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OP 100 영애-125화 (126/208)

125화.

알렉스가 마족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는 모르나, 내가 아는 정보만 말해도 충분히 이야기가 가능할 거 같았다.

나는 내 옆에 심어 둔 생명의 이능 부산물인 붉은 꽃을 한 송이 뽑았다.

“시전자의 수를 줄여 힘의 크기를 키울 수 있는 생명의 이능과 달리, 빙결 이능과 불의 이능은 힘의 크기를 타고나야 한다죠. 누군가는 피가 진하면 힘이 강해진다고 하지만, 아니에요.”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하려 노력했다.

“겨울국을 생각해 보세요. 한 대를 걸러 강력한 힘이 발현되기도 하고 아주 먼 방계의 사생아가 황권을 뒤집을 힘을 타고나기도 했잖아요.”

겨울국은 직계라고 큰 이능을 물려받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반란이 쉽게 일어났다.

알렉스는 사계국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받는 사람 중 하나니 내 말뜻을 이해했을 거다.

나는 조용한 알렉스를 보며 그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족 지대에서 지낼 때, 요한을 제외한 수호성들은 절 죽이고 싶어 했어요. 다만, 요한 때문에 그러지 못했죠. 그들 사이에 엄격한 군법이 있다거나, 요한에게 충성해서 그런 건 아니에요.”

나는 강조하기 위해 잠시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

“힘의 차이 때문이었어요.”

내가 마족 지대에 있을 때 날마다 싸움이 일어났다.

열다섯 명의 수호성들은 나를 죽이려 했고, 요한은 그들을 막으려 했다.

그리고 난 살아남았다.

동료라고 수호성들이 요한을 존중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이길 수 없었을 뿐이다.

요한은 빙결 이능에다가 불의 이능까지 타고났다.

그런 그를 이길 수 있을 리가.

“모든 마족이 요한처럼 이능을 쓰는 건 아니에요. 솔직히 요한은 압도적인 존재죠.”

알렉스는 내 말을 믿는 건지 더 들어 보려는 건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제가 살아 돌아온 걸 보면 아시잖아요. 거짓말이 아닌 거.”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요한이 마족의 편에 서면 사계국은 더 위험해질 거예요. 하지만 요한이 사계국에 머물고, 인간을 지켜 준다면 열다섯의 수호성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사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내가 부탁하면 알렉스는 요한을 눈감아 줄 테니.

그에게 발동된 #여공남수는 복종이 디폴트다.

하지만 슬롯 키워드는 추후 남주 선택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만 간섭한다고 했다.

그러니 알렉스에게 요한의 정체를 눈감으라고 강요하거나 감정에 호소해도 완벽하게 복종할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알렉스에게는 #여공남수와 상반되는 #갑을관계 키워드가 있었다. 플러스로 #계략남 #후회남도.

한 개의 키워드와 세 개의 키워드가 맞붙는다면, 당연히 후자의 스토리로 흘러가지 않을까?

지금 당장은 요한의 존재를 눈감아 준다고 하더라도, 뒤에서는 요한을 쫓아내거나 죽일 방법을 계획할지 모른다.

앞에서는 내게 복종하고, 뒤에서 계략을 세워도 키워드에 위배 되지 않으니까.

내가 화를 내도 나중에 후회하는 모습이나 좀 보이겠지.

그러니 나는 알렉스가 스스로 갑의 위치에서 요한의 존재를 눈감는 게 본인에게 득이라 생각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면 확실하게 요한의 존재를 눈감아 주고, 오히려 제 쪽에서 요한의 신분을 감추려 들 테니.

나는 당연한 사실을 전하듯 감정을 빼고 담담하게 말했다.

“요한이 없으면 마족의 군사력은 약해질 거예요.”

나는 두 팔을 테이블로 올리고 손가락으로 잔디를 꼬았다.

여유로운 것처럼 보이고 싶어서 어디서 본 몸짓을 열심히 따라 했다.

“지금 사계국은 건국 전쟁 이후 처음으로 함께 힘을 모으고 있죠.”

지금 사계국이 가진 가장 큰 무기는 연대.

“마왕과 제1 수호성을 잃은 마족은 전하와 디아나 폐하 두 분만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지 않을까요?”

두 사람으로 충분히 처리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그냥 기분 좋으라고 말해 봤다.

알렉스는 진짜로 기분이 좋아졌는지 입매를 휘었다.

“그 마족은 그대를 좋아하나 보네. 그대도 그걸 알고 있고.”

“네.”

“그 마음을 이용하는 건가.”

“이용은 아니에요.”

알렉스가 원하는 답이 아니겠지만, 나는 거짓말을 하는 대신 솔직하게 말했다.

“저도 요한을 좋아하니까요.”

알렉스의 눈꺼풀이 반쯤 내려왔다. 긴 속눈썹이 그려 낸 그림자에 그의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알렉스는 잠시 제가 만든 마족 인형을 보다 입을 열었다.

“그 마족과 계속 함께 지낼 생각인가?”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알렉스의 시선이 올라왔다.

이것 또한 사실이기에 나는 담담히 말했다.

“요한과 저는 사는 세계가 다르잖아요. 요한은 언젠가 다시 마족지대로 돌아갈 거예요. 그때까지 기다리려는 것뿐이에요.”

“조금 전에는 그 마족이 사계국에 있어야 한다고 했잖아. 근데 돌려보낸다니?”

“처음부터 요한이 원하면 언제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울 생각이었어요. 사실 빨리 돌아가길 바랐죠. 전하나 다른 분들이 알게 되면 요한이 위험해질 테니까요.”

나는 테이블의 잔디를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들었다.

이 말을 위해 여기까지 돌아왔다.

“저도 양보를 하는 거예요. 전하께서 요한을 눈감아 주시면, 저도 사계국을 위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요한을 붙잡아 둘게요.”

나는 알렉스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알렉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턱을 괸 채 빤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을 견디며 무표정을 유지했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긴 침묵에 내 표정이 흐트러질 때쯤, 알렉스가 입매를 기울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옆으로 다가왔다.

잔디밭에 무릎을 꿇은 알렉스가 내 팔을 제 손에 쥐더니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신경 쓰여서 집중이 안 돼.”

끈적하게 말라붙은 핏자국 위로 따스한 열감이 퍼져 갔다.

가시에 울퉁불퉁하게 찢긴 살점이 촘촘히 맞물리며 하나로 이어졌다.

살갗이 매끈해지자 알렉스가 시선을 들어 눈을 맞춰 왔다.

“그대가 뭘 원하는지 알고, 내가 거절할 수 없는 말을 했다는 것도 알아.”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듣고 싶지가 않네.”

“들으세요.”

“…….”

“제가 원하는 것도 맞지만, 이건 전하께 좋은 일이 맞아요.”

알렉스는 말없이 손가락을 움직여 내 팔을 쓸었다.

맑은 금안에 핏자국이 비쳤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내 팔을 물끄러미 보던 알렉스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왜 내가 기사가 되는 걸 거절하는 거야?”

“그야 전 살고 싶으니까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정제되지 않은 본심이 튀어나왔다.

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미 분위기는 깨진 뒤였다.

이렇게 된 거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전하, 제가 생존력이 뛰어난 거 아시죠?”

알렉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게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는 듯했다.

“생각해 보세요. 마물 떼 사이에서도 살아남았고, 마족 지대에서 길을 잃고도 살아남았고, 황궁에서 독에 당하고도 살아남았잖아요.”

나는 친절하게 그의 머릿속에 북마크를 찍어 주어 그가 쉽게 기억을 찾도록 도와주었다.

그제야 인정하듯 알렉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진지하게 덧붙였다.

“그게 다 제 생존 욕구가 강해서 그런 거예요.”

“하하.”

알렉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마.

난 진지해.

나는 웃을 때가 아니라 이르듯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며 다시 설명했다.

“전하의 파트너로 검투 대회에 참가했다가 괜히 연인이라고 소문이라도 나면…….”

“좋은 일이네.”

아니라고 이 자식아.

끝까지 들어.

“아니죠. 전하가 전쟁에 나가신 동안 저는 죽을 위험에 노출되는 거죠.”

“황태자의 연인이 되는 게 왜 죽을 일이지?”

알렉스는 기분이 나빴는지 인상을 썼다.

알렉스가 대놓고 인상을 쓰는 건 드문 일이라 조금 졸았지만, 티 내지 않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하는 황실에서 내정한 약혼자도 있잖아요.”

“그건 황제 폐하의 생각이시고.”

“바로 그거죠. 황제 폐하가 절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알렉스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 피식 웃었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내가 성격 더러운 걸 아는 유일한 분이시니.”

유일할 리가……. 너 성격 더러운 거 아는 사람이 내가 아는 것만 몇 명인데.

그러나 때론 진실이 사람을 아프게 하는 법이니 입을 다물어 주었다.

나는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전하의 외척으로 내정된 백작가에서도 제가 없어지길 바라겠죠.”

“아, 감히 내게 그런 마음을 먹을 가문은 가을국에 없어. 내가 어떻게 나올지 뻔히 알 텐데.”

하나만 해. 하나만.

아까는 너 성격 나쁜 거 아버지만 안다며.

그러다 문득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설마 알렉스는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더 성격이 더러운 건가.

지금 모습이 나름 정제된 모습인 건가?

등골이 오싹해졌다.

“어쨌든 그런 정치적 이유도 있을 거고요. 또 전하는 적도 많잖아요. 괜히 전하의 정적들한테 약점으로 노려지기 싫어요.”

적이 많은 건 사실인지 알렉스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저도 제 인생이 갑자기 왜 이렇게 꼬인 건지 모르겠는데, 제 인생 목표는 소소하고 확실하게 생존하는 거예요.”

진심이다.

내 소박한 목표.

대충 [결] 치고 20억 타기.

나 상위권 순위도 필요 없고 갈등, 위기 진심으로 사절이라고!

순간 울컥했지만, 그 감정을 꾹 누르며 다시 말했다.

“어쨌든 제 생존 본능이 말하고 있어요. 전하랑 엮이지 말라고. 특히 전하와 엮이는 걸 세상에 드러내지 말라고요.”

알렉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은근슬쩍 다시 내 손목을 잡았다.

“솔직히 말하면 위험해도 옆에 있게 하고 싶은데.”

이 자식이 지가 죽는 거 아니라고.

먼치킨 특유의 안전불감증을 뽐내며 알렉스가 미간을 구겼다.

“그러다 정말 죽으면 돌이킬 수 없을 테니 고민이 돼.”

아니야, 그건 고민할 일이 아니야. 제발 정상적인 사고를 해 줘. 사람은 죽으면 안 되는 거야.

“데이지.”

“네, 전하.”

알렉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대로 제 입술을 내 팔에 붙였다.

“죽지 마.”

그는 조금 더 아래 핏자국이 가득한 곳으로 입술을 내렸다.

“그대는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전하가 제 생존 욕구만 존중해 주시면 그 소원은 충분히 이루실 수 있어요.”

알렉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따뜻한 바람이 살갗을 간질였다.

간질거리는 감각에 나는 움찔했다.

알렉스는 천천히 제 입술을 움직이며 내 팔에 계속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을 때마다 뜨거운 열감이 퍼졌다.

그리고 핏자국이 조금씩 사라져 갔다.

곧 다시 새어 나온 한숨에 알렉스의 패배 선언이 담겼다.

“알겠어. 그대가 원하는 대로 할게.”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