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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27화 (128/208)

127화.

“얼마나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너무 자신 있게 말하니까 마왕처럼 세상을 얼리거나, 겨울국 황족처럼 도시를 불태울 수 있는 건가 싶어서요.”

허세는 허세로 눌러야지.

나는 요한이 정신을 차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했다.

“요한은 세상을 전부 얼릴 수 있나요?”

드디어 요한이 입을 다물었다.

“그 정도도 못 하면서 어떻게 봄국 황실 근위대를 이겨요.”

다시는 봄국을 무시하지 마라, #인외남주.

망신을 한 번 줬으니 이제 슬슬 달래 주려는데, 요한이 고개를 틀어 유리창 밖 정원을 빤히 쳐다봤다.

핏자국이 번진 듯 붉은 노을이 넓은 정원을 짓누르고 있었다.

요한은 가만히 노을 진 세상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데이지는 눈을 좋아하십니까?]”

“눈이요?”

“[제가 아는 사계국 사람은 눈을 좋아했거든요.]”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지.

“[그런데 책에서는 봄국에 눈이 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요한은 입매를 휘며 내게 고개를 돌렸다.

“[아쉽지 않습니까?]”

“뭐가요?”

“[여기서는 눈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요.]”

대체 뭔 말이지.

다정 남주 화법인가.

얼굴로 매력을 커버하는 요한이지만, 슬슬 손가락이 안쪽으로 말리고 있다.

맞장구치기 힘들다.

조용히 있으니 요한이 미소를 지었다.

따뜻한 색감의 노을이 그의 얼굴선을 따라 스며들었다. 그러나 눈에는 부드러운 인상이 담기는데 나는 한기를 느꼈다.

기분이 아니었다.

정말로 차가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쓸며 지나갔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어온 탓이다.

창으로 시선을 튼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허공에서 깃털처럼 큰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지금 눈이…….”

“[네, 눈이네요.]”

요한은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눈과 얼음은 신기루처럼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지지 못한 눈은 춤을 추듯 계속 허공을 배회했다.

붉은 노을 위로 누군가 하얀 물감을 흩뿌려 점묘화를 그린 것 같았다.

그 정경을 보던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했다.

정말로 눈은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계속 하늘로 올라갔다.

처음엔 바람에 움직이는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눈은 끊임없이 올라가고 있었다.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린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늘에 이에테르가 장원이 있었다.

거대한 십수 채의 저택과 정원. 심지어 성벽 바깥의 거리와 그 위를 걷는 사람까지.

마치 호수에 반사된 것처럼 새하얀 장원이 얼음으로 조형됐다.

지상과 얼음 사이에서 생긴 눈이 올라가 쌓이는 거였다.

현실감 없는 모습에 나는 넋이 나가 눈만 깜빡였다.

요한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제가 마족이라는 걸 감출 필요가 없게 되면 더 오래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모든 것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나는 그제야 요한이 어떤 위치인지 깨달았다.

제 힘으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종족을 군림했던 #아포칼립스 남주.

그런 남주를 힘으로 자극했으니 화가 난 것도 이해가 갔다. 늘 내게 굽히고 나와 줘서 나도 모르게 그를 낮게 본 듯하다.

아니 양심적으로 말하자. 강아지 보듯 대해 왔잖아.

요한은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데이지.]”

“네.”

“[저희는 생각이 많이 다르니 어쩌면 부딪힐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

가치관과 생활양식이 아주 많이 다르니까.

수긍하자 요한이 씁쓸하게 말했다.

“[그 순간이 오면 누군가는 이해할 수 없어도 양보를 해야 할 겁니다.]”

“그렇죠.”

대화로 풀기에는 간극이 크니, 양보하는 수밖에.

요한은 제안하듯 말했다.

“[내기를 하죠. 제가 그대의 기사로 신년 검투 대회에서 우승하면 제 소원을 들어주고, 반대로 제가 지면 데이지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로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이 사람이 나를 너무 물로 보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요한을 노려봤다.

“지금 이길 자신이 있으니까 이런 제안을 하는 거잖아요. 상대가 누구든 얼려 버리든가 태워 버리겠다, 이 생각이죠?”

요한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능은 쓰지 않겠습니다.]”

“검으로만 대결하시겠다고요?”

요한은 여상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요한을 보고 있으면 마족이 인간을 얼마나 하찮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괜히 고민하는 척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꼈다.

하지만 좀 흔들렸다.

선택된 남주에게는 법칙이 있다.

일명 남네다, ‘남주 네버 다이’ 법칙.

선택된 남주는 죽지 않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지 않았다.

선택된 남주들끼리 싸우면 남주 등급으로 서열이 갈리지만, 선택된 남주와 미선택된 남주가 싸우면 무조건 선택된 남주가 이겼다.

요한은 운이 좋지 않았다.

지금은 1차 중간발표와 리안 영애 사건 때문에 남주를 선택한 영애들이 많았다.

그 영애들이 이 검투 대회에 얼마나 진심인데.

심지어 이번 신년제는 사계국 연합으로 진행되는 만큼, 전 대륙에서 유저들이 참가했다. 서사를 만들지 않아도 가을국으로 플레이 존을 이동할 수 있으니까.

그 어떠한 때보다도 선택 남주 참가율이 높은 상황이다.

아무리 요한이라지만, 이건 내가 이기는 게임이지.

나는 요한이 내기의 부상으로 건 소원을 고민해 봤다.

‘요한에게 빌고 싶은 소원이라.’

하나 있기는 했다.

언젠가 요한을 감당할 수 없는 날이 오면 어떻게 하나 걱정됐는데, 그때 마족 지대로 돌아가 달라고 소원을 빌면 될 것 같았다.

거짓말로 마족 지대에서 날 기다리게 할 필요도 없고,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대며 상처 줄 필요도 없잖아.

‘요한이 들킬까 봐 걱정되니까. 돌아가 주세요. 소원이에요.’

하면 끝인 거잖아?

잠시 고민하던 나는 거절할 것처럼 시선을 돌리고 테이블의 약재를 정리했다.

“요한은 검도 잘 다루잖아요. 어떻게 봐도 제가 불리한 게임 같은데요?”

“[저는 다쳤습니다.]”

요한은 다급하게 말했다.

붕대를 감은 제 팔을 들어 보이며 말이다.

방금 하늘에 장원을 만들고 강하다고 으르렁대던 분이…….

놀라운 태세 전환이었다.

어지간히 검술 대회에 참가하고 싶은 듯하다.

좋아.

요한이 을이다.

그는 협상의 협 자도 모르는지 간절한 마음을 감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제게는 페널티도 있습니다. 절대 데이지에게 불리한 조건이 아닙니다.]”

나는 괜히 손끝으로 귓불을 매만지며 신음을 흘렸다.

“음, 요한은 반대 손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요한의 표정에 순간 뿌듯함이 차올랐다.

좋아하던 그는 금세 자괴감을 느꼈는지 손으로 제 얼굴을 쓸며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그럼 5합 전에는 공격하지 않겠습니다. 그 전에 제가 공격을 하면 지는 거로 하죠.]”

검 좀 쓴다고 하는 사람들을 계속 1합으로 이겨서 그런지 요한은 아주 기고만장했다.

5합은 그냥 받아 준다니.

사계국 세계관의 남네다 법칙을 모르는 요한은 제가 이기는 게임이라 생각하며 나를 열심히 설득했다.

“[승기는 중요합니다. 5합이면 인간에게는 후한 조건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내키지 않지만 네가 그렇게 원한다면 생각해 볼게’라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음…… 거기에 ‘15합 내로 못 이기면 기권하기’도 추가해 주시면 생각해 볼게요.”

“[좋습니다.]”

요한은 눈에 띄게 환해진 얼굴로 바로 미끼를 덥석 물었다.

아무리 요한이라지만, ‘남네다’ 법칙을 받은 남주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이 세계는 시스템이 신인걸.

우리는 신의 정한 법칙을 거스를 수 없다고.

나는 슬슬 마음을 정했다.

소원을 받을 수 있다면, 감수할 만한 위험이었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이별을 위한 치트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까 예선에서 탈락할 텐데 위험할 일은 전혀 없을 거 같아.

나는 혹한 척하며 손으로 뺨을 눌렀다.

“그래도 뭔가 제가 손해인 거 같긴 한데…….”

나는 뻔뻔하게 저렇게 말하며 말꼬리를 끌었다.

요한은 내가 거절할까 걱정이 됐는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절대 손해 보지 않으실 겁니다.]”

웃음이 나오는 걸 겨우 참았다.

“그럼 소원을 들었을 때 그 이유를 묻거나, 변명하지 않는 거로 해요. 소원을 빌면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들어주는 거예요.”

“[물론입니다.]”

시차 적응 실패보다 무섭다는 세계관 적응 실패.

마족 지대 최강자는 수많은 남주 속에 던져진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나는 굉장히 손해 본 장사꾼처럼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약통을 품에 안았다.

“알겠어요. 내일 비에른한테 말해 둘게요.”

이제 돌아갈 생각으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4일 뒤에 봄국 광장에서 예선전을 한다고 들었어요. 예선까지 빨리 나으세요.”

“[제가 빨리 나으면 데이지에게는 안 좋은 거 아닙니까?]”

요한이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모순을 지적했다.

“고작 내기 때문에 아프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빨리 낫는 게 우선이죠.”

요한은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살짝 감동한 표정이었다.

양심을 찔리게 하는 얼굴이었다는 뜻이다.

나는 빠르게 시선을 피하고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그럼 푹 쉬고 잘 자요.”

나는 다시 강아지처럼 보이는 요한을 안에 두고 재빨리 방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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