는 주인이 꺼려졌지만, 밖에서 기다리는 하레네와 마부는 죄가 없으니 디저트는 결제했다.
요한은 주인에게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까닥 숙였다. 음료를 받은 그가 내게 잔을 건넸다.
나는 물끄러미 음료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 먹으라고요?”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묻자 요한이 끄덕였다.
당황한 주인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솔직히 먹기 싫었다.
복숭아를 곱게 간 음료는 먹음직스러웠지만, 의도가 불순하다 보니 찜찜했다.
하지만 주인의 플러팅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내게 미소 짓고 있는 저 얼굴을 보니 거절하기 어려웠다.
3살배기 순수한 아이에게 짝짓기 세계의 더러움을 가르쳐 줘야 하는 기분이었다.
‘그냥…… 세상은 아름답다고 말해 주자.’
“고마워요.”
나는 떨떠름하게 웃으며 잔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