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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P 100 영애-133화 (134/208)

133화.

모르겠다.

원앤온리 신봉자인 내가 어쩌다 역하렘의 길에 들게 된 건지.

‘아니, 이걸 역하렘이라고 하긴 좀…….’

슬롯에 있을 뿐이지 내가 남주를 여러 명 선택한 건 아니잖아?

나는 기분이 이상해져서 방에 있지 못하고 바구니를 들고 나왔다.

똑똑.

“데이지 영애? 빨리 왔네요.”

안쪽에서 시에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바로 문을 열고는 들어오라고 했다.

“아! 이게 그 입욕제구나.”

“네, 몇 개 챙기세요.”

“우와, 고마워요. 저는 레몬색이랑 파란색 가질래요.”

시에나는 부드럽게 눈을 휘며 동그란 입욕제 2개를 챙겼다.

“영애 들른다고 해서 룸서비스 시켰는데 차 마시고 가요.”

“감사합니다.”

나는 바구니를 내려 두고 소파에 앉았다.

시에나는 커뮤니티를 보고 있었는지 노트북에 커뮤니티 화면이 떠 있었다.

“커뮤니티 구경하고 있을래요?”

내가 화면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시에나가 웃으며 말했다.

“저 그동안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영애랑 차 마시고 바로 오페라 하우스로 출발해야 해서.”

시에나는 신년제 기간 동안 열리는 오페라 공연을 모두 예약했다.

봄국에 바바라 영애가 있다면 가을국에는 유명한 남자 배우가 있었다.

그 둘이 함께 나오는 공연이라 표를 구하기 어려웠다고 하는데 시에나는 공작부인답게 인맥으로 7일 공연일 티켓 7장을 모두 구했다.

역시 덕후는 어딜 가도 덕질을 하게 되는 건가. 그저 장르만 로판에서 오페라로 바뀐 듯하다.

시에나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노트북에 손을 올렸다. 사실 커뮤니티를 보고 싶어서 근질근질하던 차였다.

알렉스 원작이 대체 어떻길래 오라 영애가 저러는지 커뮤에서 정보를 찾아보고 싶었다.

황태자를 검색하니 여러 글이 떠올랐다.

알렉스는 지위 탓인지 아주 유명한 남주였다. 그리고 오라 영애의 말대로 알렉스의 원작은 엄청난 것 같았다.

제목: 원작 여주랑은... 뭐... 끊을 수 없는 붉은 실이라도 엮여 있는 거임? [38]

『‘첫사랑은 지옥’ 이거 완전 유명한 소설인데 들어본 영애 있어?

나 내가 ‘첫 지옥’ 빙의 여주인 거 깨닫자마자 바로 서브 남주 낚아서 결혼하고 사업 시작했거든. 원작 여주하고 안 엮이려고... 근데 미친 오늘 원작 여주 만남 ㄷ ㄷ ㄷ ㄷ

아니 얘는 무슨 나한테 레이더라도 달렸나 ㅠ_ㅠ

소설에서도 빙의 여주 X나 괴롭히더니 내 상표 고대로 따라 해서 옆에 가게 문 열더라ㅠ

얘 인싸라 친구 많아서 내 단골이던 귀족 영애들 귀부인들 다 옮겨감 ㅠㅠㅠㅠㅠ

하, 내가 황태자도 포기하고 원작에서 도망쳐줬잖아! 근데 이 가스나 나한테 와이라노 ㅠㅠ

오늘 매출 최저 찍고 우울해서 술 마셨음.

나 재수 옴 붙은 거 같은데 이거 굿을 해야 해 퇴마를 해야 해?

가을국이니까 퇴마를 해야 하나? 여름국 가서 #무녀여주 모셔와야 할까?

퇴마랑 굿 둘 다 해본 영애 있으면 뭐가 더 효과 있는지 후기 좀 남겨주라ㅜ』

┗ 첫지옥? 와 내 인생 소설인데 여기서 보네 > < 가을국 황태자가 그 황태자구나 아쒸, 여권 챙겨야지 가을국 놀러가야겠다!!!

┗ 첫지옥 극악 피폐물 아니야? 내 기억에 그거 여주가 엄청나게 굴렀던 거 같은데;;

┗ 원작 여주 누구야? 나도 가을국 플레이 중인데 이름 좀 알려주라 원작 여주 피하게ㅠㅠ

┗ 글쓴이: 나탈리아라고 도미니 백작가 둘째 딸이야! 다들 조심!

┗ 나 그 소설 안 봐서 그런데 왜?? 원작 여주 돌아이야??

┗ 도라이 정도가 아님 ㄷ ㄷ 짝사랑하던 사패 황태자가 햇살 빙의 여주한테 감정 느끼니까 눈깔 돌아서 음독자살 함 ㄷ ㄷ 그리고 그거 빙의 여주한테 독살이라고 뒤집어씌워서 빙의 여주 지하 감옥에 가두고 ㄷ ㄷ

┗ 그거는 진짜……. 불닭 맛 전개야……. 황실도 미쳤어. 황태자한테서 떼어놓으려고 빙의 여주한테 살수 보내잖아…….

┗ 그거 범죄잖아!!!ㅇㅁㅇ

┗ 글쓴이: 내가 왜 바로 서브남주 선택 갈기고 도망쳤는지 알겠지? ㅠㅁㅠ

┗ 현명했다 울 영애 ㅠㅠㅠㅠ

알렉스가 #피폐물 남주인 건 알았다. 그런데 막상 원작 얘기를 들으니 더 무섭게 느껴진다.

제정신 아닌 원작 여주와 범법을 일삼는 황실.

왜 다른 영애들이 알렉스를 슬롯에 넣지 않았는지 이해가 간다.

“하아.”

“왜 한숨이에요?”

마침 방에서 나온 시에나가 나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내 상황을 털어놨다.

“제가 알렉스를 슬롯에 넣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원작 여주랑 엮였어요. 내일 황실 연회 오라고 초대받았는데 어쩌죠?”

“아.”

이해했는지 시에나가 짧은 감탄사를 흘리며 소파에 앉았다.

“뭐 죽기야 하겠어요?”

“원작에서는 황실이 빙의 여주를 죽이려고 했대요.”

“……왜 간다고 했어요. 못 간다고 하지.”

“안 가면 정말로 찍힐까 봐 무서워서요. 거절할 만한 명분도 없고.”

똑똑.

그때, 룸서비스가 도착했다.

시에나는 짧게 고개를 저으며 일어났다.

“괜찮을 거예요. 막말로 지금 3국이 합심하겠다고 신년제를 같이 여는데, 봄국 귀족을 가을국 황실에서 건드리겠어요? 일을 친다고 해도 3국 연합이 끝난 뒤에 하겠죠. 내일은 아닐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멀어지는 시에나의 뒷모습을 보며 눈물을 삼켰다.

“영애, 저는 3국 연합이 끝난 뒤에도 죽고 싶지 않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여주는 그렇게 쉽게 죽지 않는답니다.”

시에나는 귀여운 여동생 보듯 나를 보며 문을 열었다.

보통 귀족들은 여행을 다녀도 시중을 들 사용인을 데리고 다니는데, 우리는 최대한 그들을 두고 오려고 노력했다.

사용인이 붙어 있으면 귀족 연기를 해야 하는데, 가을국은 호텔이나 가게를 운영하는 영애들이 많다 보니 같은 유저 앞에서 귀족 연기를 하는 게 민망하고 낯 뜨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국 유저들은 여행을 다닐 때, 최소한의 인원만 동행해서 그들은 따로 숙소를 잡아 주었다.

직원이 티 테이블을 세팅해 주고 나간 뒤 나는 시에나와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다 방을 나왔다. 공연 시간이 가까워진 탓이다.

이제 아슬아슬하게 저녁에 접어드는 시간이었다.

나는 손에 든 입욕제 바구니를 내려다봤다.

다들 여독 때문에 피곤할 테니 어차피 나눠 줄 거라면 지금 주는 게 나을 거 같았다.

위층으로 올라가 비에른에게도 나누어 주고 다시 내가 있던 층으로 돌아왔다.

내 방 바로 맞은편에는 요한이 지내고 있었다.

나는 요한에게도 입욕제를 나눠 주고 방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문을 두드렸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곧 문이 열렸다.

요한은 들어오라는 듯 문을 더 넓게 열었다. 하지만 놀란 나는 들어가지 못하고 요한을 보며 입을 벌렸다.

“이 옷은 어디서 났어요?”

요한은 어디서 구한 건지 가을국의 신사복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 재킷과 베스트. 긴 다리 탓에 아래로 한참 내려간 시선이 구두에 닿았다.

태가 좋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를 위해 맞춰 준 건지 가을국의 의복은 요한에게 잘 어울렸다.

요한은 주변을 흘긋 보고는 안쪽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들어와서 얘기하자는 것 같다.

하긴 누가 마족어를 들을 수 있으니까.

순순히 안으로 들어서자 요한이 문을 닫으며 입을 열었다.

“[이에테르 공작이 가져왔습니다. 선물이라고 하던데요.]”

방금 입은 건지 소파 테이블 위에 리본이 풀린 커다란 상자가 올려져 있었다.

“와,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했대.”

나는 웃으며 한 발짝 물러나 비에른이 샀다는 그 옷을 감상했다.

비에른은 요한을 좋아했다.

그럴 만했다.

보통 기사는 가문에서 돈과 시간을 투자해 키워야 한다. 한마디로 기사는 귀족가의 큰 재산인 셈.

그런데 요한은 비에른이 투자한 적도 없는데 제 발로 이에테르가에 들어왔다.

운 좋게 들인 기사가 만렙이니 비에른은 요한을 좋아했다. 그리고 요한이 봄국 예선에 통과한 8인이 된 후로는 그에게 애착을 갖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비에른이 보낸 선물 상자를 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어느 세상이나 능력자는 인정을 받는구나.

기사 계약이 끝나도 요한이 떠나지 않도록 인력 관리를 하는 모양이다.

요한은 내 웃음이 신경 쓰였는지 제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상합니까?]”

“그럴 리가요. 요한이 입었는데 옷이 이상해 보일 리 없잖아요.”

“[표정이 별로 좋지 않은 것 같아서요.]”

“눈부셔서 그래요.”

나는 손등으로 눈을 가리며 장난치듯 말했다. 그러자 요한이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또 그러시네요.]”

그는 이제 내 주접에 익숙해졌는지 부끄러워하지 않고 한 귀로 흘렸다.

요한은 협탁에 올려 두었던 작은 지갑과 단도를 주머니에 넣고는 미소를 지었다.

계속 저 옷을 입고 있을 생각인가 보다.

나는 손에 든 입욕제 바구니를 협탁에 내려 두었다.

“이건 입욕제라는 건데, 목욕할 때 한 알 넣으면 물 색깔도 예뻐지고 향도 좋아져요.”

이해할 수 없는지 그가 한쪽 눈을 찌푸렸다.

“[왜 목욕물에서 향기가 나야 합니까?]”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나는 보라색과 분홍색 입욕제 두 알을 들고 창가 욕조로 다가갔다.

“어떻게 쓰는지 알려 줄게요.”

물을 틀자 스팀이 한 번 훅 나오더니 금세 뜨거운 물이 쏟아졌다.

“오라 호텔은 노을이랑 야경 뷰로 유명하거든요. 목욕하고 좀 쉬다가 같이 저녁 먹어요.”

나는 욕조에 걸터앉아 설명하고는 창밖을 쳐다봤다.

비싼 숙박비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환상적인 뷰였다.

“아, 이런 게 힐링이지.”

성수기면 숙박비가 올라갈 법한데 오라 호텔은 비수기 가격으로 예약을 받았다. 대신 그 몇 배가 되는 프리미엄 피를 뒤에서 받았지만.

따지고 보면 방 3개의 숙박비 대부분은 요한이 냈다. 그가 불의 이능 부산물을 만들어 줬으니.

그래도 골드는 내가 냈으니 생색은 내가 내자.

나는 양심도 논리도 없는 생각의 흐름을 따라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예약하기 정말 힘들어요. 대륙에서 제일 좋은 호텔이거든요. 그러니까 1분 1초를 소중하게 즐기세요.”

요한은 공감하지 않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방에만 있는데 지겹지 않으십니까?]”

무슨 소리야? 방 안에 있는 게 얼마나 좋은 건데.

집순이 수식을 달고 있는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지만, 요한의 목소리 끝이 묘하게 처져 있어서 무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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