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머리가 복잡해 타임워프 하는 걸 잊은 나는 결국 마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리고 생각이 깊어질수록 분노가 밀려왔다.
황족은 원래 그런 걸까? 아랫것들은 거부할 권리가 없다고 여기는 건가?
누가 결혼한다고 했냐고.
알렉스 원작 미쳤다.
스트레스 장난 아니야.
#피폐물도 보통 피폐물이 아니다.
날 믿지 않지만, 이용 가치가 있어 보이니 황실 일원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거만한 황제와 앞으로 내가 아이를 낳을 일은 없을 거라며 뒤틀린 모성을 보이는 슬픈 황후.
그런 황실에 내 발로 걸어 들어갈 리가 있냐고.
응. 절대 없지.
알렉스도 웬만하면 계승권을 버리고 황실을 나오는 게 좋을 것 같다. 정신적 행복을 위해서는 그 집구석에서 벗어나는 게 최선이야.
문제는 알렉스가 딱히 제 행복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거지만.
“아, 오지랖 그만 부리자. 너무 피곤하다.”
나는 고개를 털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황도의 야경이 눈에 담겼다.
근대 로판이라 그런지 늦은 시간까지 불 켜진 건물도 보이고, 가로등과 전차의 불빛도 별처럼 검은 도시 위에서 반짝였다.
이 예쁜 광경을 보려고 거금을 들여 호텔을 예약했는데, 방에서 지내는 시간이 거의 없다.
띵.
날카로운 알림음이 울리자마자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내 방문 앞에 요한이 앉아 있었다.
나는 의아해서 나도 모르게 워치를 확인했다. 12시가 넘은 지 오래였다.
다시 고개를 들자 기척을 느꼈는지 요한이 이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나는 왜 여기 있는지 물으려다 귓가에 들린 알람에 입을 다물었다.
[특성 버프 ‘마족어 해석’ ON]
밤이라 워낙 조용하다 보니 혹시라도 누가 내 마족어를 들을까 봐 걱정됐다.
일단 방에 들어오라고 해야 하나.
시간이 늦어서 망설여졌다. 그런데 가까워지는 나를 보던 요한이 시선을 내렸다.
나는 우선 문부터 열려고 했다. 그러나 갑작스레 발목에서 퍼진 온기에 놀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요한이 내 발목을 움켜쥔 탓이다.
그는 말없이 드레스 안에서 내 발을 꺼내 왔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나는 요한을 응시했다.
그런데 푸른 드레스 자락 아래로 드러난 발등에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작은 상처가 있었다.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테이블이 부러졌을 때 파편이 튀었던 모양이다.
상처는 크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딱지가 앉아 핏자국이 말라붙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요한은 내 상처를 제 엄지로 쓸었다.
나는 한숨을 삼키고 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얘기를 좀 하긴 해야겠다.
달칵.
문을 열자 요한이 일어나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문을 닫기 무섭게 그가 입을 열었다.
“[왜 그 동료를 만날 때마다 다치는 겁니까?]”
그 동료면 알렉스를 말하는 건가.
“아니에요. 알렉스 전하는 다칠 때 없었어요. 그리고 걱정 안 해도 돼요. 아프지도 않고 다친 줄도 몰랐는데요 뭐.”
나는 요한이 뭐라고 말을 하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왜 안 자고 여기 있어요?”
요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황성에 가셨다길래 걱정이 돼서요. 찾아가 볼까 했는데, 그러다 엇갈리면 곤란해지실 거 같아서 여기서 기다렸습니다.]”
“잘했어요. 황궁 경비도 삼엄한데 큰일 날 뻔했네요.”
쪽지를 자세하게 써 두고 갈 걸 그랬다.
알렉스와의 첫 만남이 워낙 강렬했다 보니, 연회에 간 걸 억지로 황성에 끌려간 거라고 오해했나 보다.
그래도 요한의 판단력이 좋아 다행이었다.
생각해 보면 요한은 은근히 판단력이 뛰어났다.
내가 알렉스와 화원에서 이야기할 때도 비에른에게 내가 어디 있는지 말하지 않았고, 오늘도 얌전히 이곳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내가 마족 지대로 다시 찾아가기 전에도 경계를 넘지 않고 기다렸고.
그런 똑똑한 사람이 왜 말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이곳에서 고생하는지 모르겠다.
조금 짠한 눈으로 요한을 올려다봤다.
방이 어두워서 그런지 요한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졌다.
나는 문가에 있던 마석 등을 켜고는 흠칫했다. 요한의 모습이 그제야 제대로 눈에 담긴 탓이다. 안색은 어두웠고 앞머리는 살짝 땀에 젖어 있었다.
“어디 아파요?”
열을 재 보려 손을 뻗자 요한이 반사적으로 내 손목을 잡았다.
“[아뇨.]”
“근데 왜 이렇게 땀을…….”
“[더워서 그렇습니다. 사계국은 제겐 많이 더우니까요.]”
요한은 시선을 피하며 둘러댔다.
그렇게 더운가?
보일러도 꺼져 있고 햇빛도 없는 방은 서늘했다. 물론 요한은 혹한의 나라에서 살았으니 이 날씨도 덥다 느낄 수도 있지만.
좀 이상한데?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니 불편한지 요한이 다시 문을 열었다.
“[괜찮은 거 확인했으니 돌아가 보겠습니다.]”
“아니, 잠깐만요.”
나는 문을 다시 닫고 요한의 팔을 잡아끌었다.
솔직히 그렇게 세게 당긴 것도 아닌데 요한은 순순히 끌려왔다.
나는 요한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역시나 이마가 뜨거웠다.
“이것 봐! 거짓말일 줄 알았어. 아프잖아요! 언제부터 아팠어요?”
“[아프지 않습니다. 원래 더우면 열이 납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저런 어설픈 변명에 속아 줄 만큼 어리숙하지 않았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딜 가요!”
나는 협탁로 가려다 다시 현관으로 돌아와 요한의 팔을 잡아끌고 왔다. 팔을 놓아주기 무섭게 도망치려 했기 때문이다.
#역키잡이 이래서 역키잡인가. 아니, 멀쩡한 성인 남주가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나는 요한의 팔을 잡은 채 서랍을 열었다.
드르륵.
사람이 먹는 약이긴 하지만 괜찮지 않을까?
이곳에는 #수인남주도 있는데, 가을국 명의 영애가 커뮤니티에서 수인도 사람이랑 똑같은 약을 먹어도 된다고 상담해 주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요한도 #수인남주랑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한쪽 손으로 약을 꺼내 요한의 손에 올려 줬다.
“먹어요.”
그가 마지못해 입에 약을 넣는 동안 나는 물잔도 따라서 건네주었다.
“물도 마시고요.”
“[저 애 아닙니다.]”
요한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면서도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니, 한숨을 쉬며 결국 물을 마셨다.
“이제 가요.”
나는 요한을 문 앞으로 데려갔다.
그는 인사를 하고 나갔는데, 내가 문 밖까지 따라 나오니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누가 들을까 뭐라 말은 하지 못하고 제 방문을 열었다.
요한은 내가 방 안까지 따라올 줄 몰랐는지 적잖이 당황했다.
“[왜…….]”
“재워 줄게요.”
“[……예?]”
요한이 드물게 눈을 크게 떴다.
“혹시 약 부작용 있을 수도 있으니까 잠들 때까지만 옆에 있을게요.”
요한한테 부작용이 없는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수인남주랑 #인외남주는 신체 구조가 다를 수도 있으니까.
요한 성격에 부작용이 있어도 말 안 할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요한의 침대로 가 이불을 걷었다. 들어가라고 고갯짓하자 요한은 말없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며 슬쩍 방을 둘러봤다.
‘이럴 줄 알았어.’
요한의 방은 아주 깨끗했다.
옷을 아무 데나 던져 둘 만한데 낮에 입었던 옷은 스툴 위에 잘 개어 뒀고, 로브와 재킷은 옷장에 걸어 둔 모양이었다.
마족 지대에서도 느낀 건데, 그는 모든 걸 홀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종족 특성인가?
나는 다시 요한에게 시선을 돌리고 침대를 툭툭 쳤다.
“빨리 자요.”
“[데이지 혹시…….]”
그는 뭔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혹시 뭐요?”
요한은 많이 아픈 건지 약 기운이 도는 건지 힘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꼭 현타를 맞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마지못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다가와 침대에 몸을 뉘었다.
나는 바로 요한의 위에 이불을 덮어 줬다.
“[…….]”
“왜요? 더워요?”
“[……아닙니다.]”
요한은 포기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언제 가실 겁니까?]”
글쎄. 되도록 오래 지켜봐야겠지만 오늘은 나도 너무 피곤해서.
“30분 안에는 잠들겠죠? 자는 거만 보고 갈게요.”
요한은 말없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왜 웃어요?”
“[그냥.]”
그는 눈을 감은 채 손을 뻗었다. 그런데도 긴 손가락은 정확하게 내 뺨을 쓸었다.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늘 이러면서 왜 좋아하는지 이유를 묻는 게…….]”
그는 또 뒷말을 삼켰다.
솜털을 간질이듯 조심스럽게 뺨을 쓸던 손가락이 내려갔다.
요한은 잠든 척 얌전히 누워 있었다.
구름처럼 부드러운 이불만이 사붓이 움직였다. 그 모습이 너무 평온해서 정말 잠이 든 건가 싶었다.
그럴 리 없잖아. 아무리 빨리 잠든다고 해도 머리를 대자마자 잠들 리가.
나는 혼자 피식 웃으며 잠들려 노력하는 요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남주를 선택하면 그 시나리오를 따라간다고 말한 건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의 서사가 밀려온다.
요한과 알렉스의 시나리오는 분명 내 타입이 아니었다. 복잡한 건 딱 질색인데, 이들 옆에서는 여러모로 어지러웠다.
요한과 있을 때는 마음이 시끄럽고, 알렉스랑 있을 때는 머리가 복잡했으니까.
그런데도 그게 싫지는 않았다. 분명 복잡하고 정신없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괜히 볼이 간지러워 손바닥에 뺨을 꾹 누르며 기댔다.
‘나도 몰랐던 취향이 이런 건가?’
지금은 답을 알 수 없는 고민이었다.
나는 생각을 내려 두고 조금 더 요한의 모습을 지켜보다 방으로 돌아갔다.